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를 이탈할 듯 말 듯 지도 위에서 위태롭게 깜빡이는 파란 점을 보니 오래전 신 혼여행지에서 희주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봐봐, 지금 우리 바다 위에 있어. —어? 정말이네. 썰물로 바닷물이 싹 빠진 모래사장이 위성 지도상에 여전히 바다로 나온 걸 가리키며 한 말이었다. 그뒤 기태는 낯선 동네를 헤맬 때마다 그날이 생각나곤 했다. 가장 과학적인 기기가 아름다운 방식으로 잘못된 정보를 알려줬던, ‘우리‘가 정말 불가능한 장소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준 어느 한낮이. - P172
사실 정신을 단속하는 일이라면 조금 자신 있었다. 나이들 어도 세상 소식에 귀를 열어두고,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면 주변에 크게 폐 끼치는 존재는 되지 않으리라 과신했다. […] 긴 시간이 지나 기태가 진심으로 놀란 건 자신이 어쩌면 그렇게 자신할 수 있었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기태는 자신을 둘러싼 좌표는 그대로되 ‘나‘라는 점만 이동하리라 착각했었다. 점과 더불어 좌표도 같이 움직이는데다 다른 그래프와 충돌하며 곡선과 직선이 찌그러지고 휠 거라 예상 못한 까닭이었다. - P175
물론 나이들어 좋은 점도 있었다. 젊은 시절 여기저기 빵가루처럼 지저분하게 흘리고 다닌 말과 마음들, 담백하지 못한 처신들, 쉽게 흥분하거나 화를 낸 뒤 엄습한 부끄러움 같은 건 이제 많이 줄었으니까. 경험이 많다는 건 ‘경험을 해석했던 경험‘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그런데 냄새는, 헛구역질이나 트림은 ‘해석‘이나 ‘의지‘로 잘 막아지지가 않았다. 문제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거였다. 기태는 자신이 늙음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안다 믿었던 것조차 실은 아는 게 아니었음을 새삼 실감했다. 그러니 앞으로 남은 삶은 또 얼마나 혹독할까? - P175
오랜 시간 질 좋은 음식을 섭취한 이들이 뿜는 특유의 기운이 있었다. 단순히 재료뿐 아니라 그 사람이 먹는 방식, 먹는 속도 등이 만들어낸 순수한 선과 빛, 분위기가 있었다. 편안한 음식을 취한 편안한 내장들이 자아내는 표정이랄까. 음식이 혀에 닿는 순간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찰나가 쌓인, 작은 쾌락이 축적된 얼굴이랄까. 아무튼 그런 인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기태는 그걸 자기 혼자 ‘내장의 관상‘이라 불렀다. 음식의 원재료가 품은 바람의 기억, 햇빛의 감도와 함께 대장 속 섬모들이 꿈꾸듯 출렁일 때 그 평화와 소화의 시간이 졸아든 게 바로 ‘내장의 관상‘이었다. - P179
—입을 보며 상상하래요. 저 사람 지금껏 살아오면서 얼마나 뭘 많이 먹었을까. 나이를 막 추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려보래요. 저 사람 저 입으로 그사이 엄청난 음식물을 처리하고 또 소화시켰겠구나 하고. 그가 소화시킨 게 비단 음식뿐이기만 하겠느냐면서요. - P183
기태가 바라는 건 불쾌가 아니라 불안이었다. - P185
자신이 지수를 정말 좋아하는지 자문했다. 그제서야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음이 늙는 일과 몸이 늙는 일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멀고 또 가까운지도. - P187
기태는 여느 때처럼 목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그게 식도염 탓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식도 위로 또 정체불명의 뜨거운 덩어리가 역류해 가까스로 삼켰는데, 그 덩어리에서 어느 짐승의 내장 맛이 났다. - P188
선주는 ‘아직까지는 괜찮아‘ ‘더 버틸 수 있어‘라는 암시로 일상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선주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중요한 문제를 계속 모른 체하고 있다는 걸. 너무 무겁고 괴로운 문제라 최대한 그 답을 미루고 있음을. - P195
‘돈‘과 ‘노후‘는 선주의 머릿속에 오랜 강박관념처럼 박힌 주제였다. 시한폭탄처럼 생각만 해도 살 떨리는 단어, 어둡고 불안한 화제였다. ‘평생 최선을 다해 일했는데 손에 남은 게 없다‘는 억울함과 허망함이 선주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 P195
선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승강기 쪽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성격 급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선주는 서울에 올 때마다 길도 모르면서 기진보다 늘 앞장서 걷곤 했다. 경수와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고 선주는 경수와 결코 함께 걷지 않았는데, 사이가 나빠서라기보다 습관이 들지 않아서였다. 그때마다 기진은 혼자 저만치 앞서가는 엄마와 자꾸 걸음이 뒤처지는 아빠 사이에서 둘 모두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허둥대야 했다. 서울에서 부모님을 만날 때마다 자꾸 할말이 떠오르는, 그러나 종일 그 말을 참는 얼굴을 하고. - P197
‘요즘에도, 아니 우리 세대 부모 중에도 그런 분들이 계시느냐‘면서. 그때마다 기진은 자신에게 무척 가깝고 생생한 현재가 누군가에게는 빛바랜 과거처럼 아득하고 낯선 일임을 실감했다. ‘같은 또래라지만 저 친구와 나는 정말 다른 세계에서 살아왔구나. 아마 앞으로도 쭉 다른 고민과 다른 돌봄, 다른 고독 속에서 살아가겠구나‘ 하고. - P199
기진은 삶에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책을 찾았고, 최근에 읽은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우리 몸은 어떤 자극이 왔을 때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한다. 받아들이거나 도망치거나. 하지만 이명의 경우 몸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한다. 우리는 그 혼란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져야 한다. - P200
기진은 놀랐고, 부모 자식 간이라도 ‘몸‘과 ‘몸‘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 실감했다. - P206
선주가 한번 더 ‘이럴 때 딸이 있어 참 좋다‘고 했다. 선주는 자신이 딸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늘 걱정하면서도 가끔은 딸에게 의존하고 싶어했다. 왜냐하면 ‘방법‘이 없으니까. 주위에 물어볼 곳도, 수단도, 자원도, 지식도 없으니까. 당장 상대와 말만 통해도 혼자 뭔가 해볼 텐데 영어도 국어도 선주에게는 모두 어려웠다. 게다가 점점 몇몇 단어가 머릿속에서 증발되고 있었다. 선주는 자신이 어떻게든 혼자 풀어보려 끙끙댄 문제를 기진이 휴대전화를 이용해 너무 가뿐하게 해결하는 걸 보고 종종 어리둥절했다. 그럴 땐 딸이 자랑스러우면서도 ‘그 정도‘ 문제 하나 풀지 못한 스스로가 못마땅해졌다. - P207
지금 이 순간 홀로 집에 가고 있을 엄마를 떠올렸다. 나의 오늘과 당신의 오늘이 다르다는 자명함이, 엄마의 하루와 자신의 하루의 속도와 우선순위, 색감과 기대가 늘 달랐다는 게,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게 문득 뼈아프게 다가왔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들 자신은 이 감정을 평생 느낄 거라는 점도. - P214
—그러면 너희는 그 두 안녕‘을 어떻게 구분해? 억양이나 발음이 달라? […] —그냥 알아. 그런 뒤 ‘그 순간이 오면 우리는 대체로 ‘그냥‘ 알고, 때론 끝까지 그 사실을 서로 모른 체하며 헤어진다‘는 말을 보태려다 말았다. 그러기에는 내 회화 실력이 부족해서였다. 대신 나는 훨씬 단순하고 투박한 말을 했다. —그냥 알 수 있어, 우리는. 로버트가 내 눈을 가만 바라보다 모든 걸 이해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에게는 ‘상황‘이 있으니까.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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