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한 사람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으니까. 그것도 돈을 벌겠다는 꿈이 조각조각 부서졌다. - P35
키라 세르게예브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렇게 살뜰한 보살 핌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이제는 매일 아침 자신에게 묻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전생에 내가 나라를 구했나?" - P36
인노켄치도 신이 난 건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텅 빈 집에 고양이처럼 홀로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고 숨도 쉬고 노크도 했으며, 심지어 노래도 부르곤 했다. 이 모든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꼈다. 이러다 갑자기 죽음과 마주한다 해도 두렵지 않았다. 누군가 뛰어와서 손을 잡고 저세상 가는 그를 배웅할 테니 말이다. 물론 나를 위해 눈물도 흘려 줄 것이다. 무시무시한 공포에 휩싸여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도 없는 계단을 따라 홀로 내려가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 P36
안젤라는 그녀의 과거를 들여다보곤 갑자기 떠올렸다.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이람? 과거의 아름다움과 지식, 연애가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뇌 기능이 퇴화되어 자기 이름도 기억 못 할 바에야······." - P40
노브이 루스키의 저택은 지붕이 독특한 3층짜리 벽돌집이었다. 별장 밀집 지역이 아니라 평범한 시골인 마리에, 그것도 기울어져 가는 농가들 사이에서 혼자 바보처럼 튀는 건물이었다. 자랑하듯 혼자 우뚝 서 있어서 단연 사람들 눈에 띄었다. 안젤라는 그 집을 보고 ‘불타 버리면 끝인 것을······.‘이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 P41
책은 좋은 책과 나쁜 책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맞는 책과 맞지 않는 책으로 나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처럼 말이다. 자기 자식은 누구든 좋아하지만, 남의 자식은 모든 사람이 감탄하고 칭찬해도 무심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도스토옙스키는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서 어떤 감정을 찾아 밖으로 끄집어낸다. 그러고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다. 병적인 상상력을 말이다. 반면 바보들도 이해할 만큼 쉽게 쓰는 작가들도 있다. 그런 글의 특징은 술술 읽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읽고 나면 남는 게 없다. 모든 것이 잿빛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 P44
안젤라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 "그렇게 하세요. 우리는 당신네보다 적으니까." 디아나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안젤라는 ‘우리‘니 ‘당신네‘니 하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란 돈을 가진 쪽, 그러니까 저택에 사는 사람들을 의미했다. 한편 ‘당신네‘란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과 시골 마르트노프카에 사는 사람들, 한마디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양팔을 뻗어 돈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돈 가진 사람들은 그들을 분류해서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골라 가면 그만이라는 논리였다. - P48
"집으로 초대하는 건 그 사람을 환대한다는 것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공간을 보여 준다는 걸 의미하죠. 레스토랑에 초대하는 건 접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거든요." 안젤라는 적이 놀랐다. 그녀는 지금까지 반대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54
안젤라는 모든 모스크바 여자가 다이어트 중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마르트노프카에서는 아무도 다이어트에 관심이 없었다. 안젤라는 개도 큰 개가 있고 작은 개가 있다고 생각했다. 사람도 덩치가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는 것일 뿐 이런 점이 누군가를 더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고 말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었다. - P57
하지만 괜찮다. 안젤라는 사지가 멀쩡하고, 머리는 정상으로 어깨에 붙었고, 그리고 킬리만자로의 눈이 있었다. 게다가 적어도 발아래 땅이 있고 머리 위에 태양이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동등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영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파베르제의 달걀을 가진다 해도 죽음을 피해 갈 순 없다. - P59
밤마다 달빛이 집 안까지 들어왔고, 근심 어린 그림자가 벽을 따라 움직였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시간이었다. 어서 빨리 노 래를 받고 싶었다. 한편 그냥 사랑을 하고 싶어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철창에 갇힌 알료시카 셀리바노프조차 왕자로 보이고 그가 철가면과 겹쳐 보일 정도였다. 그녀의 심장을 꿰뚫던 그의 거친 입술도 떠올랐다. 이어서 머리, 가슴 그리고 말하기 곤란한 신체 부위를 포함하여 온몸이 그녀에게 신호를 보내왔다. 창피하고 말고 하는 것도 누군가 옆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그녀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그녀가 그러는 이유를 묻는 사람도 없었다. - P60
그런데 레나는 어떤가? 키프로스섬에 갔다가 좋은 물을 마시러 키를로비바리에 가는가 하면, 여름에는 생트로페의 바다에 가 고, 겨울에는 스키를 타러 쿠셰빌에 가면 그만이었다. 이런 여행은 그녀의 단조로운 갈색 톤 삶에 묻은 얼룩 정도에 불과했다. 레나는 사랑에 목말라했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사랑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봉사하고, 만족시키고, 포옹하고, 말을 하고,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고, 온갖 천상의 향기를 내뿜는 거였다. - P61
니콜라이는 사색에 잠긴 채 식사를 계속했다. 그의 뒤통수는 무언가 미성숙한 면이 있었다. 안젤라는 그런 그가 안쓰러웠다. 레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인생의 맛을 느끼지 못한 채 무미건조한 삶을 살고 있었다. 굳이 맛을 찾자면 서운함이랄까. 모든 게 니콜라이의 잘못이었지만, 그는 자기가 저지른 일의 결과를 관망할 뿐이었다. 콩 심은 데 콩 나는 법이니까. 그가 원인을 제공했지만 사실은 그도 피해자였다. 브론스키처럼. - P69
‘맙소사, 얼마나 피곤하면 저렇게 잠이 들까. 사람 꼴이 말이 아니네. 사실 늙는 걸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돈으로도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 P71
지금의 안젤라는 노래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학 한 마리를 잡겠다며 남이 싸 놓은 똥을 치우고 끊임없이 닦고 청소하느라 세 월을 낭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저분한 것을 깨끗하게 만들고, 어두운 곳을 밝게 만드는 일 그리고 멀뚱멀뚱 쳐다보는 식재료로 맛있는 냄새가 나는 점심을 만드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긴 했다. 모두 앉아서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지곤 하니까 말이다. 그럴 때면 그들의 얼굴도 밝아진다. 위는 음식으로 가득 차고 도파민이 분비된다. 사실 인간에게 노래와 점심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P75
이제 아들은 성인이 되었고 남편도 옆에 있고 일도 마음에 들었으며 몸도 건강한 편이었다. 이 이상 무언가를 더 바란다면 욕심일 듯싶었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들의 감사 속에 몸을 녹이는 일만 남아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편이 나을 테니 말이다. 남이 봤을 때는 시답지 않은 행위라도 말이다. - P76
안젤라는 부자들의 삶은 파티와 유희 그리고 연애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반면 그녀의 삶은 첫째도 노동, 둘째도 노동, 셋째 도 노동이었다. 그것도 아침부터 밤까지. 밤에 잠깐 잠드는 것 빼고는 또다시 쳇바퀴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니콜라이는 자신의 삶이 마음에 들었다. 원하는 것은 언제든 이룰 수 있었다. 삶은 연극이고, 그는 그 삶의 연출가였다. - P80
"난 우정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우정은 게오르기만으로 충분해요. 난 열정이 필요하다고요." "열정은 돈을 주고 사면 되죠." 라이사가 지적했다. "대가성이 있는 사랑 말고요. 나는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요. 바보 이반이 세 개의 솥에 들어갔다 나와서 젊은 이반 왕자로 변한 것처럼 그렇게 되고 싶다고요." "당신의 솥들은 똥으로 가득 찼을 거예요. 그 안에서 헤엄칠지 말지는 당신이 결정할 문제죠."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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