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건 미리 내다볼 수 없는 거지. 죽음, 그건 말이 없으니까 말이야. 모든 약속을 깨 버리잖아. 우린 죽음이 더 늦게 찾아올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원할 때 다가오는 거야. - P8

언젠가, 네가 내 곁을 떠나면 난 언제까지나 불완전한 사람이 될 거라고 확신해. 하지만 너에게 내 품에 있으라고 더 이상 얘기할 수 없게 되겠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바라던 것일지라도 말이야. 유년기를 벗어나자마자, 널 만났고, 바로 너, 너와 함께 결국 내 진실한 삶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해도 네게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진 못하겠지. -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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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느낀 슬픔, 공포, 수치심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날 밤 나는 깜깜한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새벽이 될 무렵 갑자기 폭발음과 함께 하늘 한쪽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위지의 생일 파티 중인 것 같았다. "인생이 다 그런거지." 난 펑 소리를 내며 하늘을 밝게 수놓는 불꽃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한순간 별빛을 가릴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지만, 곧 타고 남을 자루만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것……"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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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것은 직시였다. 만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 비록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며 갑갑해 하는 것 또한 엄연히 근접 조우(dose encounier)의 한 형태였다. 이상적인 만남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만남은 여전히 특별했다. 어쨌거나 그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는 했으니까. - P201

"더 멋진 의제를 갖고 들어왔더라면 폼 나고 좋았을 거야. 더 지적이고 세련된 인류를 대변할 수 있었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랬으면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겠지. 나보다 훨씬 높은 사람들이 왔거나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이 문 앞에 섰을 거야.
그런데 그런 전 만남이 아니잖아. 누구나 상상하는 이상적인 근접 조우 같은 전 매뉴얼에나 나오는 거니까. 만남이 매뉴얼대로 되나? 만남은 원래 이상한 거잖아. 누가 됐든 이상적으로 이상적인 사람 말고 구체적으로 이상한 사람을 만나기는 해야 될 거 아니야. 그게 나여도 상관없고, 그러니까 내가 가도 되는 거야.
아, 정말이지 다행이지 뭐야. 인류가 충분히 어리석어서. 그래야 내가 마음 편히 대변할 수 있으니까? - P202

글이 안 써지는데 왜 실연했을 때와 똑같은 상처가 느껴지는 걸까. 아마 연락이 끊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닿을 방법이 없고,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방향을 잃고 어딘가를 맴돌았다. 구심점조차 없는 허탈한 방황이었다. - P273

사람이 달리는 광경이라니. 신기할 게 하나도 없는 장면이었지만, 저렇게 달리는 존재를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순수한 경이로움이었다. 단순하기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압도적인 탁월함 같은 것. - P298

미숙함은 잘못이 아니었다. 탁월함이야 집 앞 계단에 갖다놔도 변함없이 선(善)이었지만. - P315

아내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오른쪽 어깨쯤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나는 행복하게 잘 살았어."
그 사람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우주를 건너, 혹은 나무의 나이만큼 오랜 시간을 넘어, 긴 잠에 빠진 나에게로 전해졌다.
"당신도 잘 살아, 어떤 세상에서 깨어나든. 그리고 잘 자, 부디."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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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하는 것이 없다.

원하는 것이없다는 것은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나인데
이 허전한 느낌은 뭘까?

그렇지만, 다들 이렇게 말하지.

‘사치스러운 고민‘이라고.

듣기싫어.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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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경은 익숙한 이름에 주의를 뺏기지 않고 15년 전으로 곧장 페이지를 넘겼다. 몇 달씩 혹은 1년씩 시간이 빠르게 뒤로 흐르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은경은 곧 역행하는 시간의 눈금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페이지 넘기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책갈피도 없이 덮어두었던 바로 그 페이지로 돌아왔다. 제목만 봐도 눈물이 터져 나올 듯 숨 막히는 기억. 인사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첫사랑. - P112

은경은 그 대화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과거에 직접 겪은 일처럼 말하기. 그리고 은경이 기억해서는 안 되는,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무언가.
당연히 은경은 시간 여행자의 시간을 산 적이 없었다. 단지 <마임의 이해>라는 초청 강연이 열리는 강의실을 찾아 헤매다가 맨 처음 강은신을 만난 날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과거에 직접 겪은 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강은신은 은경이 그 일을 기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만남지‘ ‘있잖아‘ 같은 말을 썼다. 알트나이의 표현대로라면 ‘과거에 직접 겪은 미래의 일‘이라는 의미였다. - P116

어떻게 하필 그날이었을까. 왜 하필 그날 이즈미르에서 친구가 결혼을 했고, 왜 하필 그 결혼식장에서 알트나이를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됐을까. 알트나이는 왜 강연 날짜를 그날로 잡았고, 무슨 생각으로 은경을 강연 같은 데에 초대한 걸까. 어쩌면 시간은 생각보다 집요한 극본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구별하는 일 따위가 시간 앞에서 과연 무슨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팽팽하고 질긴 시간의 힘줄이 느껴졌다. 시간을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목격 정도는 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 P118

그 사람을 만난다. 강은신을.
결코 이 세상에는 속하지 않는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
때로는 주어이고 때로는 목적어여서 그 사이에 들어갈 술어를잘 골라내기만 하면 몇 번이고 둘이 함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문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영혼의 파트너.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예고도 없이 사라져버린 첫사랑. 잃을 것도 별로 없던 젊은 김은경이 애지중지 품고 있던 유일한 잃을 것. - P121

그 시대 기준으로 영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학자가 생각한 당대 영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위협은, 아무리 힘이 약한 사람이라도 제일 힘이 센 사람이 자고 있을 때 칼로 찔러서 죽일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과장을 좀 보탠 이야기지만, 그보다 한참 뒤에 나온 영국식 추리소설에 그런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오는 걸 보면 영 근거 없는 가정은 아니다. 밤사이 죽은 시체. 모든 추리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탐정의 임무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탐정은 누구나 토머스 홉스의 대리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방에서는 근대 영국을 관통한 공포의 대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가장 힘센 인간이 제일 나약한 인간의 방에 칼을 들고 침입하려 해도, 침대가 펼쳐져 있다면 출입문을 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P128

"물어보는 건 자유지. 대답하는 건 자유가 아니지만." - P144

"요즘 지구 좀 심심한 것 같지 않아? 수십 년 전에 하던 거 계속하고 있는 것 같고. 이상한 인간들이 다 목성 쪽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래. 반은 농담이지만. 하여간 물건의 용도 자체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어서, 이기론으로 치자면 이 자체를 발명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하고, 플라톤식으로 말하자면 형상 자체가 새로 창조 되고 있다고 해야겠지" - P147

우주를 건너 온 여행자. 무엇을 보게 될지 알 수 없고 계획대로 다시 온전히 접힌다는 보장도 없이 2차원 평면으로 쫙쫙 펴진 다음 운반하기 좋은 모양으로 접힌 채 차곡차곡 우주선에 실린 어느 존재의 영혼.
자기를 알아볼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을까. 누군가가 찾아내 맥박을 타진할 때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홀로 고독했을까. 먼지에 파묻힌 자신의 디자인을 찾아내 하나하나 고이 접어 3차원 공간에 되살려줄 그 귀한 손을 만나게 될 때까지. - P162

이 소설은 영혼을 접었다 폈다 하는 고달픈 여행길에 놀랍도록 흥미로운 친구를 만나는 이야기다. SF에서는 이 ‘뭔지 모르게 놀랍고 신비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경이감‘이라고 부른다.
잡지에 실린 이 소설을 읽고, 그 단어만 빼놓고 열정적으로 감상을 이야기하던 독자가 떠올라서 여기에도 써둔다. 경이감이라고 말하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 긴 감상이 더 좋았다. 그건 정말 내가 저렇게 신나는 걸 만들고 있구나 싶을 만큼 멋진 감상이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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