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그것은 직시였다. 만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 비록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며 갑갑해 하는 것 또한 엄연히 근접 조우(dose encounier)의 한 형태였다. 이상적인 만남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만남은 여전히 특별했다. 어쨌거나 그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기는 했으니까. - P201
"더 멋진 의제를 갖고 들어왔더라면 폼 나고 좋았을 거야. 더 지적이고 세련된 인류를 대변할 수 있었다면 말이야. 하지만 그랬으면 내가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했겠지. 나보다 훨씬 높은 사람들이 왔거나 나보다 훌륭한 사람들이 이 문 앞에 섰을 거야. 그런데 그런 전 만남이 아니잖아. 누구나 상상하는 이상적인 근접 조우 같은 전 매뉴얼에나 나오는 거니까. 만남이 매뉴얼대로 되나? 만남은 원래 이상한 거잖아. 누가 됐든 이상적으로 이상적인 사람 말고 구체적으로 이상한 사람을 만나기는 해야 될 거 아니야. 그게 나여도 상관없고, 그러니까 내가 가도 되는 거야. 아, 정말이지 다행이지 뭐야. 인류가 충분히 어리석어서. 그래야 내가 마음 편히 대변할 수 있으니까? - P202
글이 안 써지는데 왜 실연했을 때와 똑같은 상처가 느껴지는 걸까. 아마 연락이 끊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닿을 방법이 없고, 적극적으로 움직여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방향을 잃고 어딘가를 맴돌았다. 구심점조차 없는 허탈한 방황이었다. - P273
사람이 달리는 광경이라니. 신기할 게 하나도 없는 장면이었지만, 저렇게 달리는 존재를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였다. 그것은 순수한 경이로움이었다. 단순하기에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압도적인 탁월함 같은 것. - P298
미숙함은 잘못이 아니었다. 탁월함이야 집 앞 계단에 갖다놔도 변함없이 선(善)이었지만. - P315
아내가 나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오른쪽 어깨쯤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나는 행복하게 잘 살았어." 그 사람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우주를 건너, 혹은 나무의 나이만큼 오랜 시간을 넘어, 긴 잠에 빠진 나에게로 전해졌다. "당신도 잘 살아, 어떤 세상에서 깨어나든. 그리고 잘 자, 부디."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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