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충격을 받고 따라 한다. 입에서 그 단어가 익숙하면서도 기묘하게 울린다. 여동생의 이름, 죽은 지 이 년도 채 안 된 동생의 이름이다. 동생이 흙에 묻힌 날 이후로 그 이름을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퍼뜩 떠오른다. 언뜻 비에 젖은 교회 묘지, 물방울을 떨구는 주목나무, 어두운 구덩이, 흰 천에 싸인 너무 작고 여린 몸뚱이를 받아들이려고 벌어진 틈을 본다. 그렇게 홀로 땅속으로 들어가기엔 너무 조그마한 몸이었다. - P67

마을 여자들이 와서 죽은 여자를 씻기고 염해서 다음 세상으로 보낼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여자들은 울었다. 죽은 사람, 숲에서 나와 자기들 중 한 명과 결혼한 사람, 나무의 이름으로 불리던 사람, 자기들에게 말을 걸지 않던 사람, 벗이 되어주겠다는데도 거부했던 사람을 아껴서가 아니라, 여자의 죽음이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기 때문에 울었다. 여자들은 시신을 씻기고 머리를 빗기면서 같이 울었다. 손톱 밑 때를 빼내고 머리 위로 흰 천을 덮고, 죽은 채 태어난 작은 아기를 천으로 싸서 시신의 팔에 안기며 울었다. - P75

너희 어머니는 마음이 순수한 사람이었지. 네 엄마의 새끼손가락에 든—그러면서 노인은 옹이 진 손을 들어올렸다—사랑만 해도 다른 사람들 전부를 합한 것보다 컸어. - P82

아무도 들을 수 없는 숲으로 가서 나무에, 잎에, 가지에 대고 외친다. 나무딸기의 가시투성이 줄기를 손이 찢기도록 쥐고는, 일요일마다 단정한 차림으로 아기를 업고 가는 교회, 연기도 향로도 주문 같은 말도 없는 교회의 신에게 외친다. 신을 부르고 신의 이름을 내지른다. 당신, 당신, 내 말 들려요, 이제 당신하고는 끝이에요. 당신 교회에 가야 하니까 가긴 갈 테지만 지금부터는 거기에 있는 동안 한마디도 안 할 거예요. 죽은 뒤에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흙이고 시신이고 전부 다 없어지니까. - P85

자라면서 애그니스는 다른 사람의 손에 마음을 뺏기고 그 손을 만져보고 싶어진다. 특히 엄지와 검지 사이 살을 만지고 싶다. 새의 부리처럼 닫혔다 퍼졌다 하고 아귀힘이 집중된 곳이다. 거기서 사람의 재주, 능력, 본성을 알아낼 수 있다. 사람이 지니고 지켜온 모든 것, 붙잡고 싶어하는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다. 그 자리를 눌러보기만 해도 그 사람에 대해 전부 알 수 있다는 걸 애그니스는 알게 된다. - P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재나는 장갑이 가득 든 바구니를 들고 할머니 뒤를 따라가며 입을 삐죽거린다. 잘린 손 같아, 수재나는 생각하면서 할머니의 목소리를 자기 한숨소리로, 높은 건물 사이를 가르는 잘린 하늘 조각의 모습으로 밀어낸다. - P39

그래서 존은 혼자 술집에 간다. 일단은. 남자가 혼자 술을 마시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니까. 존은 해질녘처럼 어둑한 구석자리에 앉아 짧은 양초가 하나 놓인 탁자를 마주하고, 길 잃은 파리 한 마리가 불빛 안에서 맴도는 걸 지켜볼 것이다. - P41

햄닛의 아버지는 남자의 말을 듣는 대신 해가 건물 사이 좁은 틈으로 사다리처럼 내려앉으며 비로 촉촉이 젖은 거리를 밝히는 모습,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을 팬케이크, 머리 위쪽에서 비누 냄새를 풍기며 펄럭이는 빨래, 그리고 잠시 아내의—묵직한 머리채를 틀어올릴 때 어깨뼈가 모였다가 다시 벌어지는—모습, 바늘땀이 풀린 자기 부츠의 앞코를 생각한다. - P46

휼랜즈의 창가에 서서 고개를 옆으로 길게 빼면 숲의 가장자리를 볼 수 있다. 그러면 숲이 가만있지 못하고 변덕을 부리는 신록의 광경이 보일 것이다. 바람이 무성한 잎을 어루만지고 훑고 흩뜨린다. 나무는 바람의 손길에 저마다 조금씩 다른 박자로 반응하며 가지를 굽히거나 떨거나 흔든다. 바람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양분을 공급해주는 땅을 훌훌 떠나려는 듯이. - P48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큰아들의 어떤 점 때문에, 말편자가 자석에 끌리듯 아버지의 분노와 실망감은 늘 큰아들을 향했다. 아버지가 굳은살 박인 손으로 위팔 무른 살을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고 더 힘센 다른 쪽 손으로 쏟아지듯 강타를 날릴 때의 느낌이 늘 그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 위쪽에서 급작스럽고 매섭게 날아오는 손바닥의 충격, 나무연장으로 좋아리를 후려칠 때 거죽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 어른 손의 뼈는 얼마나 단단하고 어린아이의 살은 어찌나 여리고 무른지. 덜 여물고 덜 자란 뼈를 꺾고 누르기는 어찌나 쉬운지. 온몸을 흠뻑 적시는 분노와 무기력한 굴욕감, 끝나지 않을 듯 계속되는 매질. - P53

휼랜즈의 창가에 서 있는 그는 떠나고, 들고 일어서고,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너무 강렬해 터질 것 같은 심정이다. 수업을 받는 아이들의 어머니가 두고 간 접시 위의 음식에는 손도 대고 싶지 않다. 떠나고, 달아나고, 다리를 놀려 여기서 최대한 멀리 가고 싶은 충동으로 뱃속이 가득차 있으므로. - P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무 대꾸도 없다. 햇볕을 받은 서까래가 살살 부풀어오르며 삐걱거리는 소리, 문 아래로 방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의 한숨소리, 아마포 커튼이 휘날리는 소리, 불이 타닥거리는 소리, 텅 비어 고요히 쉬고 있는 집의 뭐라 말하기 어려운 소리뿐. - P17

하늘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도 아이는 말하던 도중에 말을 멈춘다.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을 맞고 순간 벙어리가 되기라도 한 듯 정지해버린다. 곁눈으로 누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아이는 먹던 중이든 읽던 중이든 숙제하던 중이든 하던 일을 멈추고, 중요한 일로 자기를 만나러 온 사람을 보듯 빤히 쳐다본다. 아이는 현실의 테두리, 주변 물질세계의 반경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는 버릇이 있다. 몸은 방안에 앉아 있는데 정신은 자기만 아는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정신 차려, 할머니는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탁 튕기며 소리친다. 뭐하니, 누나 수재나는 귀를 당기며 쏘아붙인다. 집중해, 선생님들은 호통을 친다. 어디 갔었어? 마침내 햄닛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자기가 집에, 식탁에, 식구들 사이에 돌아와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주디스가 이렇게 속삭인다. 어머니는 보일 듯 말듯 웃으며 마치 햄닛이 어디에 갔다 왔는지 훤히 아는 것처럼 바라본다. - P19

삶에는 어떤 알맹이, 핵심, 중심이 있어서 모든 게 거기서 비롯되고 다시 거기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 순간은 부재한 어머니의 순간이다. 아이, 빈집, 텅 빈 마당, 듣는 사람 없는 외침. 아이는 뒷마당에 서서,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얼러 재우고 첫걸음을 뗄 때 손을 잡아주고, 숟가락을 어떻게 쓰라고, 먹기 전에 수프를 후후 불라고, 길 건널 때 조심하라고, 잠자는 개를 깨우지 말라고, 물을 마시기 전에 컵을 헹구라고, 깊은 물가에 가지 말라고 일러주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본다.
이 순간은 어머니의 중심 바로 그 자리에, 평생 남을 것이다. - P22

할아버지는 계속 종이를 훔치며 말한다. 종이가 젖은 것에 대한 분노가 가느다란 검처럼 칼집에서 빠져나와 날카롭게 뻗는다. 햄닛은 분노의 칼끝이 방안을 더듬으며 상대를 찾고 있음을 느낀다. 수맥이 있는 쪽으로 뻗치는 어머니의 개암나무 가지가 문득 떠오른다. 햄닛은 땅속 수맥이 아니고 할아버지의 분노도 파르르 떨리는 수맥 탐지봉이 아니지만. 날카롭고 뾰족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분노가 다가온다. 햄닛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다. - P27

애그니스는 연기를 내며 타는 로즈메리 한 다발을 벌집 위에서 살살 흔든다. 고요한 8월의 대기에 연기가 꼬리를 남긴다. 벌들이 동시에 날아올라 애그니스의 머리 위에서 맴돈다. 가장자리가 없는 구름처럼, 계속해서 허공에 던져지고 또 던져지는 그물처럼. - P3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은 모차르트 기념비의 그림자가 조용히 자리를 바꿀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갑자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지휘에 대한 흥미가 싹 사라졌고, 페스트에 대한 그리움도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갑자기 그에게는 빈이 그리운 곳이 되었다. 왜냐하면 오후 3시가 지나면, 이 도시에는 마르기트가 없을 것이고, 12월의 소심한 채광이 더 큰 슬픔에 잠길 뿐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이 지워진 거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P260

빈 중앙 묘지에 내리는 비는 후두둑 졸탄의 우산을 세차게 때렸다. 그는 꼼짝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슈베르트의 무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체 넌 이십오 년 전의 맹세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멍청이가 이 세상에 있을 거라고 믿었단 말이니?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캐나다에 산다면? 졸탄은 그녀가 그 약속을 기억하지 못해 그곳에 나타나지 않을 경우가 가장 두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망각이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 P264

불쌍한 안나, 나는 그녀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를 위해 울었다. 슬픔 속에 살아가야 하는 남은 자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는 듯, 안나는 너무나 빨리 가 버렸다. 그를 사랑했으며, 그의 알 수 없는 슬픔에 대한 복잡한 설명, 어쩌면 불가능한 설명 들을 파헤치려 하지 않고 그저 존중한, 그런 여인의 소리 없는 퇴장이었다. - P267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혹시나 가곡 「유럽 칼새」의 미출관본을 간접적으로라도 언급하지 않을까 책의 페이지를 대충 뒤적었을 때. 누런색을 띠고 너탈너덜해진, 동물 형상이 새겨진 책갈피 하나를 발견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거기에 꽂혀 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책갈피는 마침 슈베르트의 무덤이 나온 세피아색 사진이 들어 있는 페이지에 꽂혀 있있다. 그 즉시, 수술용 거즈가 풀어지며, 그의 모든 기억들이 허락도 없이 그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 P271

그는 주춧돌에 새겨진 글귀를 읽으려, 슈베르트의 비석에 다가갔다. 하지만 이내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예져, 그러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그는, 그녀가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부터, 울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눈 속을 헤매이며 걸었네, 그녀가 내 팔을 잡고 저곳의 푸른 풀밭을 함께 거닐었을 때 남긴 발자국을 찾아." 그는 생각했다. 그가 노래를 알았다면, 마음속으로

여기에서 가져갈 수 있는
기억의 징표가 하나라도 없을까?
내 고통마저 침묵할 때면,
무엇이 나에게 그녀를 기억토록 해 줄까?

라고 바리톤의 목소리로 자신을 향해 노래를 불렀을 테지만, 마르기트만이 부여할 수 있는 생명력은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 P273

그제야 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빈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인생은 하나의 경로도 목적지도 아닌 여행이며, 우리가 사라질 때는 그 위치가 어디든 우리는 언제나 여행의 중간 지점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의 불운은 하필이면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겨울 여행에 당첨되어, 영혼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 P2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무 피곤하군. 나의 시간이 끝나고 있어······." 소년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자,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나, 카스파어?"
"문턱을 조심하세요, 스승님." - P146

눈물이 그렁그렁한 소년은 그 불길했던 오후에 써 내려간 모든 악보를 거두어 일렬로 쌓았다. 그리고 자신이 들었던 음표를 모두 잊을 수 있다는 듯, 이마를 문질러 악마의 음악에 관한 기억을 남김없이 지우려 했다. 이어 분노로 구겨 버린 악보 더미를 들고 방에서 나가, 부엌의 난로 앞에 섰다. 불복종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의 죄를 입증하는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는 한 장씩 한 장씩, 종이를 불 속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마지막 종이와 함께, 한 광인의 꿈은 불에 타 굴뚝의 연기가 되어 라이프치히의 회색 하늘로 사라졌다. 누군가의 인생처럼. - P147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 소굴 속에서의 삶을 챙겨 보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모든 것이 시작된 이래, 어떤 운명의 순환 고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신의 자비로움에 감사를 올리며 하루가 지날 때마다 옥죄어 오는 고리에 적응해 보려 했지만, 그 고리가 더욱 옥죄어 죽음만큼 작아진 후 더 이상은 신에게 감사를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P152

위험의 기운이 서린 침묵이 그의 침묵을 먹고 자라고 있었다. 예고 없이 갑자기 멈출 수 없는 기침이 시작되었다. 피할 수 없었다. 기침 소리에 공포는 다시 찾아왔고, 그는 마치 기도문을 외우듯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요······. 스치는 기억 속, 트레블링카에서 고통에 괴로워하는 자신이 있었다. - P158

그가 놀라 입이 벌어진 채 총과 탄약을 들고 꿈쩍 않고 서 있자, 검은 머리의 소녀가 이불을 들고 그에게 웃으며 다가와, 이자크 이 이불은 네 피부야라고 말했다. 네가 보초를 서는 동안, 유일한 벗이 되어 줄 거야. 그녀의 흑옥 같은 눈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녀의 이름은 한나로, 키부츠의 여러 장비들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그날 밤에는 보초를 서게 되었다. 못생기고 소심한 자신이, 유리컵 밑바닥으로 만든 것 같은 안경을 끼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줄도 모르다니. 그녀가 웃음을 띠고 이불을 준 후 멀어졌을 때에야, 이자크는 조용히 미안해, 미안해······ 하고 혼자 되뇌었다. - P159

문득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 모두가 네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강인한 네가 삶을 이어 가며 우리의 눈과 우리의 기억이 될 것이다, 내 아들아. 이자크 우처는 부모의 끔찍한 합리화를 수백 번 넘게 되새겨 보았다. 누구에게, 신이시여, 누구에게 지옥을 탈출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까. 누가 우리의 오르페우스가 되어야 합니까. - P162

사람들은 역시 둔해. 길도 살필 줄 모르고, 행인들에게는 관심도 없지. 마치 그가 인간 모두를 무시하듯 말이야. - P176

제스로 툴. 음, 좀 낫네. 좀약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 그래도 들어 줄 만해. 그런데 말이지, 옆자리 사람들은 코보스를 들으면서도, 이 펍을 망치지 않고 얘기를 잘 나눈단 말이야. 정말 사람들의 무감각함이 도를 넘은 거야. 생각하기 싫어서 하루 종일 히히덕거리다가, 밤이 되면 피곤하다며, 혹시나 모르니 알약 하나를 먹어 두는 거지. 그러면 기억의 공책을 열 필요도, 소화 불량에 시달릴 일도 없으니까. - P181

검은 집에 속한 부지와 그 주변은 언제나 조용했다. 마치 집의 벽들이 몇 년 사이 그들에게 닥친 죽음을 예견하거나 기억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이웃들은 탁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조르카의 흐느낌을 알아채지 못했고, 몇몇 이웃 여자들은 불쌍한 저 여자가 저렇게 오랫동안 집에서 나오지도 않고 뭘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했으며, 돌덩이처럼 눈물 속 씁쓸함만으로 매일 배를 채우고, 어떻게 그렇게 큰 인생의 충격을 견뎌 낼 수 있는지 그저 십자가를 그을 뿐이었다. - P192

그녀는 강가의 뾰족한 바위에 앉아 몇 시간이고 떠내려오는 죽은 자들을 살피며, 그녀의 어린 시절, 강이 잉어와 기쁨을 선물했던 그 시절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혹시 아들을 찾지 않을까 초조해하며 그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한 것은 익사한 이들의 눈에서 어두운 죽음을 읽으며, 손을 들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안녕, 내 아들들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숨바꼭질을 했을 너희들이 왜 죽어 있느냐,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여전히 공포에 질린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P193

내가 특별히 시벨리우스에 관심이 있다는 소리는 아니야. 하지만 거의 고문처럼 괴로운 수준으로 음악에 대한 재능을 타고난 게 문제라면 문제지, 젠장. 어떤 음악이든 들리기만 하면, 다른 걸 못 하고 그 음악을 들어야만 하거든. 그리고 그걸 바로 암기하고 영원히 외워 버린단 말이야. 내 안에는 음악이 너무 많아 웬만하면 그걸 위장 속에 보관해 두려 하지. 하지만 그 음악들이 머릿속에서 멜로디로 변해 튀어나올 때면, 난 정말 미쳐 버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래서 전철역에서 다시 혼자가 되기를 기다렸는데, 날 약 올리려는 건지, 음악이 사라졌지 뭐야. 내가 보기에는, 확실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그 미로 속 어디엔가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오페라의 유령처럼 웃음소리를 질식사시켜 버린 것 같았어. - P217

하지만 그림 없는 빈자리를 감상하는 것이 진정으로 영혼을 살찌우는 법. 렘브란트에 의해 감춰졌던 벽과 그렇지 않은 벽의 색깔 차이가 세월의 흐름을 여과 없이 드러내더군.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으며, 시간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구나(라틴어) 수없이 거쳐 가며 눌어붙었을 노르웨이인들의 시선들, 양파 껍질처럼 들러붙었을 거리의 매연들. 뭐, 노르웨이산 자동차나 난로가 그런 매연을 뿜어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말이야. 벽은 전시된 작품 같은 건 개의치 않는다는 듯, 푸르죽죽한 색을 띠고 있었어. 그 반대로, 그림에 가려졌다 이제는 노출된 벽은 용감하고, 생생하며, 좀 더 밝고, 긍정적인, 이젠 좀 물러서세요, 내 차례예요 같은 종류의 색상을 띠고 있었지. 그리고 경계, 두 초록 사이의 경계는 렘브란트의 정확한 실루엣을 표시하고 있더란 말이야. 브라보. 훌륭해. - P219

"하지만 범죄자를 어떻게 도망가도록 둡니까······?" 그는 더 나은 설득 방법을 찾지 못하자 말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주교여." 가우스 주교는 차갑고, 날카롭게, 화가 났다는 듯 그의 말을 끊었다. "수십억이 걸린 협상의 기술을 배우고 싶거든, 일단 혀는 주머니에, 도덕은 엉덩이에 처넣으시오." - P236

그는 작은 경의를 표했다. "적의 목을 그렇게 조여서는 안 돼. 당신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도망가게 하려면 말이지."
"도망갈 생각은 없소."
"그런 옛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럼 내일부터 다시 부지런히, 앙금 없이 같이 일할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 P251

졸탄은 더 이상 고향이 그립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슈베르트링 거리나 시립 공원을 산책할 때도 기쁨이 바로 옆에 있었고, 특별한 목적지 없이 그냥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할 때도, 그의 인생에 어떻게 그런 보석이 존재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고 생각했으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던 조용한 마르게리타는, 슬픈 눈빛으로 불가능이라도 뚫어 버릴 듯 먼 곳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향한 눈길이 느껴지면 부드럽게 웃음 짓곤 했다. 그는 독일어 수업에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피아노를 연습하고 남은 모든 에너지는 넘치는 행복에 숨 막혀 죽지 않도록 호흡을 고르는 데 써야 했기 때문이다. - P2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