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급변하다 보니 키라가 모르는 일이 생각보다 많았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영화 산업이 호황을 누렸고 그녀도 잘나갔다. 영화로 보나 당시 활동하던 배우들로 보나······. 지금은 온통 경찰 영화나 총 쏘는 영화뿐이었다. 의도적으로 단순화한 천편일률적인 작품만 넘쳐났다. 시민들이 한 번 씹고 버리면 되는 작품들이었다. 먹을 건 줘야겠는데 딱히 내놓을 게 없으니 아쉬운 대로 가축한테 던져 주듯 건초나 먹고 떨어지라는 식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드라마에 빠진 시기였다. - P25

키라 세르게예브나는 평생 거물을 낚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결국 잉여 인간 취급을 받는 인노켄치와 함께 살았다. 사실 그 대단한 거물들은 막상 가까이에서 겪어 보면 하나같이 배신자에다 비열한 인간뿐이었다. 반면 인노켄치는 한결같이 믿음직했다. 즉 완벽한 사람은 없다. 리더십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단점이 많다는 걸 의미한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수도 없이 갈등하게 된다. 옷으로 비유하면 리더십은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외출복이고 인품은 평상복이다. 물론 선택은 개인의 몫이다. - P27

젊은이들은 저녁이면 바닷가에 모이곤 했다. 해가 져도 바다는 여전히 숨을 쉬었다. 마르트노프카는 고령화가 진행되어 하나둘 죽어 가는데 바다는 항상 똑같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하늘의 달빛만이 바다를 동요시킬 뿐이었다. 젊은이들은 높은 지대에 펼쳐진 바닷가에 모여들었고, 바다는 늘 똑같은데 사람들은 매번 바뀌었다. - P29

사실 그녀가 못 할 건 또 뭐란 말인가? 《스타 팩토리》에 나온 여자들보다 모자란 것도 없어 보였다. 간혹 혀를 끌끌 찰 정도로 못생긴 여자들이 나오는 것만 봐도 그랬다. 쥐새끼처럼 작은 여자가 나오는가 하면 돼지처럼 뚱뚱한 여자도 출연했다. 농구선수처럼 키가 큰 여자도 있었다. 그들과 비교했을 때 안젤라는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그 길에 들어섰고 안젤라는 그들에게 뒤처진 상황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었다. 그녀의 친할아버지, 즉 바실리의 아버지가 "뭔가를 더 빨리 얻고 싶다면 방법은 아주 간단해. 사람들이 들어오라고 문을 여는 순간 너는 창문으로 들어가렴······." 하고 알려 주었다. - P30

멀리 구석 쪽에서 얼쩡거리는 청년이 보였다. 몽유병 환자라도 되는 듯 눈을 반쯤 뜬 채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처럼 서 있었다. 리듬에 맞춰 배 쪽으로 낮게 멘 기타의 현을 쓰다듬고 있었는데, 조각 같은 입을 움직여 허밍으로 따라 부르는 것 같았다. 안젤라는 그의 자유로운 모습에 넋이 나갔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게 구속받는 그녀와 달리 그 무엇도 그 누구도 그를 구속하지 않는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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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서 일어나는 일은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꽃은 벌을 유인하기 위해 좋은 향을 낸다. 반면 냄새가 고약한 것은 말려서 바람에 날려 버려야 한다. 흔적도 없이 말이다. - P11

하지만 이번만큼은 여자의 생각이 틀렸다. 나타샤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불행하지 않았다. 젖소과 함께 초원에 앉아 있는 것만큼 좋은 일이 또 있을까? 그것도 하늘과 땅이 맞닿은 지평선에서 말이다. 젖소는 아이처럼 순하고 순박하며 예쁘기까지 하다. 술을 병째 들이켜고 나면 세상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면 사람이든 동물이든 눈물이 날 정도로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공기를 가르며 불행을 예고한다는 말벌조차 신의 창조물이며 제 역할과 기능이 있으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P14

안젤라는 집(좀 더 정확히는 잠시 신세 지는 여자의 집)으로 3번 전차를 타고 갔다. 전차는 텅 비어 있었다. 안젤라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모스크바 사람들을 보려다 갑자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전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아가씨, 왜 울어요?"라고 묻는 사람은 고사하고 그녀를 애써 위로하는 사람도 없었다. ‘인생은 길고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그녀의 슬픔에 빠져들었고, 그들 역시 어느새 훌쩍이기 시작했다. 어린 아가씨의 슬픔과 자기 연민에서 비롯된 흐느낌이었다. 물론 자기 연민만으로도 눈물을 쏟을 이유는 충분했다. - P15

인노켄치는 인체가 수분으로 구성된 것처럼 90퍼센트의 게으름으로 이루어진 사람이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벽장에 있는 드릴을 꺼내서 콘센트에 꽂고 벽에 구멍 낸 뒤 망치로 못을 두드려 벽에 고정하는 일은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안 날 만큼 어마어마한 결단이 필요했다. […]
그는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겐 이끌어 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누군가 리드해 주면 어떤 목표라도 이뤄 낼 수 있고 하늘의 별이라도 따 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리더도 선두도 아니었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2등으로 만족했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2등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1등은 한 명뿐이다. 잔다르크나 미하일 쿠투조프 같은 이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군대는 2인자로 이루어진 조합이다. 2인자 없이 1인자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뤄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세계는 수많은 2인자로 이루어진 것이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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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사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솔직하지 못하면 누구에게 솔직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진정 내 모습일 수 있는 순간은 오직··· - P132

며칠 전 한밤중에 일어나 있는 내 모습을 보고, 남편은 내가 남자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의심했다. 그는 내가 일기를 쓴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할 것이다. 내게도 생각이 있다는 것을 믿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잘못된 감정에 빠져 있다고 믿기가 더 쉬웠던 거다. 순간 나는 미렐라가 화가 나서 한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미렐라처럼 자유로웠다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었을 거라는 말 말이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요즘 들어 가족과 관련된 모든 일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 P139

사무실은 조용하고 아늑했다. 빈 책상들은 하나같이 깨끗이 정돈된 상태였고, 서류를 보관하는 책장 문도 잘 닫혀 있었다. 전화도, 전화 교환기의 메마른 버튼 소리도, 신경질적으로 탁탁 타자기를 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처음으로 사무실 환경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있으면 미렐라도, 시장도, 지저분한 접시도 나를 방해하지 못했다. - P143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마리나라는 아이를 알고 싶은 마음이 털 끝만큼도 없다. 마음에 안 들 것이 안 봐도 뻔했다. 내 아들의 짝 으로 어떤 여자가 좋을지 생각해봤는데, 한참을 생각한 끝에 ‘강한 여자‘였으면 좋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부모들이 부자 며느리를 바라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결국은 같은 말이니까. 하지만 나는 경제력보다 더 깊은 내적인 강인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자는 돈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런 두려움도 일종의 나약함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마리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은 그애의 나이 때문이다. 그애의 젊음, 실수할 수 있는 권리와 미숙할 수 있는 권리 때문일 것이다. - P154

참, 이상한 일이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든 논리와 권리를 금전적인 이유에서 찾는다. 아마도 내가 돈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나 역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 같기는 하다. - P164

사실 진정한 친구 없이 지낸 지 이미 오래다. 과거 학교 동창들과 신혼 때 어울리던 내 또래 젊은 여자들은 모두 나와 다른 삶 을 산다. 다들 아침 늦게 일어나 미용실에 가거나, 양장점에 들렀다 오후에는 카드놀이를 한다. 나와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서 대화 할 거리도 없다. 직장 동료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불편했다. 살아 온 삶도 사회적인 지위도 교육도 말하는 법도 달랐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새 친구를 사귈 수도 없다. 몇 년 동안 사무실과 집을 쳇바퀴 돌듯 오가는 것도 버거웠다. 아이들을 위해 투자한 시간 이야말로 나의 오랜 자산이라고 생각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그런 내 자산을 훔쳐 달아나려 한다. 사실상 내 소유인 것은 그동안 직장에 투자한 시간밖에 없다. 그러니 사무실에서만 가식 없는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거짓말을 한 대가로 평생 그 거짓말을 지켜야 하는 벌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 P169

가끔 기분이 좋을 때면, 술에 취한 듯 집을 엉망인 채로 놔두는 상상을 해본다. 더러운 냄비와 빨랫감을 내팽개치고, 침대도 정 리하지 않은 채 말이다. 때로는 그런 욕망에 사로잡혀 잠이 든다. 그것은 폭력적이고 맹렬한 욕망이었다. 임신했을 때 미친 듯이 빵을 먹고 싶었을 때 느꼈던 그런 욕망이었다. 밤마다 집 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다가 미켈레가 돌아오기 전까지 정리를 끝마치지 못하는 꿈도 꾸었다.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 P172

가족끼리 도저히 타협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쩌면 그래서 서로에게 진실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 P180

핸드백 안에 일기장을 넣고 집을 나서는 미렐라의 모습이 떠올 랐다. 토요일에 방해받지 않고 글을 쓰려고 사무실에 가는 미켈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르헨티나의 산을 찍은 사진을 방에 붙여놓은 리카르도의 모습이 보였다. 가족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원수처럼 상대방에게서 자신을 방어하는 존재다. - P182

"전 이런 상황이 싫은 거예요, 엄마. 엄마는 저를 비롯한 모두를 돌봐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면 결국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그걸 당연하게 생각할 거라고요. 엄마는 여자가 집안 일이나 요리하는 일 외에 다른 성취감을 느끼는 것을 죄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여자의 의무는 가족을 돌보는 것뿐이라고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살지 않을래요. 그러기 싫어요." - P191

그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어떤 시점에 가서는 가족 간에 어디 까지가 친절함에서 나온 행동이고, 어디까지가 잔혹함에서 나온 행동인지 구별하기가 힘들어진다. - P213

"자식들은 절대로 떠나지 않아요. 떠난다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다행인 거죠. 혼자 남겠지만, 적어도 고독으로 인한 혜택은 누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어떤 혜택도 누리지 못하면서 외롭기는 마찬가지죠." -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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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여름날 저녁이었다. 후카 가와의 요정 히라세이 앞을 지나던 세이키치의 시선 속으로 문득 요정 앞에 대기하고 있던 가마가 들어왔다. 주렴이 드리워진 그늘 사이로 여인의 새하얀 맨발이 드러나 있었다. 예리한 그의 시선에는 사람의 발이 얼굴과 똑같이 복잡한 표정을 가진 것으로 비춰졌는데, 그 여인의 발은 고귀한 살갗으로 이루어진 보석처럼 느껴졌다. 엄지에서 시작해서 새끼로 끝나는 가지런한 다섯 발가락의 섬세함, 에노시마 해변에서 캐낸 연한 선홍빛 조개에도 뒤지지 않을 발톱의 색감과 구슬과도 같은 발뒤꿈치의 완곡미, 그리고 바위틈에서 새어 나오는 맑은 샘물이 항시 발치를 씻어 내고 있다고 착각할 만한 윤기. 바로 이 발이 머지않아 사내의 생 피로 살을 찌우고, 그 사내의 몸을 짓밟을 발이리라. 그리고 이 발의 주인이야말로 그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여인 중 가장 이상적인 여인일 것이었다. - P10

"너를 정녕 아름다운 여인으로 만들기 위해 나는 문신에 내 혼을 모두 쏟아부었단다. 이제 이 나라에서 너보다 아름다운 여인은 없어. 지금까지 네 안에 있던 나약함은 이제 다 사라져 버렸다. 남자라는 남자는 모두 너의 비료가 될 게야······." - P17

분홍색 커튼이 쳐진 창 안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신비로운 울림······. 때로는 숲속 요괴의 웃음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같다가 어떤 때는 동화 속에서 난쟁이들이 빼곡히 한데 어울려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수천 개의 섬세한 상상의 비단 색실로 어린 마음에 미묘한 꿈을 한 땀 한 땀 새겨 넣는 그 신비로운 울림은 마치 이 오래된 늪 밑바닥에서 퍼져 나오는 연주 소리 같다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 P31

잠시 후 방 안의 적막을 깨고 쥐 죽은 듯 고요했던 옆방에서 갑자기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싸라기눈이 은반 위를 내달리는 것처럼, 골짜기에 맑은 물이 졸졸 흘러 이끼 위에 방울져 떨어지는 것처럼, 이 세상의 소리가 아닌 듯 신비로운 음률이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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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참 기이한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때로는 용기라는 것이 나약함의 이면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 P15

연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그중 하나인 나약하고 감상적인 연민은 그저 남의 불행에서 느끼는 충격과 부끄러움으로부터 가능한 빨리 벗어나고 싶어하는 초조한 마음에 불과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는 대신 남의 고통으로부터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방어한다. 진정한 연민이란 감상적이지 않은 창조적인 연민으로, 이것은 무엇을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힘이 닿는 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함께 견디며 모든 것을 극복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연민을 말한다. - P17

고장 난 시계 속 톱니바퀴를 급하게 고치려다 보면 대개 시계 전체를 망가 뜨리는 법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어디까지가 나의 단순한 실수이고 어디서부터 나의 죄가 성립되는지 그 경계를 구분 짓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 P19

온실 속에서 자라는 꽃이 더 무성하게 잘 자라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자라는 망상도 그러했다. 망상은 불을 뿜어내는 덩굴식물이 되어 축축한 바닥에서 솟아올라 내 목을 졸랐고, 열에 들뜬 머릿속에서는 터무니없는 공포스러운 장면들이 꿈속에서나 있음직한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 P39

에디트의 잔인한 퇴장을 지켜보면서 나는 심장이 조여왔다. 그녀가 어째서 남의 도움을 받거나 휠체어를 타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아차린 것이다. 에디트는 나에게, 아니, 우리 모두에게 자신이 불구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절망감에서 나온 은밀한 복수심에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자신의 고통으로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하느님을 책망하는 대신에 건강한 우리를 책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잔인하고도 도전적인 행동을 통해서 나는 에디트가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 P54

다른 사람이 불행하다고 해서 나 역시 불행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가 웃으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매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수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병원, 채석장, 탄광 등지에서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공장, 관청, 교도소에서는 매시간 수많은 사람들이 사역에 동원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또한 내가 쓸데없이 나 자신을 괴롭힌다고 해서 결코 이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지구상의 모든 비참함을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괴로움에 잠도 못 이루고 입가의 웃음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분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절망에 빠뜨리는 것은 결코 머릿속에서 그려보는 상상 속의 고통이 아니다. 실제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함께 나눈 고통만이 진정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놓을 수 있는 법이다. - P60

남을 도와주고 남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겠다는 결심 만으로도 나는 흥분되었다. 흥겨운 마음에 노래를 부르거나 뭔가 어리석은 짓이라도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사람은 자신이 남에게도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존재의 의미와 사명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 P70

마음껏 수다를 떨고 농담을 하면서 나는 일종의 구속이라는 형식은 영혼이 갖는 본래의 힘을 제약시키는 것이며, 인간의 진정한 도량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때 드러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 P71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 자유로운 사람과 감금되어 있는 사람의 관계가 아무런 문제없이 지속되기란 힘든 법이다. 불행한 사람은 쉽게 상처받고, 끊임없이 고통받는 사람은 모든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쪽은 주기만 하고 한쪽은 받기만 하는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불편할 수밖에 없듯이, 늘 보호를 받기만 하는 환자는 조금이라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마음에 대해서도 언제나 속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상처받기 쉬운 그녀에게는 때로는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그녀를 달래주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 애매모호한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언제나 주의해야만 했다. - P74

인간에 대해 한 가지를 이해하고 나면 다른 것들도 이해하게 되는 법이다. 한 가지 고통을 진심으로 연민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마법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고통도, 심지어는 낯설고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고통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P75

새로운 것을 깨우칠 때마다 황홀해지고, 어떤 감정에 빠지게 되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이 바로 청춘이다. 남을 동정할 수 있는 나의 능력이 나 자신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발견한 순간, 내 안에서는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연민이라는 새로운 능력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내 피를 더 따뜻하고 더 빨갛고 더 빠르고 더 격렬하게 만들어주는 독소가 혈액 속으로 침투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마치 잿빛 어스름 속을 거닐듯 무미건조하게 어슬렁거리며 살아왔던 생활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예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수백 가지 일들이 나를 자극하고 나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남의 고통을 인식하게 된 그 순간부터 내 안에서 보다 날카롭고 예리한 눈이 깨어난 것만 같았다. 사방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이 나의 관심을 끌었고 나를 열광시켰고 격동시켰다. 온 세상이 거리마다. 방마다 운명으로 가득 차 있고, 밑바닥까지 어려운 일들로 넘쳐흐르는 덕분에 나의 하루하루는 끊임없는 긴장과 흥분으로 채워질 수 있었다. - P76

가엾은 소녀가 겪는 무력함이라는 고통을 이해하게 된 순간부터 나는 모든 잔인함을 증오하는 마음이, 모든 무력함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운명이 나의 눈에 연민이라는 뜨거운 눈물을 주입한 후부터 나는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수많은 일들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사소하고 단순한 일들 하나하나가 나를 긴장시키고 격동시켰다. - P77

나는 매일매일 새로운 일들을 통해서 내 안에서 갑작스럽게 생겨난 열정을 발산했다. ‘이제부터는 누구든지 최선을 다해 돕자! 다시는 나태하고 무심한 생활로 돌아가서는 안 돼! 나를 희생하면 나의 가치가 높아지는 거고, 남의 운명을 이해하고 남의 고통을 함께 나누면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놀라워하며, 내가 뜻하지 않게 상처를 줬지만 자신의 고통을 통해 연민이라는 마법을 내게 가르쳐준 그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밀려왔다. - P77

황금빛 옷깃을 단 고급장교들은 하급장교가 그런 식으로 우쭐대는 꼴을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오래전부터 나의 본능은 두 개의 세계, 즉 구속받지 않고 사치에 익숙해진 자유인으로서의 화려한 세계와 한 달이 31일이 아닌 30일인 것만으로도 큰 부담을 더는 가난하고 불쌍한 직업군인의 세계를 가능한 한 떨어뜨려놓고 섞이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충고했다. 무의식 속에서도 하나의 나는 또 다른 나에 대해 별로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때로는 나 자신조차도 진짜 토니 호프밀러가 누구인지, 군인으로서 복무하는 나인지 케케스팔바 저택에 있는 나인지, 부대 밖의 나인지 부대 안의 나인지 구분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 P79

그러나 마음의 평형상태가 한번 흔들리기 시작하면 아무리 스스로를 다잡으려 해도 소용없는 법이다. 나는 요치와 페렌츠가 놀라고 감탄하던 모습으로 인해 그동안 가볍고 편안했던 마음이 파괴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정말로 나는 오로지 연민 때문에 그 저택을 드나든 것인가? 허영심이나 즐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단 말인가? 이것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 P87

처음으로 나는 진정한 관심은 전기 스위치처럼 마음대로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남의 운명에 관여한 사람은 자신의 자유가 제한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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