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경은 익숙한 이름에 주의를 뺏기지 않고 15년 전으로 곧장 페이지를 넘겼다. 몇 달씩 혹은 1년씩 시간이 빠르게 뒤로 흐르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가 금세 사라졌다. 은경은 곧 역행하는 시간의 눈금을 바라보는 것 자체가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페이지 넘기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책갈피도 없이 덮어두었던 바로 그 페이지로 돌아왔다. 제목만 봐도 눈물이 터져 나올 듯 숨 막히는 기억. 인사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첫사랑. - P112

은경은 그 대화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과거에 직접 겪은 일처럼 말하기. 그리고 은경이 기억해서는 안 되는, 하지만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무언가.
당연히 은경은 시간 여행자의 시간을 산 적이 없었다. 단지 <마임의 이해>라는 초청 강연이 열리는 강의실을 찾아 헤매다가 맨 처음 강은신을 만난 날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과거에 직접 겪은 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강은신은 은경이 그 일을 기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만남지‘ ‘있잖아‘ 같은 말을 썼다. 알트나이의 표현대로라면 ‘과거에 직접 겪은 미래의 일‘이라는 의미였다. - P116

어떻게 하필 그날이었을까. 왜 하필 그날 이즈미르에서 친구가 결혼을 했고, 왜 하필 그 결혼식장에서 알트나이를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됐을까. 알트나이는 왜 강연 날짜를 그날로 잡았고, 무슨 생각으로 은경을 강연 같은 데에 초대한 걸까. 어쩌면 시간은 생각보다 집요한 극본이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구별하는 일 따위가 시간 앞에서 과연 무슨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팽팽하고 질긴 시간의 힘줄이 느껴졌다. 시간을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목격 정도는 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 P118

그 사람을 만난다. 강은신을.
결코 이 세상에는 속하지 않는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
때로는 주어이고 때로는 목적어여서 그 사이에 들어갈 술어를잘 골라내기만 하면 몇 번이고 둘이 함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문장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영혼의 파트너.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예고도 없이 사라져버린 첫사랑. 잃을 것도 별로 없던 젊은 김은경이 애지중지 품고 있던 유일한 잃을 것. - P121

그 시대 기준으로 영국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학자가 생각한 당대 영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위협은, 아무리 힘이 약한 사람이라도 제일 힘이 센 사람이 자고 있을 때 칼로 찔러서 죽일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과장을 좀 보탠 이야기지만, 그보다 한참 뒤에 나온 영국식 추리소설에 그런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오는 걸 보면 영 근거 없는 가정은 아니다. 밤사이 죽은 시체. 모든 추리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탐정의 임무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래서 탐정은 누구나 토머스 홉스의 대리인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방에서는 근대 영국을 관통한 공포의 대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가장 힘센 인간이 제일 나약한 인간의 방에 칼을 들고 침입하려 해도, 침대가 펼쳐져 있다면 출입문을 열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 P128

"물어보는 건 자유지. 대답하는 건 자유가 아니지만." - P144

"요즘 지구 좀 심심한 것 같지 않아? 수십 년 전에 하던 거 계속하고 있는 것 같고. 이상한 인간들이 다 목성 쪽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그래. 반은 농담이지만. 하여간 물건의 용도 자체가 새로 만들어지고 있어서, 이기론으로 치자면 이 자체를 발명하는 인간들이 수두룩하고, 플라톤식으로 말하자면 형상 자체가 새로 창조 되고 있다고 해야겠지" - P147

우주를 건너 온 여행자. 무엇을 보게 될지 알 수 없고 계획대로 다시 온전히 접힌다는 보장도 없이 2차원 평면으로 쫙쫙 펴진 다음 운반하기 좋은 모양으로 접힌 채 차곡차곡 우주선에 실린 어느 존재의 영혼.
자기를 알아볼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렸을까. 누군가가 찾아내 맥박을 타진할 때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홀로 고독했을까. 먼지에 파묻힌 자신의 디자인을 찾아내 하나하나 고이 접어 3차원 공간에 되살려줄 그 귀한 손을 만나게 될 때까지. - P162

이 소설은 영혼을 접었다 폈다 하는 고달픈 여행길에 놀랍도록 흥미로운 친구를 만나는 이야기다. SF에서는 이 ‘뭔지 모르게 놀랍고 신비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경이감‘이라고 부른다.
잡지에 실린 이 소설을 읽고, 그 단어만 빼놓고 열정적으로 감상을 이야기하던 독자가 떠올라서 여기에도 써둔다. 경이감이라고 말하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그 긴 감상이 더 좋았다. 그건 정말 내가 저렇게 신나는 걸 만들고 있구나 싶을 만큼 멋진 감상이었다.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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