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도 더 한 생각을 한 번 더 했다. ‘그때 내가 이 집을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내가 창밖의 초록을 그토록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우리가 이 집 말고 다른 집을 먼저 만났더라면. 그날 날씨가 그렇게 화창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 공인중개사 말이니까, 말 그대로 국가가 인증한 사람이 보증하는 곳이니까 괜찮으리라 믿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지 않았다면 수호는 지금 내 옆에 있을 텐데. 우리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텐데.‘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은 없지만 지수는 수호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 집이 좋다고 한 사람도, 이 집에 살자고 한 사람도 자기였기 때문이다. - P278

어느 날 지부장이 티브이 뉴스를 보다 "바보같이 저런 걸 왜 당하지"라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지수를 가장 괴롭힌 말도, 스스로를 끝없이 질책하게 만든 말도 바로 그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도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한, 누구든 당할 수 있고, 정말 많은 사람이 당한 일인데도 그랬다. - P278

지수는 ‘저 사람들, 어쩌면 저렇게 자기 삶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얼굴로 거리를 누빌 수 있지?‘ 어리둥절해했다.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오늘을 믿고, 내일을 기대하며 지낼 수 있지?‘ - P279

어느 순간 지수의 눈이 차분하게 빛났다. 그간 고민 해온 문제의 답을 얻은 얼굴이었다. 지수는 자신이 이 집 말고도 갈 데가 있음을 깨달았다. 거기 수호가 있다는 것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만날 방법이 있다는 데 작은 기쁨마저 일었다. 그뒤 지수는 주머니 속에 ‘그래, 그래도 돼‘라는 말을 공깃돌마냥 넣고 다녔다. 그러곤 그 말을 자주 만지작거렸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자 반대로 그러지 않을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 P281

—비는 한 집 위에서만 내리는 게 아니다.
여자의 팔자주름 위로 작은 미소가 어렸다.
—카메룬 속담입니다. 내 친구가 알려줬어요. 한글학교 친구입니다. - P286

문득 아침에 여자가 안방 천장을 보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한국어가 모어가 아닌 이가 건넨 정중한 문장이라 한국의 그 어떤 행정 언어나 법률 언어보다 더 정직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던 말. 그제야 지수는 자신이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어했는지 깨달았다. 더불어 그 답 또한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하지만 대답 따위 아무도 들려주지 않을 테지.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지수가 절망적인 얼굴로 뭔가 결심한 듯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방금 전 낙숫물에 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이 집에 일부러 흘리고 간 단어마냥 툭툭. 안 된다고, 그러지 말라고, 부디 살라고 얘기하는 물소리가. 지수의 두 뺨 위로 빗방울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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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안녕‘에는 ‘반갑다‘는 뜻과 ‘잘 가‘라는 뜻 말고도 또다른 의미가 있어.
—어떤?
—‘평안하시냐‘는 혹은 ‘평안하시라‘는 뜻. - P254

한 시절 누군가와 정기적인 대화를 나눴다 해서, 긴장과 웃음, 안부를 나눴다 해서 헤어짐이 이렇게 서운할 줄은 몰랐다. 이상하지. 직장에서는 그 모든 게 지겨웠는데. 사회적 감각의 스위치를 꺼두고만 싶었는데. 고향에서 엄마와 나 오직 두 사람만의 관계로 세계가 쪼그라들자 그 많은 언어가 그리워졌다. 실수하고, 변명하고, 거짓말하고, 반문하고, 더러 표 안 나게 유혹하고, 티 나게 매혹하고, 긍정하고, 의심하고, 호응하는 사회적 몸짓이. - P254

상대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 결국 못한 누군가의 입술을. 그래서 나는 오래전 들은 팝송에 한국어로 새 가사를 덧씌우듯 내가 듣지 못한 말을 스스로 중얼거렸다. 몇 해 전 헌수가 끄덕여준 대로 "안녕"이라고. 부디 평안하라고. - P255

신혼초, 볕 안 드는 투룸에 살다 이 년 만에 방 세 개짜리 신축 빌라로 옮긴 지수는 한동안 밝은 얼굴로 집을 오갔다. 거실 창 너머 무성한 초록을 보고 한눈에 반한 집이었다. 그런데도 어느 날 직장 동료가 "그럼 더 상급지로 간 거야?"라 물었을 때 쉽게 대답 못한 건, 요즘 부동산 채널에서 유행하는 상급지니 하급지니 하는 말도 그때 처음 들은데다 순간 자신이 개천의 물고기가 된 기분이 들어서였다. 거주지에 따라 ‘급‘이 아니라 ‘종‘ 자체가 나뉘는. - P260

둘은 이 상황을 어떻게든 돌파해보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이 가장 많이 한 일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거였다. 더불어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가 무언가를 기약 없이 기다리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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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투성이 뭐 어때서. 세상에 삶만큼 죽음만큼 상투적인 게 또 어디 있다고. 그 ‘반복‘의 무게에 머리 숙이는 게 결국 예의 아니던가. - P231

나는 내 감정이 인간적인 호감인지, 성적 주체가 되는 기쁨인지, 성적 대상이 되는 설렘인지 헷갈렸다. 어쩌면 그 모든 게 섞인 총체적인 무엇일지 몰랐다. 감정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사실 대상과 무관하게 외국어 수업에는 어느 정도 성애적인 측면이 있었다. 일말의 더듬거림과 망설임, 지연과 기쁨, 찰나의 교감, 수치심과 답답함, 긴장과 해소, 갑자기 터져나오는 웃음, 실수와 용서 등이 그랬다. - P233

잠시 후 노래가 끝나자 헌수는 ‘왠지 ‘가지 말라‘는 청보다 ‘보고 싶다‘는 말보다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배웠어‘라는 가사가 더 슬프게 다가온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알 것 같다며. ‘삶은 대체로 진부하지만 그 진부함의 어쩔 수 없음, 그 빤함, 그 통속, 그 속수무책까지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인생의 어두운 시기에 생각나는 건 결국 그 어떤 세련도 첨단도 아닌 그런 말들인 듯하다‘고 했다. ‘쉽고 오래된 말, 다 안다 여긴 말, 그래서 자주 무시하고 싫증 냈던 말들이 몸에 붙는 것 같다‘고. - P249

그땐 미처 몰랐지만 아마 헌수 마음속에서는 하고 싶은 말과 해선 안 되는 말, 할 수 없는 말 등이 뒤엉키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건 ‘좋은 부모‘나 ‘그렇지 않은 부모‘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일지 몰랐다. 마치 내가 나의 삶에 계속 놀라게 되면서부터 다른 사람 삶도 잘 판단 않게 된 것처럼. - P252

‘다음 단계‘를 꿈꾸던 젊은 나도 없는 이 방에서 ‘너한테 배웠어, 정말 많이, 정말 많이 배웠어‘란 가사의 노래를 듣는다. 보다 정확히는 네가 아니라 너의 부재로 부터 무언가 배웠다고. 그런데 여전히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지금은 그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쪽에서 먼저 원곡 위에 ‘안녕‘이란 한국어를 덧씌워 부른다고. 우리 삶에는 그렇게 틀린 방식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고 아마 나는 그걸 네게서 배운 것 같다고. - P253

나는 로버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실력도 안 될뿐더러 지금 내 마음을 어색하게 번역했을 때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누락과 손실이, 하찮은 세부 하나하나가 내 감정의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부분으로 느껴질 것 같아서였다. 기쁨이라면 상관없었다. 하지만 슬픔은 달랐다. 고통만큼은 내 슬픔의 언어, 감정의 뿌리, 모국어로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모국어로 말한들 과연 그게 온전히 전해질까? - P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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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를 이탈할 듯 말 듯 지도 위에서 위태롭게 깜빡이는 파란 점을 보니 오래전 신 혼여행지에서 희주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봐봐, 지금 우리 바다 위에 있어.
—어? 정말이네.
썰물로 바닷물이 싹 빠진 모래사장이 위성 지도상에 여전히 바다로 나온 걸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그뒤 기태는 낯선 동네를 헤맬 때마다 그날이 생각나곤 했다. 가장 과학적인 기기가 아름다운 방식으로 잘못된 정보를 알려줬던, ‘우리‘가 정말 불가능한 장소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준 어느 한낮이. - P172

사실 정신을 단속하는 일이라면 조금 자신 있었다. 나이들 어도 세상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주변에 크게 폐 끼치는 존재는 되지 않으리라 과신했다. […] 긴 시간이 지나 기태가 진심으로 놀란 건 자신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기태는 자신을 둘러싼 좌표는 그대로되 ‘나‘라는 점만 이동하리라 착각했었다. 점과 더불어 좌표도 같이 움직이는데다 다른 그래프와 충돌하며 곡선과 직선이 찌그러지고 휠 거라 예상 못한 까닭이었다. - P175

물론 나이들어 좋은 점도 있었다. 젊은 시절 여기저기 빵가루처럼 지저분하게 흘리고 다닌 말과 마음들, 담백하지 못한 처신들, 쉽게 흥분하거나 화를 낸 뒤 엄습한 부끄러움 같은 건 이제 많이 줄었으니까. 경험이 많다는 건 ‘경험을 해석했던 경험‘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냄새는, 헛구역질이나 트림은 ‘해석‘이나 ‘의지‘로 잘 막아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거였다. 기태는 자신이 늙음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안다 믿었던 것조차 실은 아는 게 아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삶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 - P175

오랜 시간 질 좋은 음식을 섭취한 이들이 뿜는 특유의 기운이 있었다. 단순히 재료뿐 아니라 그 사람이 먹는 방식, 먹는 속도 등이 만들어낸 순수한 선과 빛, 분위기가 있었다. 편안한 음식을 취한 편안한 내장들이 자아내는 표정이랄까. 음식이 혀에 닿는 순간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찰나가 쌓인, 작은 쾌락이 축적된 얼굴이랄까. 아무튼 그런 인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기태는 그걸 자기 혼자 ‘내장의 관상‘이라 불렀다. 음식의 원재료가 품은 바람의 기억, 햇빛의 감도와 함께 대장 속 섬모들이 꿈꾸듯 출렁일 때 그 평화와 소화의 시간이 졸아든 게 바로 ‘내장의 관상‘이었다. - P179

—입을 보며 상상하래요. 저 사람 지금껏 살아오면서 얼마나 뭘 많이 먹었을까. 나이를 막 추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려보래요. 저 사람 저 입으로 그사이 엄청난 음식물을 처리하고 또 소화시켰겠구나 하고. 그가 소화시킨 게 비단 음식뿐이기만 하겠느냐면서요. - P183

기태가 바라는 건 불쾌가 아니라 불안이었다. - P185

자신이 지수를 정말 좋아하는지 자문했다. 그제서야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이 늙는 일과 몸이 늙는 일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멀고 또 가까운지도. - P187

기태는 여느 때처럼 목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그게 식도염 탓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식도 위로 또 정체불명의 뜨거운 덩어리가 역류해 가까스로 삼켰는데, 그 덩어리에서 어느 짐승의 내장 맛이 났다. - P188

선주는 ‘아직까지는 괜찮아‘ ‘더 버틸 수 있어‘라는 암시로 일상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선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중요한 문제를 계속 모른 체하고 있다는 걸. 너무 무겁고 괴로운 문제라 최대한 그 답을 미루고 있음을. - P195

‘돈‘과 ‘노후‘는 선주의 머릿속에 오랜 강박관념처럼 박힌 주제였다. 시한폭탄처럼 생각만 해도 살 떨리는 단어, 어둡고 불안한 화제였다. ‘평생 최선을 다해 일했는데 손에 남은 게 없다‘는 억울함과 허망함이 선주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 P195

선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승강기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성격 급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선주는 서울에 올 때마다 길도 모르면서 기진보다 늘 앞장서 걷곤 했다. 경수와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고 선주는 경수와 결코 함께 걷지 않았는데, 사이가 나빠서라기보다 습관이 들지 않아서였다. 그때마다 기진은 혼자 저만치 앞서가는 엄마와 자꾸 걸음이 뒤처지는 아빠 사이에서 둘 모두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허둥대야 했다. 서울에서 부모님을 만날 때마다 자꾸 할말이 떠오르는, 그러나 종일 그 말을 참는 얼굴을 하고. - P197

‘요즘에도, 아니 우리 세대 부모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느냐‘면서. 그때마다 기진은 자신에게 무척 가깝고 생생한 현재가 누군가에게는 빛바랜 과거처럼 아득하고 낯선 일임을 실감했다. ‘같은 또래라지만 저 친구와 나는 정말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구나. 아마 앞으로도 쭉 다른 고민과 다른 돌봄, 다른 고독 속에서 살아가겠구나‘ 하고. - P199

기진은 삶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책을 찾았고, 최근에 읽은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우리 몸은 어떤 자극이 왔을 때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한다. 받아들이거나 도망치거나. 하지만 이명의 경우 몸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한다. 우리는 그 혼란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져야 한다. - P200

기진은 놀랐고, 부모 자식 간이라도 ‘몸‘과 ‘몸‘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실감했다. - P206

선주가 한번 더 ‘이럴 때 딸이 있어 참 좋다‘고 했다. 선주는 자신이 딸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늘 걱정하면서도 가끔은 딸에게 의존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방법‘이 없으니까. 주위에 물어볼 곳도, 수단도, 자원도, 지식도 없으니까. 당장 상대와 말만 통해도 혼자 뭔가 해볼 텐데 영어도 국어도 선주에게는 모두 어려웠다. 게다가 점점 몇몇 단어가 머릿속에서 증발되고 있었다. 선주는 자신이 어떻게든 혼자 풀어보려 끙끙댄 문제를 기진이 휴대전화를 이용해 너무 가뿐하게 해결하는 걸 보고 종종 어리둥절했다. 그럴 땐 딸이 자랑스러우면서도 ‘그 정도‘ 문제 하나 풀지 못한 스스로가 못마땅해졌다. - P207

지금 이 순간 홀로 집에 가고 있을 엄마를 떠올렸다.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자신은 이 감정을 평생 느낄 거라는 점도. - P214

—그러면 너희는 그 두 안녕‘을 어떻게 구분해? 억양이나 발음이 달라?
[…]
—그냥 알아.
그런 뒤 ‘그 순간이 오면 우리는 대체로 ‘그냥‘ 알고, 때론 끝까지 그 사실을 서로 모른 체하며 헤어진다‘는 말을 보태려다 말았다. 그러기에는 내 회화 실력이 부족해서였다. 대신 나는 훨씬 단순하고 투박한 말을 했다.
—그냥 알 수 있어, 우리는.
로버트가 내 눈을 가만 바라보다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에게는 ‘상황‘이 있으니까.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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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호에게는 뭐랄까, 어려서부터 몸에 밴 귀족적 천진함이 있었다. 남으면 버리고, 없으면 사고, 늦으면 택시 타는 식으로 오래 살아온 사람이 가진 무심한 순진함이. 학부 땐 그게 귀엽고 가끔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당당해 보여 끌렸는데, 결혼 후 같이 살다보니 결코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있다는 걸 알았다. 이번 여행 계획을 세우며 내가 예산을 맞추려 전전긍긍할 때도 지호는 "그냥 대충대충 해. 별 차이 없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별 차이‘에 대한 감각이 지호와 나의 큰 차이였다. - P58

더도 덜도 아닌 액수는 얼마인지, 적절한 교환은 무엇일까 고민하느라 뒤척였다. 하루이틀 묵고 가는 손님이면 무시했겠지. 그런데 우리 부부가 한 달 가까이 머문다고 생각하니 그 사람도 갑갑했던 거야. 외국인 자주 접하며 팁에 익숙해졌을 테고. 그러다보면 못 받을 때 서운한 게 또 사람 마음이고. 그 사람 생활에 팁이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큰지도 몰라. 나는 스스로를 타이르려 애썼다. 그런데도 가슴 한쪽에선 왜 자꾸 차가운 감정이 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나는 조금 서운했던 것 같다. 그동안 우리가 나눈 인사와 미소가. 눈빛과 호의가 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게. - P67

시내에는 원주민보다 관광객이 많았고 한국인도 자주 보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한국인과 마주칠 때마다 그들과 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흘렀다. 시치미와 드러냄, 감춤과 판별의 눈빛이 순식간에 교차했다. 가끔은 그들이 여행지의 마법을 깨뜨리는 듯해 언짢다가도 또 어느 땐 아주 작은 소리라도 내 귀에 너무 잘 박히는 한국어가 신기해 고개 돌렸다. - P69

미색 종이에 검은색 펜으로 휴대전화에 뜬 말을 천천히 옮겨 적었다. 실은 적는다기보다 그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동작이었다. 중간에 글씨를 자꾸 틀려 만족할 만한 모양이 나올 때까지 종이를 몇 차례 구겼다. 그러자 새삼 이 나라 사람들, 이걸로 수백 년간 뭔가 읽고, 쓰고, 기록했겠구나, 거기 내가 모르는 삶도 많이 담겨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81

메시지를 보내기 전 미안하단 말을 지울까 고민하다 그대로 놔뒀다. 그러곤 중등교육을 받지 못한 엄마가 여러 번 고치고 또 새로 썼을 문장을 가만 바라보았다. ‘고맙다‘는 말을 들었는데 왜 뿌듯하기보다 복잡한 감정이 이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돈 때문에 부담을 느껴서만은 아니었다. 내가 실직중이라는 것과 엄마의 외동딸이란 사실에 압박을 받아서만도 아니었다. 평소에도 여러 번 들은, 눈 깜짝할 사이 폭삭 늙어버린 엄마가 내게 보낸 ‘고맙다‘는 문자를 보자, 이상하게 그 말을 받은 게 아니라 언젠가 내가 상대에게 준 무언가를, 아니 오랜 시간 상대가 내게 주었다 생각한 무언가를 도로 빼앗은 기분이 들었다. - P85

백번 양보해서 사람이 탐욕스러울 수도, 불성실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적어도 부도덕해선 안 되는 거 아닌가? 이런 사람들 때문에 괜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욕먹는 거 아니야. 정작 편견은 누가 양산하는데? - P88

나는 대형 쓰레기통과 음식물 쓰레기통, 재활용품 수거함이 한데 모인 어둑한 장소로 걸어가며 두 달 전 집주인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만일 그 전화가 아니었다면, 아니 그보다 일 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 전염병이 아니었다면, 그사이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지 않고, 노동 가치니 화폐가치니 하는 것들이 이렇게 떨어지지 않았다면, 나도 저 윗집 부부처럼 밝은 얼굴로 이웃을 환대할 수 있었을까? 하고. - P105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닌데, 나조차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공간을 침범한 적이 있는데, 그걸 보자 지난 시간 우리가 겪은 과정이, 그 모든 노출과 공개가 부당하고 지리멸렬하게 느껴졌다. 대여 혹은 매매 의사만 있으면 누구든 실거주자 집에 들어와 모든 걸 살펴볼 수 있다는 게. 어쩌면 우리가 사회 초년생도 신혼부부도 아닌, ‘성장‘과 ‘단계‘를 조금이나마 맛본, 이제 중년에 접어든 부부라 그런지 몰랐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시대인과 어떤 가치와 속도를 공유한다 믿은, 그런데 그게 틀렸다는 걸 막 깨달은 사십 대라서. 그래서였을까? 친구라도 초대한 양 온종일 집을 쓸고 닦았으면서 막상 그들 부부가 떠났을 때 우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P108

분명 좋은 소식인데, 그것도 내가 아끼는 학생의 일인데, 마음이 허전하고 휑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거리에는 노란 은행나무 잎사귀들이 가득 떨어져 있었다. 내가 연민하던 대상이 혼자 반짝이는 세계로 가버렸기 때문일까? 아니, 나는 시우를, 시우 어머니를, 그들이 사는 집을 내려다본 적 없는데. 그럼 마주보는 건 괜찮지만 올려다보는 건 싫은 걸까?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시우에게 좋은 일이잖아. 좀 더 나은 일. 그런데도 시우 어머니가 ‘새집으로 계속 와주실 수 있느냐 물었을 때 왜 흔쾌히 대답 못한 걸까? - P130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나도, 내 가족도 지킬 수 있을 것 같은 불안이 들어서요. 그런데 얄궂게도 남의 욕망은 탐욕 같고 내 것만 욕구처럼 느껴집니다. 기본욕구, 생존 욕구할 때 그런 작은 것으로요. 그런데 그곳에 생존이란 말을 붙여도 될까, 그런 건 좀 염치없지 않나 자책하다가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두에게 떳떳한 선이란 과연 어디까지일까 반문합니다. - P141

한동안 피하고 싶었던 무겁고 부담스러운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말 그대로 그것, ‘나라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나라면, 이 시장에서 이익을 본 게 나라면, 지금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까? 대놓고 기뻐하거나 자랑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깊은 안도감 정도는 느끼지 않았을까? 하고요. - P141

‘이참에 나도 프로필 사진이나 바꿔볼까?‘ 고민하며 기태는 사각 창 하단의 검색 단추를 눌렀다. 이윽고 무작위로 선정된, 기태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들의 삶이 영롱한 비즈로 만든 발처럼 순식간에 펼쳐졌다. 세계 다양한 인종과 총천연색 시공이 위화감 없이 섞였다. 북극의 오로라, 열대의 낙조, 도시의 마천루, 얼룩 없는 창, 전선 없는 방, 보풀 없는 옷, 질병 없는 신체, 그림 같은 요리가 줄지어 늘어섰다. 마치 누군가 꾼 가장 좋은 꿈을 한데 모아둔 느낌이었다. - P147

두 사람은 맞장구를 치며 함께 웃었다. 과한 자기 연민이나 엄살이 없는, 깨끗함이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 오랫동안 유지해온 ‘적절함‘의 거리를 둘이 힘을 합쳐 구겨 버렸다. 스무 살의 다급함이나 허둥거림 없이, 과도한 기대나 실망도 없이 서로의 느낌에 집중하면서. 그러고 한참 뒤 입술을 떼었을 때, 기태가 갑자기 벚나무를 발로 차기 시작했다.
—기태씨, 왜 그래요?
희주의 다급한 목소리에 기태는 문득 발길질을 멈췄다. 그러곤 술에 취해 발그레해진 얼굴로 희주를 빤히 바라보다 누가 들어도 너무 순진하고 무모해 낯뜨거워지는 말을 했다.
—자기 꽃비 맞으라고요. - P152

"살맛난다 할 때 그 살맛이 이 살맛이구나" 장난치며 서로의 목이나 손등을 깨물고, 상대의 속눈썹과 귓바퀴, 몸냄새에 대한 칭찬을 남발하고, 그러면서도 어느 땐 육체의 쇠락을 과장하며 서로를 늙은 배우자인 양 놀리고, 그러면 마치 노년의 남루와 공포가 줄기라도 할 것처럼 농담과 연민을 미리 당겨쓰고, 세상 무심하고 친밀하게 등과 두피에 난 여드름을 짜주고, 상처와 비밀을 나누고, 말을 아끼고, 오래 안고, 우리가 식물과 달리 똥도 싸고, 아름답지도 않고, 울기도 하는 존재임을 가여워하고 수긍해주는 정도라면, 그거면 충분하다고. - P153

그날 낯선 지역의 어두운 버스 안에서 두 다리를 모은 채 분홍색 보따리를 품에 품었던 날을 생각하면, 꾸벅 조는 자신과 함께 병 속에서 출렁였을 술을 떠올릴 때면 기태는 지금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그날 자신이 소중히 옮겨온 게 술이 아닌 다른 물질이라도 되는 것마냥. - P154

기태는 지난 일들이 제 속에서 커튼처럼 일렁임을 느꼈다. 그것은 평소보다 더 높고 둥근 모양으로 펄럭였다. 그러자 수명이 다한 행성처럼 천천히 멀어지던 둘의 관계가 눈앞에 떠올랐다. 둘 중 누구도 그걸 막으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그렇다고 기태에게 아직 희주를 향한 미련이 남은 건 아니었다. 한때 가까웠으나 ‘이별의 형식‘ 없이 헤어진 친구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그 친구의 삶을 질시하지도 폄하하지도 않는 마음으로, 기태는 희주의 삶을 응원했다. - P155

만일 기태의 가슴에 어떤 그리움이 남았다면 그건 희주가 아니라 그녀와 함께한 시절들 때문이었다. 맑은 몸과 마음으로 서로에게 집중했던 때. 몸의 불편을 몰라 몸을 잊고 몸에 몰두했던 때, 몸과 마음의 욕구가 거의 일치했던 때. 그런데 그 상대가 서로라서 더 좋았던 때 덕분에. 오늘밤 그 시절이 하나도 그립지 않고 또 조금은 그리워 기태는 화면 조정 시간에 홀로 지지직거리는 티브이처럼 작게 몸을 떨다 눈을 감았다. - P155

사다리 마지막 칸에 기적적으로 오른 자신과 달리 ‘요즘‘ 입사한 친구들은 어느 정도 한국의 정교한 계급 필터를 거친 이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자신이 쥐고 태어난 걸 과소평가하는 것 같았다. 계급성은 지우고 나이라는 약자성만 내세운 채 신문에서 읽은 말로 앞 세대에게 자주 적의를 보이는 것 같았다. 물론 뭘 굳이 읽지 않고도 언제든 쉽게 품을 수 있는 게 적의이기도 했다. […]
—제가 주제넘게 껴들어 죄송한데요. 저희 부모님은 지금도 시골에서 농사지으시거든요. 저도 장학금 받고 학교 다녔고. 중요한 건 과장님이 말씀하신 그 ‘부모‘를 둔 친구들도, 그렇지 않은 청년들도 다 똑같이 어려움을 겪는 데 있는 것 같아요. - P158

그날 집으로 돌아가며 기태는 ‘아! 앞으로 나는 부하 직원들에게 존중받는 은따, 대우받는 꼰대가 되겠구나‘ 자책했다. 그렇지만 그날 기태를 괴롭힌 건 자신이 실언했단 사실이 아니었다. 기태가 진정 후회하는 건 그 순간 자신이 굳이 ‘진심‘을 말했다는 거였다. […] 그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존재 자체로 누군가에게 부정과 경멸의 대상이 된 것 같았던 날, 이제 자신이 빼도 박도 못하는 기성세대가 됐음을 자명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밤 말이다. - P160

—자기야, 근데 나이드니 마음이 넓어지는 대신 얇아져서 쉽게 찢어지더라. - P163

화면 아래 돋보기 모양 단추를 누르자 이번에도 기태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이들의 인생 한 조각, 일상 수십 조각이 주르르 펼쳐졌다. 오래된 돌길 위로 맑은 파랑이 아름답게 깔린 이국의 도시며 신선한 맥주 거품, 창과 바람, 건치 애인의 미소, 키 큰 식물의 그림자가 줄줄 이어졌다. 몇몇 순간은 진심으로 아름다워 기태에게 문득 삶에 대한 애정이랄까 감사함을 상기시켜주기조차 했다. 그러나 기태는 그게 자기 것이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런데도 수천 픽셀 위를 단숨에 미끄러지는 손끝 감각이 대책 없이 편안해 기태는 남의 삶을 자꾸 넋 놓고 바라봤다. - P166

기태는 평소 자신을 균형 잡힌 사고를 하는 성인이라 여겼다. 그래서 SNS에 드러난 타인의 모습에 별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웹에 떠도는 조각으로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평가할 마음도 없었다.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살면서 매번 다른 방식으로, 자주 깨달아서였다. 사회 초년생 때 임원들의 내공을 얕봤다 경악하거나 감탄하거나 후회한 일이 많았던 것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기태는 평소 판관을 자처하는 이들을 내심 혐오해왔다. 그런데도 기태는 차대표의 사진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불쑥 이런 말을 내뱉고 말았다.
—눈빛이 아주 라스푸틴 같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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