일기 쓰기는 무엇을 생략할지, 무엇을 잊을지를 솎아내는 선택의 연속이다.

기억할 만한 샌드위치 하나, 기억할 만하지 않은 층층의 계단. 아무도 기록하지 않는 수다스러운 말소리로 가득한, 기억할 만한 잠깐의 대화. - P10

나는 어느 공책 표지 안쪽에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사랑 편지 삼아 시 몇 구절을 필사해 두었다.

그대가 다 늙어 머리는 허옇게 세고 잠이 늘어 난롯가에서 꾸벅꾸벅 졸 때, 이 책을 꺼내어 천천히 읽으며 떠올려봐요. 한때 그대 눈이 지녔던 그 유순한 눈빛과 깊은 그림자를···.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 『그대가 늙거든(When You Are Old)』 - P11

그때는 일기장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잊는지를 아직 모르던 때였다. - P13

간혹 일기 쓰기를 매일 하는 운동이나 기도나 자선 활동처럼 고결한 행위로 간주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시도만 몇 년째예요, 라고 그들은 말한다. 매년 1월이면 일기를 쓰기 시작해요, 라거나 전 기본자세가 안 돼 있어요, 라고도 말한다. 그들은 나를 의지력이나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일기를 쓰지 않는 편이 더 힘든 걸요, 하고 해명해 본다. 내게 일기 쓰기는 (한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지긋지긋한 숙제 같은 것이 아니다. 운동을 하거나 돈이 되는 일을 하거나 불운한 사람들을 돕는 데 시간을 쓰는 대신 나는 일기를 쓸 따름이다. 하나의 악습인 셈이다. - P14

오늘이라는 시간은 몹시 벅차다. 하지만 문제는 오늘이 아니다. 문제는 내일이다. 내일이 없다면 나는 오늘 안에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하루하루 사이에 여분의 하루하루가, 완충 역할을 하는 하루하루가 필요하다.

하루 이상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시간을 그저 흘려보낸다면, 두렵지만 그렇게 해본다면, 나는 그 시간에 휩쓸려 사라질 것이고, 무언가를 지속하는 행위의 목적을 더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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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한 사람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으니까. 그것도 돈을 벌겠다는 꿈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 P35

키라 세르게예브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살뜰한 보살 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매일 아침 자신에게 묻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전생에 내가 나라를 구했나?" - P36

인노켄치도 신이 난 건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텅 빈 집에 고양이처럼 홀로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고 숨도 쉬고 노크도 했으며, 심지어 노래도 부르곤 했다. 이 모든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꼈다. 이러다 갑자기 죽음과 마주한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누군가 뛰어와서 손을 잡고 저세상 가는 그를 배웅할 테니 말이다. 물론 나를 위해 눈물도 흘려 줄 것이다. 무시무시한 공포에 휩싸여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도 없는 계단을 따라 홀로 내려가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 P36

안젤라는 그녀의 과거를 들여다보곤 갑자기 떠올렸다.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이람? 과거의 아름다움과 지식, 연애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뇌 기능이 퇴화되어 자기 이름도 기억 못 할 바에야······." - P40

노브이 루스키의 저택은 지붕이 독특한 3층짜리 벽돌집이었다. 별장 밀집 지역이 아니라 평범한 시골인 마리에, 그것도 기울어져 가는 농가들 사이에서 혼자 바보처럼 튀는 건물이었다. 자랑하듯 혼자 우뚝 서 있어서 단연 사람들 눈에 띄었다. 안젤라는 그 집을 보고 ‘불타 버리면 끝인 것을······.‘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 P41

책은 좋은 책과 나쁜 책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책과 맞지 않는 책으로 나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처럼 말이다. 자기 자식은 누구든 좋아하지만, 남의 자식은 모든 사람이 감탄하고 칭찬해도 무심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도스토옙스키는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서 어떤 감정을 찾아 밖으로 끄집어낸다. 그러고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 병적인 상상력을 말이다. 반면 바보들도 이해할 만큼 쉽게 쓰는 작가들도 있다. 그런 글의 특징은 술술 읽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읽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모든 것이 잿빛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 P44

안젤라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
"그렇게 하세요. 우리는 당신네보다 적으니까." 디아나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안젤라는 ‘우리‘니 ‘당신네‘니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란 돈을 가진 쪽, 그러니까 저택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한편 ‘당신네‘란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과 시골 마르트노프카에 사는 사람들,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양팔을 뻗어 돈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돈 가진 사람들은 그들을 분류해서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골라 가면 그만이라는 논리였다. - P48

"집으로 초대하는 건 그 사람을 환대한다는 것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공간을 보여 준다는 걸 의미하죠. 레스토랑에 초대하는 건 접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거든요."
안젤라는 적이 놀랐다. 그녀는 지금까지 반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54

안젤라는 모든 모스크바 여자가 다이어트 중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마르트노프카에서는 아무도 다이어트에 관심이 없었다. 안젤라는 개도 큰 개가 있고 작은 개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도 덩치가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는 것일 뿐 이런 점이 누군가를 더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고 말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었다. - P57

하지만 괜찮다. 안젤라는 사지가 멀쩡하고, 머리는 정상으로 어깨에 붙었고, 그리고 킬리만자로의 눈이 있었다. 게다가 적어도 발아래 땅이 있고 머리 위에 태양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동등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영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파베르제의 달걀을 가진다 해도 죽음을 피해 갈 순 없다. - P59

밤마다 달빛이 집 안까지 들어왔고, 근심 어린 그림자가 벽을 따라 움직였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시간이었다. 어서 빨리 노 래를 받고 싶었다. 한편 그냥 사랑을 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철창에 갇힌 알료시카 셀리바노프조차 왕자로 보이고 그가 철가면과 겹쳐 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심장을 꿰뚫던 그의 거친 입술도 떠올랐다. 이어서 머리, 가슴 그리고 말하기 곤란한 신체 부위를 포함하여 온몸이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왔다. 창피하고 말고 하는 것도 누군가 옆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그녀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묻는 사람도 없었다. - P60

그런데 레나는 어떤가? 키프로스섬에 갔다가 좋은 물을 마시러 키를로비바리에 가는가 하면, 여름에는 생트로페의 바다에 가 고, 겨울에는 스키를 타러 쿠셰빌에 가면 그만이었다. 이런 여행은 그녀의 단조로운 갈색 톤 삶에 묻은 얼룩 정도에 불과했다. 레나는 사랑에 목말라했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사랑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봉사하고, 만족시키고, 포옹하고, 말을 하고,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고, 온갖 천상의 향기를 내뿜는 거였다. - P61

니콜라이는 사색에 잠긴 채 식사를 계속했다. 그의 뒤통수는 무언가 미성숙한 면이 있었다. 안젤라는 그런 그가 안쓰러웠다. 레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인생의 맛을 느끼지 못한 채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었다. 굳이 맛을 찾자면 서운함이랄까. 모든 게 니콜라이의 잘못이었지만, 그는 자기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관망할 뿐이었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법이니까. 그가 원인을 제공했지만 사실은 그도 피해자였다. 브론스키처럼. - P69

‘맙소사, 얼마나 피곤하면 저렇게 잠이 들까. 사람 꼴이 말이 아니네. 사실 늙는 걸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돈으로도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 P71

지금의 안젤라는 노래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학 한 마리를 잡겠다며 남이 싸 놓은 똥을 치우고 끊임없이 닦고 청소하느라 세 월을 낭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저분한 것을 깨끗하게 만들고, 어두운 곳을 밝게 만드는 일 그리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식재료로 맛있는 냄새가 나는 점심을 만드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긴 했다. 모두 앉아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곤 하니까 말이다. 그럴 때면 그들의 얼굴도 밝아진다. 위는 음식으로 가득 차고 도파민이 분비된다. 사실 인간에게 노래와 점심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P75

이제 아들은 성인이 되었고 남편도 옆에 있고 일도 마음에 들었으며 몸도 건강한 편이었다. 이 이상 무언가를 더 바란다면 욕심일 듯싶었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감사 속에 몸을 녹이는 일만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편이 나을 테니 말이다. 남이 봤을 때는 시답지 않은 행위라도 말이다. - P76

안젤라는 부자들의 삶은 파티와 유희 그리고 연애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반면 그녀의 삶은 첫째도 노동, 둘째도 노동, 셋째 도 노동이었다. 그것도 아침부터 밤까지. 밤에 잠깐 잠드는 것 빼고는 또다시 쳇바퀴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니콜라이는 자신의 삶이 마음에 들었다. 원하는 것은 언제든 이룰 수 있었다. 삶은 연극이고, 그는 그 삶의 연출가였다. - P80

"난 우정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우정은 게오르기만으로 충분해요. 난 열정이 필요하다고요."
"열정은 돈을 주고 사면 되죠." 라이사가 지적했다.
"대가성이 있는 사랑 말고요.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요. 바보 이반이 세 개의 솥에 들어갔다 나와서 젊은 이반 왕자로 변한 것처럼 그렇게 되고 싶다고요."
"당신의 솥들은 똥으로 가득 찼을 거예요. 그 안에서 헤엄칠지 말지는 당신이 결정할 문제죠."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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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퍼트 레일라, 그곳의 문제는 단 하나뿐이지만, 그 뿌리가 너무나 깊어서 도무지 근절할 수가 없다네. 법정은 인간에 의해 돌아가지만 정의는 그렇지 않으니까. - P190

루퍼트 결국 중요한 건 살인의 범위 아닌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작은 규모의 살인엔 공포를 느끼고 치를 떨지만, 대규모의 살인엔 존경과 숭배를 표하지. 그게 바로 살인과 전쟁의 차이야. 예컨대, 한 남자가 런던의 어두운 골목에서 어떤 남자를 살해했다고 가정해 보세. 레일라의 말대로, 그의 금니가 탐나서 말이야. 사회 전체가 떠들썩해지고, 그 악한을 잡아서 처벌해야 한다고 온통 야단법석일 거야. 우리는 그걸 살인이라고 부르지. 하지만 한 나라의 젊은이나 남자가 모조리 봉기해서 다른 나라의 젊은이나 남자를 전부, 그것도 상대의 금니가 탐난다는 허접한 이유조차 없이 몰살하고자 한다면, 우리 사회는 그 같은 행위를 용인하고 심지어 박수를 보낸다네. 그것을 전쟁이라고 부르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살인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나? 지난 세계 대전 동안에, 나 역시 그러한 전제 아래서 행동했는데 말이야. 참으로 비통한 노릇이지. 그 때문에 나는 오늘도 자네들과 함께 축음기를 들으며 마음껏 즐기고 싶었건만, 무슨 늙은이처럼 한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어슬렁거리는 신세가 되었다네. 하지만 중요한 건 말일세, 내가 살인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했다는거지. 그렇지 않은가? - P190

루퍼트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아니야. 사실 십계명은 본래 그것을 부여받은 민족의 유목 생활에 있어서 심오하고 중요한 의미를 지녔을 거야. 다만 그것이 오늘날의 생활 방식엔 부적절하고 무의미한 까닭에 우리로서는 따르기 어려운 거지. 이따금 나는 그중에, 혹시 하나라도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게 있을지 확인해 보고자 했다네. 우선 ‘부모를 존경하라.‘라는 계명인데, 물론 존경하지. 그러지 않으면 어쩌겠어? 실제로 나는 내 생일마다 항상 부모님께 축하 전보를 보낸다네. 비록 그러는 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연장해 줄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야. 하지만 다른 것들도 살펴보자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라.‘ 난 이건 지키지 않아.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마라.‘ 이건 지키지. ‘살인하지 마라.‘ 좀 전에 말했듯이 이건 벌써 어겼어. - P190

루퍼트 왜냐하면 이 시간이야말로 런던이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시간 같거든. 모든 것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고, 생활의 단조로움과 쾌락의 어리석음이 똑같이 투명해지는 시간이라는 말일세. 직장을 잃은 하녀들과 슬럼가의 타락한 미녀들이 돈벌이를 위해 거리를 헤매는 시간이기도 하고 말이야. 또 광고판이 번쩍이고, 택시와 버스가 뒤엉킨 교통 체증의 시간이지. 그리고 공연장에 몰린 런던의 관객들이, 연극의 뻔한 결말을 보기 위해 어둠 속에 자리를 잡는 시간이라네. 막이 내리면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그들은 추운 데다 비까지 내릴지도 모르는 밤거리로 쏟아져 나오겠지. 그러고는 택시를 잡느라 아우성치거나 기차역으로 걸음을 재촉할 거야.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서 식은 저녁을 먹고,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 그런가 하면, 아직 조금 더 험한 꼴을 봐야 하는 이들도 있다네. 나이트클럽과 카바레는 여태 문을 열지 않았지만, 곧 영업을 시작할 테고······. 아무튼 이러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끝없이 이어질 때도 있다네. 11시 이십오 분 전. 지독한 시간이야. 섬뜩한 시간이지. 쾌락이 끝나는 시간일 뿐 아니라, 쾌락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야. 자, 내게는 지금 이 시간이 그러하다네. 게다가 오늘 밤엔 천둥까지 치지 않았나. 11시 이십오 분 전에······. - P208

루퍼트 그래, 알아들었네.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어. 세상은 기이하고, 어둡고,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니 말이야. 나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지. 그럼에도 늘 서투른 논리를 적용하려 들다 보니 이상한 길로 들어서게 돼. 이번 경우도 그런 거 같군. 자네는 내가 했던 말을 내 면전에 들이밀었고, 따라서 나는 내 말에 책임을 져야 하네. 앞으로 다시는 논리를 맹신하지 않을 거야. 자네는 내가 생명을 하찮게 여긴다고 말했어.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나는 그런 인간이지. 그런데 거기엔 자네의 생명도 포함된다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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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급변하다 보니 키라가 모르는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영화 산업이 호황을 누렸고 그녀도 잘나갔다. 영화로 보나 당시 활동하던 배우들로 보나······. 지금은 온통 경찰 영화나 총 쏘는 영화뿐이었다.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천편일률적인 작품만 넘쳐났다. 시민들이 한 번 씹고 버리면 되는 작품들이었다. 먹을 건 줘야겠는데 딱히 내놓을 게 없으니 아쉬운 대로 가축한테 던져 주듯 건초나 먹고 떨어지라는 식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드라마에 빠진 시기였다. - P25

키라 세르게예브나는 평생 거물을 낚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잉여 인간 취급을 받는 인노켄치와 함께 살았다. 사실 그 대단한 거물들은 막상 가까이에서 겪어 보면 하나같이 배신자에다 비열한 인간뿐이었다. 반면 인노켄치는 한결같이 믿음직했다. 즉 완벽한 사람은 없다. 리더십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단점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수도 없이 갈등하게 된다. 옷으로 비유하면 리더십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외출복이고 인품은 평상복이다. 물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 P27

젊은이들은 저녁이면 바닷가에 모이곤 했다. 해가 져도 바다는 여전히 숨을 쉬었다. 마르트노프카는 고령화가 진행되어 하나둘 죽어 가는데 바다는 항상 똑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늘의 달빛만이 바다를 동요시킬 뿐이었다. 젊은이들은 높은 지대에 펼쳐진 바닷가에 모여들었고, 바다는 늘 똑같은데 사람들은 매번 바뀌었다. - P29

사실 그녀가 못 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스타 팩토리》에 나온 여자들보다 모자란 것도 없어 보였다. 간혹 혀를 끌끌 찰 정도로 못생긴 여자들이 나오는 것만 봐도 그랬다. 쥐새끼처럼 작은 여자가 나오는가 하면 돼지처럼 뚱뚱한 여자도 출연했다. 농구선수처럼 키가 큰 여자도 있었다. 그들과 비교했을 때 안젤라는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그 길에 들어섰고 안젤라는 그들에게 뒤처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그녀의 친할아버지, 즉 바실리의 아버지가 "뭔가를 더 빨리 얻고 싶다면 방법은 아주 간단해. 사람들이 들어오라고 문을 여는 순간 너는 창문으로 들어가렴······." 하고 알려 주었다. - P30

멀리 구석 쪽에서 얼쩡거리는 청년이 보였다. 몽유병 환자라도 되는 듯 눈을 반쯤 뜬 채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서 있었다. 리듬에 맞춰 배 쪽으로 낮게 멘 기타의 현을 쓰다듬고 있었는데, 조각 같은 입을 움직여 허밍으로 따라 부르는 것 같았다. 안젤라는 그의 자유로운 모습에 넋이 나갔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구속받는 그녀와 달리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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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은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꽃은 벌을 유인하기 위해 좋은 향을 낸다. 반면 냄새가 고약한 것은 말려서 바람에 날려 버려야 한다. 흔적도 없이 말이다. - P11

하지만 이번만큼은 여자의 생각이 틀렸다. 나타샤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불행하지 않았다. 젖소과 함께 초원에 앉아 있는 것만큼 좋은 일이 또 있을까? 그것도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에서 말이다. 젖소는 아이처럼 순하고 순박하며 예쁘기까지 하다. 술을 병째 들이켜고 나면 세상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눈물이 날 정도로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공기를 가르며 불행을 예고한다는 말벌조차 신의 창조물이며 제 역할과 기능이 있으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P14

안젤라는 집(좀 더 정확히는 잠시 신세 지는 여자의 집)으로 3번 전차를 타고 갔다. 전차는 텅 비어 있었다. 안젤라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모스크바 사람들을 보려다 갑자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 왜 울어요?"라고 묻는 사람은 고사하고 그녀를 애써 위로하는 사람도 없었다. ‘인생은 길고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그녀의 슬픔에 빠져들었고, 그들 역시 어느새 훌쩍이기 시작했다. 어린 아가씨의 슬픔과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흐느낌이었다. 물론 자기 연민만으로도 눈물을 쏟을 이유는 충분했다. - P15

인노켄치는 인체가 수분으로 구성된 것처럼 90퍼센트의 게으름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벽장에 있는 드릴을 꺼내서 콘센트에 꽂고 벽에 구멍 낸 뒤 망치로 못을 두드려 벽에 고정하는 일은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안 날 만큼 어마어마한 결단이 필요했다. […]
그는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겐 이끌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누군가 리드해 주면 어떤 목표라도 이뤄 낼 수 있고 하늘의 별이라도 따 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리더도 선두도 아니었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2등으로 만족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2등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1등은 한 명뿐이다. 잔다르크나 미하일 쿠투조프 같은 이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군대는 2인자로 이루어진 조합이다. 2인자 없이 1인자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뤄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세계는 수많은 2인자로 이루어진 것이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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