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모차르트 기념비의 그림자가 조용히 자리를 바꿀 때까지 그렇게 있었다. 갑자기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지휘에 대한 흥미가 싹 사라졌고, 페스트에 대한 그리움도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갑자기 그에게는 빈이 그리운 곳이 되었다. 왜냐하면 오후 3시가 지나면, 이 도시에는 마르기트가 없을 것이고, 12월의 소심한 채광이 더 큰 슬픔에 잠길 뿐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이 지워진 거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 P260

빈 중앙 묘지에 내리는 비는 후두둑 졸탄의 우산을 세차게 때렸다. 그는 꼼짝 않고 정면을 응시했다. 슈베르트의 무덤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대체 넌 이십오 년 전의 맹세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멍청이가 이 세상에 있을 거라고 믿었단 말이니? 만약 그녀가 죽었다면? 캐나다에 산다면? 졸탄은 그녀가 그 약속을 기억하지 못해 그곳에 나타나지 않을 경우가 가장 두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망각이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 P264

불쌍한 안나, 나는 그녀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그녀를 위해 울었다. 슬픔 속에 살아가야 하는 남은 자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는 듯, 안나는 너무나 빨리 가 버렸다. 그를 사랑했으며, 그의 알 수 없는 슬픔에 대한 복잡한 설명, 어쩌면 불가능한 설명 들을 파헤치려 하지 않고 그저 존중한, 그런 여인의 소리 없는 퇴장이었다. - P267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혹시나 가곡 「유럽 칼새」의 미출관본을 간접적으로라도 언급하지 않을까 책의 페이지를 대충 뒤적었을 때. 누런색을 띠고 너탈너덜해진, 동물 형상이 새겨진 책갈피 하나를 발견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거기에 꽂혀 있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책갈피는 마침 슈베르트의 무덤이 나온 세피아색 사진이 들어 있는 페이지에 꽂혀 있있다. 그 즉시, 수술용 거즈가 풀어지며, 그의 모든 기억들이 허락도 없이 그의 위로 쏟아져 내렸다. - P271

그는 주춧돌에 새겨진 글귀를 읽으려, 슈베르트의 비석에 다가갔다. 하지만 이내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예져, 그러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제야 그는, 그녀가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부터, 울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눈 속을 헤매이며 걸었네, 그녀가 내 팔을 잡고 저곳의 푸른 풀밭을 함께 거닐었을 때 남긴 발자국을 찾아." 그는 생각했다. 그가 노래를 알았다면, 마음속으로

여기에서 가져갈 수 있는
기억의 징표가 하나라도 없을까?
내 고통마저 침묵할 때면,
무엇이 나에게 그녀를 기억토록 해 줄까?

라고 바리톤의 목소리로 자신을 향해 노래를 불렀을 테지만, 마르기트만이 부여할 수 있는 생명력은 없었으리라 생각했다. - P273

그제야 그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을, 빈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인생은 하나의 경로도 목적지도 아닌 여행이며, 우리가 사라질 때는 그 위치가 어디든 우리는 언제나 여행의 중간 지점에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의 불운은 하필이면 가혹하기 짝이 없는 겨울 여행에 당첨되어, 영혼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다는 데 있다. -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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