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번도 더 한 생각을 한 번 더 했다. ‘그때 내가 이 집을 고집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내가 창밖의 초록을 그토록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우리가 이 집 말고 다른 집을 먼저 만났더라면. 그날 날씨가 그렇게 화창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 공인중개사 말이니까, 말 그대로 국가가 인증한 사람이 보증하는 곳이니까 괜찮으리라 믿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러지 않았다면 수호는 지금 내 옆에 있을 텐데. 우리는 지금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텐데.‘ 한 번도 입 밖에 내본 적은 없지만 지수는 수호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 집이 좋다고 한 사람도, 이 집에 살자고 한 사람도 자기였기 때문이다. - P278
어느 날 지부장이 티브이 뉴스를 보다 "바보같이 저런 걸 왜 당하지"라고 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지수를 가장 괴롭힌 말도, 스스로를 끝없이 질책하게 만든 말도 바로 그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도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한, 누구든 당할 수 있고, 정말 많은 사람이 당한 일인데도 그랬다. - P278
지수는 ‘저 사람들, 어쩌면 저렇게 자기 삶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얼굴로 거리를 누빌 수 있지?‘ 어리둥절해했다.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오늘을 믿고, 내일을 기대하며 지낼 수 있지?‘ - P279
어느 순간 지수의 눈이 차분하게 빛났다. 그간 고민 해온 문제의 답을 얻은 얼굴이었다. 지수는 자신이 이 집 말고도 갈 데가 있음을 깨달았다. 거기 수호가 있다는 것도.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는데 만날 방법이 있다는 데 작은 기쁨마저 일었다. 그뒤 지수는 주머니 속에 ‘그래, 그래도 돼‘라는 말을 공깃돌마냥 넣고 다녔다. 그러곤 그 말을 자주 만지작거렸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들자 반대로 그러지 않을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 P281
—비는 한 집 위에서만 내리는 게 아니다. 여자의 팔자주름 위로 작은 미소가 어렸다. —카메룬 속담입니다. 내 친구가 알려줬어요. 한글학교 친구입니다. - P286
문득 아침에 여자가 안방 천장을 보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 한국어가 모어가 아닌 이가 건넨 정중한 문장이라 한국의 그 어떤 행정 언어나 법률 언어보다 더 정직하고 따뜻하게 다가왔던 말. 그제야 지수는 자신이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그 말을 얼마나 듣고 싶어했는지 깨달았다. 더불어 그 답 또한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하지만 대답 따위 아무도 들려주지 않을 테지.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지수가 절망적인 얼굴로 뭔가 결심한 듯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어디선가 방금 전 낙숫물에 섞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이 집에 일부러 흘리고 간 단어마냥 툭툭. 안 된다고, 그러지 말라고, 부디 살라고 얘기하는 물소리가. 지수의 두 뺨 위로 빗방울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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