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피곤하군. 나의 시간이 끝나고 있어······." 소년이 그의 곁으로 다가오자,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나, 카스파어?" "문턱을 조심하세요, 스승님." - P146
눈물이 그렁그렁한 소년은 그 불길했던 오후에 써 내려간 모든 악보를 거두어 일렬로 쌓았다. 그리고 자신이 들었던 음표를 모두 잊을 수 있다는 듯, 이마를 문질러 악마의 음악에 관한 기억을 남김없이 지우려 했다. 이어 분노로 구겨 버린 악보 더미를 들고 방에서 나가, 부엌의 난로 앞에 섰다. 불복종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그의 죄를 입증하는 어떤 증거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는 한 장씩 한 장씩, 종이를 불 속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마지막 종이와 함께, 한 광인의 꿈은 불에 타 굴뚝의 연기가 되어 라이프치히의 회색 하늘로 사라졌다. 누군가의 인생처럼. - P147
절망적인 심정으로 그 소굴 속에서의 삶을 챙겨 보려 했다. 이러한 노력은 모든 것이 시작된 이래, 어떤 운명의 순환 고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있으며, 신의 자비로움에 감사를 올리며 하루가 지날 때마다 옥죄어 오는 고리에 적응해 보려 했지만, 그 고리가 더욱 옥죄어 죽음만큼 작아진 후 더 이상은 신에게 감사를 올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P152
위험의 기운이 서린 침묵이 그의 침묵을 먹고 자라고 있었다. 예고 없이 갑자기 멈출 수 없는 기침이 시작되었다. 피할 수 없었다. 기침 소리에 공포는 다시 찾아왔고, 그는 마치 기도문을 외우듯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요······. 스치는 기억 속, 트레블링카에서 고통에 괴로워하는 자신이 있었다. - P158
그가 놀라 입이 벌어진 채 총과 탄약을 들고 꿈쩍 않고 서 있자, 검은 머리의 소녀가 이불을 들고 그에게 웃으며 다가와, 이자크 이 이불은 네 피부야라고 말했다. 네가 보초를 서는 동안, 유일한 벗이 되어 줄 거야. 그녀의 흑옥 같은 눈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녀의 이름은 한나로, 키부츠의 여러 장비들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그날 밤에는 보초를 서게 되었다. 못생기고 소심한 자신이, 유리컵 밑바닥으로 만든 것 같은 안경을 끼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줄도 모르다니. 그녀가 웃음을 띠고 이불을 준 후 멀어졌을 때에야, 이자크는 조용히 미안해, 미안해······ 하고 혼자 되뇌었다. - P159
문득 어른이 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그리고 아버지가 말했다. 걱정하지 말거라, 우리 모두가 네 안에서 살아갈 것이다. 강인한 네가 삶을 이어 가며 우리의 눈과 우리의 기억이 될 것이다, 내 아들아. 이자크 우처는 부모의 끔찍한 합리화를 수백 번 넘게 되새겨 보았다. 누구에게, 신이시여, 누구에게 지옥을 탈출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까. 누가 우리의 오르페우스가 되어야 합니까. - P162
사람들은 역시 둔해. 길도 살필 줄 모르고, 행인들에게는 관심도 없지. 마치 그가 인간 모두를 무시하듯 말이야. - P176
제스로 툴. 음, 좀 낫네. 좀약 냄새가 좀 나긴 하지만, 그래도 들어 줄 만해. 그런데 말이지, 옆자리 사람들은 코보스를 들으면서도, 이 펍을 망치지 않고 얘기를 잘 나눈단 말이야. 정말 사람들의 무감각함이 도를 넘은 거야. 생각하기 싫어서 하루 종일 히히덕거리다가, 밤이 되면 피곤하다며, 혹시나 모르니 알약 하나를 먹어 두는 거지. 그러면 기억의 공책을 열 필요도, 소화 불량에 시달릴 일도 없으니까. - P181
검은 집에 속한 부지와 그 주변은 언제나 조용했다. 마치 집의 벽들이 몇 년 사이 그들에게 닥친 죽음을 예견하거나 기억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이웃들은 탁상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조르카의 흐느낌을 알아채지 못했고, 몇몇 이웃 여자들은 불쌍한 저 여자가 저렇게 오랫동안 집에서 나오지도 않고 뭘 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했으며, 돌덩이처럼 눈물 속 씁쓸함만으로 매일 배를 채우고, 어떻게 그렇게 큰 인생의 충격을 견뎌 낼 수 있는지 그저 십자가를 그을 뿐이었다. - P192
그녀는 강가의 뾰족한 바위에 앉아 몇 시간이고 떠내려오는 죽은 자들을 살피며, 그녀의 어린 시절, 강이 잉어와 기쁨을 선물했던 그 시절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혹시 아들을 찾지 않을까 초조해하며 그때를 떠올렸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한 것은 익사한 이들의 눈에서 어두운 죽음을 읽으며, 손을 들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안녕, 내 아들들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숨바꼭질을 했을 너희들이 왜 죽어 있느냐,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여전히 공포에 질린 눈을 하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P193
내가 특별히 시벨리우스에 관심이 있다는 소리는 아니야. 하지만 거의 고문처럼 괴로운 수준으로 음악에 대한 재능을 타고난 게 문제라면 문제지, 젠장. 어떤 음악이든 들리기만 하면, 다른 걸 못 하고 그 음악을 들어야만 하거든. 그리고 그걸 바로 암기하고 영원히 외워 버린단 말이야. 내 안에는 음악이 너무 많아 웬만하면 그걸 위장 속에 보관해 두려 하지. 하지만 그 음악들이 머릿속에서 멜로디로 변해 튀어나올 때면, 난 정말 미쳐 버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래서 전철역에서 다시 혼자가 되기를 기다렸는데, 날 약 올리려는 건지, 음악이 사라졌지 뭐야. 내가 보기에는, 확실하지 않지만, 누군가가 그 미로 속 어디엔가 닿지 않는 구석진 곳에서, 오페라의 유령처럼 웃음소리를 질식사시켜 버린 것 같았어. - P217
하지만 그림 없는 빈자리를 감상하는 것이 진정으로 영혼을 살찌우는 법. 렘브란트에 의해 감춰졌던 벽과 그렇지 않은 벽의 색깔 차이가 세월의 흐름을 여과 없이 드러내더군.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으며, 시간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구나(라틴어) 수없이 거쳐 가며 눌어붙었을 노르웨이인들의 시선들, 양파 껍질처럼 들러붙었을 거리의 매연들. 뭐, 노르웨이산 자동차나 난로가 그런 매연을 뿜어낼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말이야. 벽은 전시된 작품 같은 건 개의치 않는다는 듯, 푸르죽죽한 색을 띠고 있었어. 그 반대로, 그림에 가려졌다 이제는 노출된 벽은 용감하고, 생생하며, 좀 더 밝고, 긍정적인, 이젠 좀 물러서세요, 내 차례예요 같은 종류의 색상을 띠고 있었지. 그리고 경계, 두 초록 사이의 경계는 렘브란트의 정확한 실루엣을 표시하고 있더란 말이야. 브라보. 훌륭해. - P219
"하지만 범죄자를 어떻게 도망가도록 둡니까······?" 그는 더 나은 설득 방법을 찾지 못하자 말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주교여." 가우스 주교는 차갑고, 날카롭게, 화가 났다는 듯 그의 말을 끊었다. "수십억이 걸린 협상의 기술을 배우고 싶거든, 일단 혀는 주머니에, 도덕은 엉덩이에 처넣으시오." - P236
그는 작은 경의를 표했다. "적의 목을 그렇게 조여서는 안 돼. 당신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도망가게 하려면 말이지." "도망갈 생각은 없소." "그런 옛말이 있다는 겁니다. 그럼 내일부터 다시 부지런히, 앙금 없이 같이 일할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 P251
졸탄은 더 이상 고향이 그립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슈베르트링 거리나 시립 공원을 산책할 때도 기쁨이 바로 옆에 있었고, 특별한 목적지 없이 그냥 어슬렁거리며 산책을 할 때도, 그의 인생에 어떻게 그런 보석이 존재할 수 있는지 신기하다고 생각했으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향하고 있던 조용한 마르게리타는, 슬픈 눈빛으로 불가능이라도 뚫어 버릴 듯 먼 곳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향한 눈길이 느껴지면 부드럽게 웃음 짓곤 했다. 그는 독일어 수업에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피아노를 연습하고 남은 모든 에너지는 넘치는 행복에 숨 막혀 죽지 않도록 호흡을 고르는 데 써야 했기 때문이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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