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대꾸도 없다. 햇볕을 받은 서까래가 살살 부풀어오르며 삐걱거리는 소리, 문 아래로 방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의 한숨소리, 아마포 커튼이 휘날리는 소리, 불이 타닥거리는 소리, 텅 비어 고요히 쉬고 있는 집의 뭐라 말하기 어려운 소리뿐. - P17
하늘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들려도 아이는 말하던 도중에 말을 멈춘다. 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을 맞고 순간 벙어리가 되기라도 한 듯 정지해버린다. 곁눈으로 누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아이는 먹던 중이든 읽던 중이든 숙제하던 중이든 하던 일을 멈추고, 중요한 일로 자기를 만나러 온 사람을 보듯 빤히 쳐다본다. 아이는 현실의 테두리, 주변 물질세계의 반경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가는 버릇이 있다. 몸은 방안에 앉아 있는데 정신은 자기만 아는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정신 차려, 할머니는 얼굴 앞에서 손가락을 탁 튕기며 소리친다. 뭐하니, 누나 수재나는 귀를 당기며 쏘아붙인다. 집중해, 선생님들은 호통을 친다. 어디 갔었어? 마침내 햄닛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자기가 집에, 식탁에, 식구들 사이에 돌아와 있다는 걸 깨달을 때 주디스가 이렇게 속삭인다. 어머니는 보일 듯 말듯 웃으며 마치 햄닛이 어디에 갔다 왔는지 훤히 아는 것처럼 바라본다. - P19
삶에는 어떤 알맹이, 핵심, 중심이 있어서 모든 게 거기서 비롯되고 다시 거기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 순간은 부재한 어머니의 순간이다. 아이, 빈집, 텅 빈 마당, 듣는 사람 없는 외침. 아이는 뒷마당에 서서,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얼러 재우고 첫걸음을 뗄 때 손을 잡아주고, 숟가락을 어떻게 쓰라고, 먹기 전에 수프를 후후 불라고, 길 건널 때 조심하라고, 잠자는 개를 깨우지 말라고, 물을 마시기 전에 컵을 헹구라고, 깊은 물가에 가지 말라고 일러주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불러본다. 이 순간은 어머니의 중심 바로 그 자리에, 평생 남을 것이다. - P22
할아버지는 계속 종이를 훔치며 말한다. 종이가 젖은 것에 대한 분노가 가느다란 검처럼 칼집에서 빠져나와 날카롭게 뻗는다. 햄닛은 분노의 칼끝이 방안을 더듬으며 상대를 찾고 있음을 느낀다. 수맥이 있는 쪽으로 뻗치는 어머니의 개암나무 가지가 문득 떠오른다. 햄닛은 땅속 수맥이 아니고 할아버지의 분노도 파르르 떨리는 수맥 탐지봉이 아니지만. 날카롭고 뾰족하고 예측할 수 없는 분노가 다가온다. 햄닛은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알 수 없다. - P27
애그니스는 연기를 내며 타는 로즈메리 한 다발을 벌집 위에서 살살 흔든다. 고요한 8월의 대기에 연기가 꼬리를 남긴다. 벌들이 동시에 날아올라 애그니스의 머리 위에서 맴돈다. 가장자리가 없는 구름처럼, 계속해서 허공에 던져지고 또 던져지는 그물처럼.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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