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는 것은 그 공원 전체의 분위기에 대한 것입니다. 암흑한 동굴을 이면에 두고 있으면서도 앞쪽으로 돌아서면 항상 명랑하고 즐거운 얼굴 표정을 하고 호기심에 찬 대담한 눈빛을 반짝이며 밤이면 밤마다 짙은 화장을 자랑하는 공원 전체의 정취를 말하는 것입니다. 선도 악도, 아름다움도 추함도, 웃음도 눈물도 모두 한데 녹여내고 점점 더 교묘한 현혹의 빛을 내뿜고 현란한 색채가 넘쳐 나는 거대한 공원의 바다와도 같은 장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 P44

"당신처럼 성실하고 온화한 아가씨가 이 무시무시한 거리 모습을 어떻게 태연히 바라볼 수 있지?"
나는 여러 번 그녀에게 물어보려다가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실제로 그런 질문을 했다면 그녀는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내가 태연할 수 있는 것은 당신에게서 받은 감화 덕분이에요."라고 할까요. "내게는 당신이라는 연인이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의 암로에 들어선 자에게는 두려움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답니다"라고 할까요.—그렇습니다. 그녀는 분명 그런 대답을 했을 게 틀림없습니다. 그녀는 그럴 만큼 열렬하게 나를 믿고, 그 정도로 순수하게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 P57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의 영혼 저 깊은 곳에는 정도 차이는 있겠으나 내가 느끼는 바와 똑같은 아름다움을 느끼고, 내가 꿈꾸는 바와 똑같은 꿈을 꾸는 소질이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만 나처럼 그것을 의식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부정하는가, 라는 점만 서로 다른 것이지요.—나는 딱히 별다를 것도 없이 그런 식으로 생각했습니다. - P67

"돈이 많다는 것은 물론 행복한 일이지만 자칫하면 도리어 불행한 결과를 낳게 돼. 부는 모르는 사이에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마는 거야."
"아니, 그럴 걱정은 없어. 부자가 타락하는 것은 그 재산을 더 불려 보겠다고 사업에 뛰어들 때뿐이지. 돈이 많은 자는 일하지 않고 놀기만 하면 항상 행복해."
그렇게 말하며 그는 별반 신경도 쓰지 않는 기색이었습니다. - P89

"우스꽝스럽게 느끼지는 않더라도 어떤 종류의 쾌감을 갖는 것은 확실하지. 오히려 그림으로 하는 게 더 재미있을 정도야. 애초에 예술적 쾌감을 비애라느니 우스꽝스러움 이라느니 혹은 환희라느니 하는 식으로 구분하는 것부터가 잘못되었어. 세상에 순수한 비애나 우스꽝스러움이나 혹은 환희라는 것이 존재할 리가 없거든."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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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갈색, 황갈색, 적갈색, 노란색이다. 공들여 배합한 색조 때문에 고풍스러운 분위기인 이곳에서 쿠션의 생생한 오렌지빛이나 장정한 책들 사이로 얼룩덜룩한 책 몇 권이 밝은 점처럼 도드라질 것이다. 너울지며 들어오는 한낮의 햇빛 아래 장미꽃 화병이 놓여 있어도 거실은 조금 침울해 보일지도 모른다. 이 방은 저녁에 더 어울리는 공간일 것이다. 겨울이면, 젖힌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몇 줄기 빛을 통해 책장 구석이라든가 음반꽂이, 책상, 소파 테이블, 거울에 어린 희미한 모습들이 보일 것이다. 길이 잘 든 나무, 묵직한 느낌의 화려한 비단, 크리스털 조각, 부드러운 가죽, 모든 사물이 빛을 발하는, 사방이 어둠에 잠긴 이 방은 분명 평화의 항구이자 행복의 땅일 것이다. - P15

책으로 둘러싸인 벽들 사이에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사물들에 둘러싸여, 멋지고 단순하며 감미롭게 빛나는 사물들 사이에서, 삶이 언제까지나 조화롭게 흘러가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삶에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다. 홀연히 모험을 찾아 나서기도 할 것이다. 어떤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원한이나 쓰라림, 질투를 맛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소유와 욕망은 언제나 모든 지점에서 일치를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균형을 행복이라 부를 것이고, 얽매이지 않으면서 현명하고 고상하게 행복을 지키고, 그들이 나누는 삶의 매 순간 이를 발견할 줄 알 것이다. - P20

파리 전체가 그들에게는 영원한 유혹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취기 어린 상태로 그 유혹에 자신들을 내맡기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빠져들고는 했다. 하지만 욕망의 끝은 냉혹하게 꽉 막혀 있었다. 커져만 가는 불가능한 꿈은 상상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 P23

이상하리만치 달콤하게 빠져드는 부푼 몽상과 달리 실제로 그들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에 객관적 필요와 재정 상태의 절충을 꾀한 어떤 이성적 계획도 끼어 들지 못했다. 무한한 욕망만이 그들을 압도했다. - P26

그들은 안락한 가운데 미를 추구하며 살고 싶었다. 그들은 목청을 높이며 감탄하곤 했는데, 이것이 바로 부자가 아니라는 제일 확실한 증거였다. 몸에 배서 너무나 당연한 것, 몸의 행복에 따르기 마련인, 드러나지 않고 내재하는 진정한 즐거움이 그들에게 부족했다. 그들의 즐거움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사치라 부르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돈을 전제한 것이었다. 그들은 부(富)의 기호에 쓰러질 지경이었다. 그들은 삶을 사랑하기에 앞서 부를 사랑했다. - P28

그들이 좇는 길, 새롭게 눈뜬 가치, 전망, 욕망, 야망, 이 모든 것이 종종 어쩌지 못할 만큼 공허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위태하거나 모호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삶, 암울함 이상으로 알 수 없는 불안의 근원이었다. 무엇인가 입을 무한히 크게 벌리고 있는 것 같았다. 종종 혼잣말로 어쩌면 삶이 매력과 안락함, 미국식 코미디나 솔 바스의 영화 엔딩 크래딧처럼 환상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상상 속에서 경이롭고 눈부신 장면들, 가령 스키 자국 두 줄이 선명히 남은 새하얀 눈밭이라든가 푸른 바다, 태양, 푸른 언덕이 펼쳐지고 벽난로에 불꽃이 일렁이는 모습이 떠올랐다. 거침없이 펼쳐진 고속도로, 값비싼 자가용, 호사스러운 집이 그들을 향해 손짓하는 것 같았다. - P39

온종일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놀란 낯으로 지레 겁을 집어먹기도 했지만, 감히 그 같은 심경은 입에 담지도 못했다. 앞으로 자신들의 운명과 존재 이유, 행동을 결정지을 유치한 맹목적 추구 앞에서 이를 감히 제대로 응시하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욕망의 크기에 압도당해, 눈앞에 펼쳐진 부와 주어진 풍요로움에 질식해 갔다. - P39

그들은 테이블에 죽치고 앉았다. 자신에 대해, 세상, 온갖 것, 별 볼 일 없는 것, 취미, 야망에 대해 떠들어댔다. 어느 도시나 있기 마련인 편안한 바를 찾아 내서 새벽 1시까지 위스키와 브랜디, 진 토닉을 앞에 두고 저버린 사랑, 욕망, 여행, 거부와 열정을 되풀이해서 말했다. 그러면서 서로의 레퍼토리가 똑같은 것에 대해 조금도 놀라워 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 P42

그들의 세계에서 살 수 있는 수준보다 더 많이 갈망하는 것은 어떤 법칙에 가까웠다. 이렇게 만든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현대 문명의 법칙이었고, 광고, 잡지, 진열장, 거리의 볼거리, 소위 문화 상품이라 불리는 총체가 이 법에 전적으로 순응하고 있었다. 그 이후로 가끔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은 그들의 잘못이었다. - P47

이들이 갖는 수치심과 오만함은 같은 성격이어서 같은 환멸, 같은 분노를 내포하고 있었다. 온종일 사방에서 슬로건, 포스터, 네온사인, 불 밝힌 진열장이 그들의 머릿속에 자신들이 늘 사다리의 아래에 있다고, 언제나 사다리의 너무 낮은 곳에 있다고 세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잘 깨닫고 있었다. 한술 더 떠, 가장 나쁜 몫이 아닌 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P47

그들의 어린 시절 기억은 엇비슷했다. 그들이 앞으로 가게 될 길이 닮아 있는 것처럼. 집안 배경 없이 더디게 일어서는 것이나 자신들이 선택한 미래가 비슷한 것처럼. - P48

그들은 한창때였다. 편안했다. 그들은 어수룩하지 않았다. 스스로 그렇게 말하곤 했다. 거리를 둘 줄 알았다. 여유가 있었고, 아니 적어도 그러려고 했다. 그들은 유머가 있었다. 영리했다. - P48

그들은 자유에 탐닉했다. 세상 전체가 손안에 있는 듯했다. 그들이 느끼는 갈증의 리듬에 충실했고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열정은 끝이 없었다. 밤새도록 걷고, 달음질치고, 춤추며, 노래할 수도 있었다. - P51

그들은 극단적인 결심을 했다. 담배를 끊겠다든가 술을 다시는 입에 대지 않겠다, 또는 돈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식의 결심이었다. 자신들의 존재가 무의미하고 어리석게 느껴졌다. 이 잊지 못할 취기 어린 날의 기억에는 무엇인가 아련한 알 수 없는 흥분과 모호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마치 한잔하러 간 일이 근본적인 몰이해와 끈질기게 따라붙는 분노, 도저히 떨쳐 낼 수 없을 듯한 단단한 모순을 자극하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 P51

어떻게 보면, 그들은 요리하는 것은 거부하고 눈에 띄는 화려함만을 숭배했다. 그들은 시각적인 화려함과 풍성함을 좋아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기껏 형편없는 요리를 선보이는 것을 거부했다. 말하자면, 그들이 거부하는 세계는 프라이팬과 냄비, 식칼, 중국 요리, 화덕의 세계였다. - P53

오랫동안 고대해 온 영화들, 감탄을 자아내는 작품이라 평이 나 있는 영화들, 마침내 이런 영화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상영 첫날 만원인 관객들 틈에서 만났다. 스크린에 불이 밝혀지고 기분 좋은 전율을 느꼈다. 하지만 컬러는 바랬고, 화면은 끊겼으며, 여주인공들은 보기 싫을 정도로 늙어 있었다. 그들은 나왔다. 슬펐다. 상상하던 영화가 아니었다. 그들 각자가 상상하던 완전한 영화가 아니었다. 영원히 싫증을 내지 않으리라 생각하던 완벽한 영화가 아니었다. 그들이 만들고 싶어하던 그 영화. 아니, 더 은밀히,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하던 그 영화가 아니었다. - P55

그들은 다른 사람보다 유리한 신호들을 더 잘 알아채고, 때로 조장할 줄도 아는 것 같았다. 귀와 손가락, 혀가 마치 매복 상태로 조만간 촉발될 이 달콤한 순간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평온함과 영원함의 감정에 몸을 맡기고 있을 때는 어떤 긴장도 끼어들지 못했다. 모든 것이 조화로웠다. 모든 것이 감미롭게 천천히 흘러갔다. 강렬한 기쁨이 일시적이고 불안 정한 것들을 고양시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조화로운 상태가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사소한 불협화음, 대수롭지 않은 주저의 순간들, 무례한 태도만으로도 그들의 행복은 무너져 내렸다.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일종의 계약, 그들이 대가를 지불했던 무엇, 불안정하고 딱한 무엇인가, 잠깐의 행복한 순간이 사라지면서 그들은 더 위험하고 더 불확실해 보이는 일상과 삶으로 내동댕이쳐졌다. - P59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도 가장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그러함을 아는 것은 아무 소용 없었다. 그것이 그들의 처지였다. 일과 자유의 대립 관계를 엄격히 따지던 시기는 지난 지 오래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무엇보다 직장을 선택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 P62

일단 돈을 벌겠다고 선택한 사람들, 부자가 되고 난 이후로 자신들의 진짜 계획을 미뤄둔 사람들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누리기만을 원하는 사람들, 삶이란 최대한의 자유로서 행복의 추구와 욕망, 본능의 절대적 충족, 세상의 무한한 부를 당장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제롬과 실비는 이런 종류의 거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이런 이들은 늘 불행하다. 사실 이런 딜레마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령 너무 가난해서 조금 더 잘 먹고, 조금 나은 집에 살면서 조금 적게 일하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거나, 혹은 처음부터 아주 부자여서 이런 괴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 같은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는 사람들이 점점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게 되어가고 있다. 누구나 부를 꿈꾸고 부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여기서 불행이 시작된다. - P63

자신들이 가장 불행한 것은 아니라고 자위했다. 아마 옳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타인의 불행을 지워버림으로써 본인의 불행을 확대해 보여 주기 마련이다. 그들은 별 볼 일 없었다. 겨우 벌고, 프리랜서로 일하며 뜬구름 잡는 축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의미에서 세월이 그들 편인 것은 사실이었다. 감정을 자극하는 이미지의 세상이 온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보잘것없는 위안이었다. - P65

그들 사이에 돈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벽이었다. 매번 부딪히게 되는 일종의 범퍼 같았다. 가난보다 더 끔찍한 것은 궁색함, 옹졸함, 얄팍함이었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기적이나 사상누각에 세운 어리석은 꿈 외에 다른 출구가 없어 보였다. 미래 없는 꽉 막힌 삶으로 암울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었다. 질식할 것 같았다. 침몰하는 느낌이었다. - P67

사회의 서열 관계를 중오하기로 작정했다. 기적으로라도 해결책은 세상이나 역사로부터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롤러 코스터 같은 삶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그들의 기질에 맞는 것이기도 했다. 불완전한 세계에서 그들의 삶이 가장 불완전한 것은 아니라고 쉽게 넘겨 버렸다. - P69

변한 것이 있다면, 전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너무나 모호한 것이었다. 그들의 남다른 삶의 방식, 몽상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들은 지쳤다. 그들은 늙었다, 그랬다. 어떤 때는 자신들이 인생을 채 시작하지도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그들의 삶이 위태롭고 덧없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치 채워지지 않은 욕망, 불완전한 기쁨, 잃어버린 시간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기다림과 궁색함, 편협함이 자신들을 마모시켜 무력하게 만들었다고 느꼈다. - P78

가끔은 모든 것이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고 계속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냥 흘러가게 놔두면 될 일이었다. 삶이 그들을 달래줄 것이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변화도 없고 그들을 구속하는 법도 없이, 인생은 계속될 것이다. 낮과 밤이 조화롭게 이어지는 가운데, 거의 미미한 변화만 있을 뿐, 같은 주제가 끝없이 되풀이되며 행복이 계속될 것이다. 어떤 동요, 비극적인 사건이나 예기치 못한 사건도 흔들어놓지 못할 영원한 감미로움을 맛볼 것이다. - P78

적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 안에 있었다. 그들을 타락시키고, 부패시켰으며 황폐화시켰다. 그들은 속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조롱하는 세상의 충실하고 고분고분한 소시민이었다. 기껏해야 부스러기밖에 얻지 못할 과자에 완전히 빠져 있는 꼴이었다. - P79

그들은 떠났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만원인 지하철, 짧기만 한 저녁, 치통처럼 따라붙는 통증과 불확실성의 지옥에서 빠져나온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그들의 삶은 팽팽한 줄 위에서 끊임없이 춤춰야 하는 꼴에 지나지 않았고, 미래는 꽉 막혀 있었다. 극심한 공허감, 기댈 곳도 없으면서 끝을 모르는 비참한 욕망에 시달렸다. 그들은 소진된 느낌이었다. 은둔하기 위해, 잊기 위해, 자신들을 달래기 위해 떠났다. - P106

이렇게 한 주 한 주가 흘러갔다. 거의 기계적으로 이어졌다. 4주가 한 달을 만들었다. 달들은 대부분이 엇비슷했다. 낮이 짧아지는가 싶더니 점점 길어져 갔다. 겨울은 축축하고 추웠다. 그들의 인생이 흘러갔다. - P114

그들의 고독은 절대적이었다. - P115

그들은 이 세상을 박탈당했다. 세상에 몸담고 있지 않았다. 세상에 속하지도 않고, 앞으로도 속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그리고 영원히 계속될 엄격한 규율이 그들을 배척하는 듯했다. 어디든 가고 싶은대로 갈 수 있었지만, 아무도 그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아무 말도 걸지 않았다. 그들은 영원히 낯선 사람, 이방인으로 남으리라. - P116

기쁨도 슬픔도 심지어 권태도 느끼지 않았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인지, 과연 실제로 살고 있는 것인지 자문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 실망스러운 질문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만족도 얻지 못했지만, 이따금 혼란스럽고 모호하게나마 이곳에 서의 삶이 분수에 맞고, 심지어 역설적이게도 이런 삶이 그들에게 필요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 P118

그들의 삶은 마치 고요한 권태처럼 아주 길어진 습관 같았다. 아무것도 없지 않은 삶. - P119

예전에, 이 예전이라는 것이 세월에 따라 하루하루 후퇴하는 시간이어서 마치 그들의 이전 삶이 전설이나, 비현실 혹은 모호함 속으로 파묻히는 것 같았다. 예전에 그들은 적어도 무언가를 소유하고 싶은 광기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이런 강렬한 욕구가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기도 했다. 앞쪽으로 팽팽히 당겨진 듯한 조급하고 욕망에 사로잡힌 느낌으로 살았다. - P126

그리고? 무엇을 했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무엇인가, 아주 천천히 파고드는 조용한 비극과 같은 것이 그들의 느려진 삶 한가운데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래된 꿈의 파편 가운데, 형태 잃은 잔해 가운데 그들은 방향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 P126

"만일 우리가 돌아간다면···." 누군가 말을 꺼낼 것이다.
"모든 게 예전으로 돌아가겠지···." 다른 한 명이 답할 것이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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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맨 위에 이런 단어가 보인다.
나의 사랑하는—
애그니스는 불에 덴 듯 뒤로 물러서려다가, 다음 줄을 본다.
애그니스
더는 아무 말도 없다. 단 세 마디, 그리고 빈 공간.
그는 무어라 쓰려 했을까? 애그니스는 그가 기회가 있었다면 무슨 말을 썼을지 알아내려는 듯 종이의 빈자리에 손가락을 갖다댄다. 종이의 결, 햇살에 따뜻해진 나무탁자의 온기가 느껴진다. 자기 이름을 이루는 글자들을 엄지로 훑으며 그의 깃펜이 만든 미세한 자국을 느낀다. - P473

사방에서 몸과 팔꿈치와 팔이 밀쳐댄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문으로 들어온다. 일층에 있는 사람이 위쪽 발코니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하며 소리친다. 사람이 점점 밀집하고 이쪽저쪽으로 파도처럼 떠밀린다. 애그니스는 뒤쪽으로 또 앞쪽으로 밀리면서 버틴다. 흐름에 저항하지 않고 흐름을 따라 움직이는 게 요령인 듯싶다. 마치 강 위에 서 있는 것하고 비슷하다. 물살에 맞서지 말고 몸을 맡겨야 한다. - P481

이곳에 있고 또 연극이 시작되고 나니, 여행하는 동안 그리고 그의 방 안에 서 있는 동안 느꼈던, 마치 현실에서 분리된 것 같은 낯선 느낌이 검댕이 씻기듯 사라진다. 애그니스는 속으로 벼르며 분노를 도스른다. 해봐,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어떻게 했는지 보여봐. - P484

애그니스는 납득이 안 된다. 남편이 왜 이런 짓을 한 걸까? 왜 그 이름이 자기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척, 그냥 단순한 글자의 조합인 척하는 건가? 어떻게 그 이름을 훔쳐 거기 담긴 것을 벗겨내고 뜯어내고 그 이름이 지녔던 삶을 저버릴 수 있는가? 어떻게 펜을 들어 그 이름을 종이에 써서 아들과의 연관을 끊어 버릴 수 있는가? 말이 안 된다. 이 사실이 가슴을 찌르고, 뱃속을 도려내고, 애그니스를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로부터, 그들이 공유했던 모든 것으로부터, 그들의 존재 자체로부터 끊어내는 듯하다. 애그니스는 다리에서 보았던 불쌍한 머리, 이를 드러내고 목이 잘려 공포로 얼어붙은 얼굴을 떠올리며 자기가 그중 하나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떨리는 강물, 몸 없이 흔들리는 머리, 소리 없고 소용없는 후회를 느낀다. - P488

남편은 세상 모든 아버지가 하고 싶어 할 일을 했다. 아이의 고통을 자기가 지고, 아이와 자리를 바꾸고, 아이 대신 자신을 내주어 아이를 살리려 한 것이다. - P492

유령이 무대에서 나가려다가 애그니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는 애그니스를 똑바로 보고, 시선을 맞추고, 마지막 대사를 한다.
나를 잊지 마. - P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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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길 너머 부엉이가 앉아 있던 자리에서 날아올라 찬 밤바람에 몸을 맡긴다. 날개로 조용히 바람을 받으며 눈을 또렷이 뜬다. 부엉이의 눈으로 보면 이곳 타운은 줄줄이 늘어선 지붕과 그 사이에 도랑처럼 흐르는 거리로 이루어진 곳, 방향을 읽어야 하는 곳이다. 부엉이는 날아가며 무성한 나뭇잎을 덮어쓴 나무, 타도록 내버려둔 불에서 흘러나오는 한줄기 연기를 본다. 길을 건너가는 여우를 본다. 설치류, 아마도 쥐가 마당을 가로질러 구덩이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다. 선술집 문간에서 잠든 남자가 벼룩에 물린 정강이를 긁는 것을 본다. 어떤 집 뒷마당의 우리 안에 있는 토끼들을 본다. - P455

조운은 영원한 불만을 친구로 삼았으니까. 조운은 지금 어떻게 애그니스를 무너뜨리려는 것일까? 어떤 정보를 칼처럼 휘둘러 이 집. 이 방, 애그니스와 딸들이 그토록 막대하고 강력한 부재를 안고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애쓰는 이 공간을 베려고 하는 것일까? 조운이 무얼 알기에? - P461

애그니스는 이게 무슨 의미인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아들의 이름이 런던의 연극 전단에 있나? 뭔가 기이하고 희한한 착오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 아이는 죽었다. 이 이름은 아들의 이름이고 아이는 죽은 지 사 년이 좀 못 되었다. 그 애는 아이였고 이제는 어른이 되었을 테지만 죽고 말았다. 그 애는 그애일 뿐, 연극이 아니고, 종이 한 장도 아니고, 입에 올리고 연기하고 전시할 무언가도 아니다. 그 애는 죽었다. 남편도 알고, 조운도 안다. 애그니스는 이해할 수가 없다. - P463

밤이 되자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삼끈을 엮어 만든 거칠거칠한 벌집 사이에 앉는다. 벌집 안에서 새벽 동튼 직후에 시작되는 웅웅거리는 소리가 애그니스에게는 가장 유려하고 명료하고 완벽한 언어처럼 느껴진다. - P464

주디스는 물이 맺힌 유리창에 손가락을 갖다댄다. 엄지 하나 만으로 어찌나 쉽게 두 사람의 모습이 지워지는지. - P467

세 여자가 구름이 달을 둘러싸듯 그를 둘러싸고는 반대하고 질문하고 부탁하는 말들을 쏟아붓지만, 바살러뮤는 빠져나와 문 쪽으로 걸어간다. - P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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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애그니스가 생각한 죽음의 개념은, 드넓은 황무지 한가운데 불이 켜진 작은 방의 모습으로 떠올랐다. 산 사람들은 방안에서 산다. 죽은 사람들은 건물 밖에 모여들어 손바닥과 얼굴과 손끝을 창문에 대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자기 식구들한테 가닿으려고 절박하게 매달린다. 방안에 있는 이들 가운데, 바깥에 있는 이의 모습을 보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 벽을 통해 얘기를 나누는 사람도 있다. 대부분은 그러지 못 한다. - P326

애그니스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이다. 절대로. 이 아이의 배를 채우고, 이 아이들을 생명으로 채울 것이다. 밖으로 나가는 문과 아이들 사이에 서서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길을 막을 것이다. 이 세상 너머에 있는 모든 것에 맞서 세 아이를 지킬 것이다. 애그니스는 아이들이 안전하다는 걸 알기까지 쉬지도 자지도 않을 것이다. 밀어내고 맞서 싸우고, 살아남은 아이가 둘뿐이라는 오래된 예감을 지워버릴 것이다. 그렇게 하고 말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걸 안다. - P327

애그니스는 너무 지쳐 정신이 없는데도, 그의 손을 잡아보지 않았는데도, 그가 찾아냈으며 그 안에 들어갔으며 그걸 살고 있다는 걸 안다. 그가 살려고 했던 삶, 그가 하려고 했던 일을. 애그니스는 침대에 누워 그가 그렇게나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슴을 넓게 펴고, 걱정과 좌절이 씻겨나간 얼굴로 서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만족감의 냄새를 들이마시며 웃음을 짓는다. - P329

아직도 손을 입에 댄 채 애그니스는 딸을 내려다본다. 온갖 아픈 사람, 앓는 사람, 회복하는 사람, 꾀병을 부리는 사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 미친 사람을 돌보아온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얼마 안 남았어. 그러나 애그니스의 다른 부분은, 이 아이를 젖 먹이고 돌보고 보살피고 쓰다듬고 먹이고 입히고 끌어안고 입 맞췄던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그럴 순 없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제발, 이 아이만은. - P335

어떻게 해도 차도가 없었다. 어떤 것도 햄닛을 낫게 할 수 없었다. 애그니스는 구멍난 양동이에서 물이 새듯 희망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걸 느낀다. 애그니스는 바보, 천치, 최악의 멍청이다. 내내 주디스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햄닛을 뺏기게 될 모양이었다. 운명이 어떻게 이처럼 잔인한 함정을 놓을 수가 있나? 엉뚱한 아이에게 집중하게 해놓고, 한눈을 파는 사이에 손을 뻗어 다른 아이를 잡아채다니? - P339

애그니스는 자기 약초밭, 가루와 물약, 잎, 용액이 가득한 선반을 떠올린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화가 치솟는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수년 동안 돌보고 김매고 다듬고 따 모은 약초. 밖에 나가 죄다 뿌리째 뽑아 불에 던지고 싶다. 애그니스는 등신, 무능하고 교만한 등신이다. 약초 따위로 이것에 맞서겠다는 생각을 하다니. - P339

아들의 몸은 고통의 장소에, 지옥에 가 있다. 뒤틀리고 꼬이고 휘어지고 당겨진다. 애그니스는 들썩이지 말라고 아이의 어깨와 가슴을 붙잡는다. 달리 더 할 일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아이의 옆에 앉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고 애쓸 뿐. 이 병은 너무 엄청나고 너무 강력하고 너무 사악하다. 너무 강한 적이다. 아들에게 촉수를 뻗어 휘감고 조이며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사향냄새, 축축하고 짭짤한 냄새를 풍긴다. 그것이 아주 먼 곳에서, 부패하고 눅눅하고 답답한 곳에서 왔으리라고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인간과 짐승과 벌레를 거쳐가며 엄청나게 먼 길을 왔으리라고. 고통과 불행과 슬픔을 먹으면서. 그럼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멈출 줄 모르는 최악의 극악한 악이다. - P339

그러나 햄닛의 정신은 다른 곳에 가 있다. 한참 전부터 어머니나 누이들, 고모와 할머니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식구들이 주위 에서 약을 주고 말을 걸고 몸을 쓰다듬는 것은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다른 곳에, 자기도 모르는 장소에 와 있다. 이곳은 차고 고요하다. 혼자다. 눈이 부드럽게 하염없이 쉬지 않고 내린다. 땅 위에 쌓이고 오솔길과 계단과 바위를 덮는다. 나뭇가지를 짓누른다. 모든 것을 희고 텅 비고 정체된 상태로 만든다. 적막, 차가움, 낯선 은빛이 그에게 위안보다 더 큰 무엇을 준다. 햄닛은 이 눈 위에 누워 쉬고 싶은 생각뿐이다. 다리는 지치고 팔은 쑤신다. 드러누워 굴복하고 이 반짝이는 두툼한 흰 담요에 몸을 뻗고 싶다. 얼마나 편안할까. 그런데 무언가가 누우면 안 된다고, 그 욕망에 굴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게 뭐지? 왜 쉬면 안 된다는 거지? - P341

죽음을 두고 ‘떠나갔다‘느니 ‘평화로웠다‘느니 하는 사람은 그걸 본 적이 없는 거라고 일라이자는 생각한다. 죽음은 폭력이고, 죽음은 투쟁이다. 담쟁이가 벽에 매달리듯 몸이 삶에 매달려 놓지 않으려고 끝까지 붙들고 싸운다. - P341

애그니스의 머릿속에서 생각이 뻗어나갔다가 다시 모인다. 뻗어나갔다가 모이고, 다시 또다시.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어, 그럴 순 없어, 우린 어떻게 살지, 어떻게 하지. 주디스가 이 일을 어떻게 견디지,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지, 어떻게 계속 살 수 있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남편은 어디 있나. 그가 뭐라고 할까,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살릴 수 있었을까, 왜 못 살렸을까, 왜 얘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그러다가. 초점이 좁아지고,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내 애가 죽었어, 내 애가 죽었어, 내 애가 죽었어. - P352

애그니스는 문을 등지고 벽난로 쪽을 보고 있다. 벽난로 안에는 통나무였던 때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지만 건드리면 풀썩 무너져내릴 재만 가득하다. - P354

애그니스가 직접 눈꺼풀을 닫았다. 자기 손으로, 자기 손가락으로. 손가락이 어찌나 뜨겁고 미끄럽던지, 그 일이 어찌나 힘 겹게 느껴지던지, 누가 손에 목탄을 쥐여주면 기억만으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잘 아는 그 몹시 사랑스러운 눈꺼풀에 축축하고 떨리는 손가락을 대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죽은 자식의 눈을 감긴다는 게 가능한가? 동전 두 개를 찾아 와서 안구에 얹고 눈꺼풀을 누른다는 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지? 옳지 않다. 그럴 수는 없다. - P355

봐, 애그니스는 햄닛에게 말한다. 타고난 건 바꿀 수가 없어. 주어진 걸 되돌리거나 고칠 수는 없어.
아이는 대답이 없다. - P360

두 여자가 잠시 마주보다가, 메리가 접힌 천을 들어 두 손으로 모퉁이를 잡는다. 천이 꽃잎을 활짝 벌리는 거대한 꽃처럼 펼쳐 진다. 소스라칠 정도로 텅 비고 하얗고 넓은 공간이 눈앞에 펼쳐 진다. 어두운 방안에서 별빛처럼, 외면할 수 없게 빛난다. - P362

애그니스는 아들을 본다. 새장 같은 갈빗대, 맞잡은 손가락, 동그란 무릎뼈, 고요한 얼굴. 옥수수색 머리카락은 이제 물기가 말라 늘 그렇듯 이마에서 솟아 있다. 햄닛은 주디스와 달리 존재감이 늘 뚜렷하고 강했다. 햄닛이 방에 들어오거나 나가면 늘 알 수 있었다. 확고한 발소리, 공기의 움직임, 의자에 털썩 앉을 때의 중량감. 그런데 이 몸을 놓아주어야 한다. 흙에 내어주고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한다. - P363

애그니스는 자기 아이의 고통만은 참을 수가 없다고 느낀다. 이별, 질병, 충격, 출산, 궁핍, 굶주림, 부당함, 고립, 그 어떤 것도 참을 수 있으나 이것만은 견딜 수가 없다. 내 아이가, 죽은 쌍둥이 남매를 보고 있는 것. 내 아이가 오라비를 잃고 우는 것. 내 아이가 슬픔에 시달리는 것. - P366

애그니스는 무덤을 생각하면 마치 말이 웅덩이를 피하듯 뒤로 물러서게 된다. 햄닛을 데리고 교회로 가는 광경은 미리 생각해 볼 수 있다. 바살러뮤나 아니면 길버트나 존이 들고 가겠지. 사제가 망자를 축복하는 광경도 그려볼 수 있다. 그렇지만 땅속 어두운 구덩이로 아이의 몸을 내리고 다시 보지 못하게 되는 것만은 생각할 수가 없다. 상상이 불가능하다. 아이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할 수는 없다. - P367

애그니스는 묘지로 가는 길이 너무 길고도 너무 짧다고 느낀다. 그들을 뚫어지게 보고 훑어보는 사람들의 눈길, 수의에 싸인 아들의 몸을 머릿속에 각인하며 아들의 본모습을 잊어버릴 눈길 들을 견딜 수가 없다. 날마다 아이가 문 앞을, 창문 아래를 지나가는 걸 보았던 사람들이다. 아이와 말을 나누고, 머리를 쓰다듬고, 학교 종이 칠 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면 서두르라고 말하던 사람들이다. 아이는 그 집 아이들과 같이 놀고 이 집 저 집 이 가게 저 가게를 들락거렸다. 아이는 전갈을 전해주고, 개를 쓰다듬고, 볕이 잘 드는 창턱에서 자는 고양이 등을 어루만졌다. 그들의 삶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개는 불가에서 하품을 하고 아이들은 밥 달라고 조르는데, 햄닛은 이제 여기에 없다. - P371

무덤은 충격적이다. 거대한 발톱으로 땅을 무심하게 할퀴어놓은 것처럼 깊고 어두운 상처다. 묘지 안쪽 깊은 곳에 있다. 바로 그 너머에서 강이 서서히 완만하게 구부러지며 다른 방향으로 물을 몰고 간다. 오늘은 물이 불투명하다. 밧줄처럼 땋은 무늬를 만들며 앞으로 나아간다. - P372

묘지에서 나가는 일이 들어오는 일보다 더 힘들다. 너무 많은 무덤을 지나쳐야 하고, 너무 많은 슬프고 성난 유령이 애그니스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기며 차가운 손가락으로 건드리고 애처롭고 끈질기게 매달리며 말한다. 가지 마, 기다려, 우릴 두고 가지 마. 애그니스는 치맛단을 잡아당기고 손을 말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곳에 세 아이와 함께 왔는데 둘만 데리고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원래 한 아이를 여기 두고 가려고 온 거잖아, 애그니스는 자신을 다독여보지만, 정말 그럴 수 있는 건가? 울부짖는 영혼과 비늘잎을 뚝뚝 떨구는 주목과 차가운 손이 가득한 이곳에? - P373

애그니스의 속은 텅 비었다. 겉은 불분명하고 실체가 없다. 애그니스는 나뭇잎에 부딪힌 빗방울처럼 흩어지고 분해될 것 같다. 이곳을 떠날 수가 없다. 이 문을 지나갈 수가 없다. 여기에 아이를 두고 갈 수는 없다. - P374

참을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이. 결핍의 거미줄에 걸린 듯한 기분이다. 어느 쪽으로 몸을 돌리든 거미줄과 촉수가 몸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는 이곳 이 마을 이 집에 돌아와 있고. 이 모든 것이 그를 다시는 달아나지 못하게 만들 것 같아 두렵다. 이 슬픔, 이 상실이 그를 여기에 붙들어놓고 런던에서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무너뜨릴까봐. - P380

때로는 극장이란 곳이 아버지가 만드는 장갑의 자수하고 몹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면은 아주 일부분이고, 그 뒷면에는 무수한 수고와 기술과 좌절과 땀이 얽혀 있다. - P381

그는 좁디좁은 하숙방이 실제로 그립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부르지도 않고 안부를 묻거나 말을 걸거나 성가시게 하지 않는 곳. 침대 하나, 궤 하나, 책상 하나만 달랑 있는 곳. 그곳 말고는 세상에 소음과 법석과 사람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없다. 그곳에서는 세상이 저멀리 밀려가고, 자의식도 사라지고, 그래서 그저 잉크를 묻힌 깃펜을 쥔 손이 되어 펜 끝에서 단어가 흘러나오는 걸 지켜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이 하나하나씩 나오면 자신마저 잊고 너무나 압도적이고 너무나 편안하고 너무나 은밀하고 너무나 즐거운, 다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평화에 잠긴다. - P381

그는 그걸 포기할 수 없다. 여기에, 이 집에, 이 타운에, 장갑 사업 언저리에 머물 수 없다. 그게 아내를 위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이러다 영원히 스트랫퍼드에 붙들릴 수도 있다는 걸 안다. 다리가 달리고 쇠덫 같은 턱이 있는 짐승 같은 곳, 옆집에 아버지가 있고, 교회 묘지 뗏장 아래서 아들이 차갑게 썩어가는 이곳에. - P382

"상관없어." 꿀꿀거리며 밥을 먹는 돼지 옆에서 남편과 몸실 랑이를 하던 애그니스가 헐떡인다. "알아. 당신이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그곳에 낚였다는 거."
"어디? 런던 말이야?"
"아니, 머릿속에 있는 장소. 아주 오래전에 한 번 본 적 있어. 그 드넓은 세상, 풍경을, 당신은 거기로 갔고 이제 당신한테는 그곳이 다른 어디보다 더 생생한 곳이지. 그래서 무엇도 당신을 막을 수가 없어. 당신 자식의 죽음조차도. 알겠어." 애그니스가 말한다. 그는 한 손으로 애그니스의 양 손목을 한데 잡고 다른 손을 발치에 놓인 가방으로 뻗는다.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 - P386

그들은 그렇게, 함께, 하나가 되어 잠시 서 있는다. 애그니스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속절없이 끌리는 걸 느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밧줄이 애그니스의 심장을 빙빙 감아 그의 심장에 묶어놓은 것처럼. 우리 아들은 우리 두 사람으로 이루어졌어,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둘이 함께 아이를 만들었고, 둘이 함께 아이를 묻었다. 아이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애그니스는 한편으로 실을 감듯 시간을 되돌려 감고 싶다. 물레바퀴를 반대로 돌려 햄닛의 죽음, 유년기, 유아기, 출생의 타래를 되감아 자신과 남편이 그 침대에서 한몸이 되어 쌍둥이를 만들었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 전부 풀어헤쳐 원래 양의 상태로 되돌리고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낸 다음, 일어서서 별을, 하늘을, 달을 올려다보며 햄닛의 앞날을 바꿔달라고, 다른 결과를 만들어달라고, 제발, 제발, 호소하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하늘이 원하는 무엇이든 할 것이고, 무엇이든 내어줄 것이고, 무엇이든 포기할 것이다. - P388

돌아갈 길은 없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무를 수는 없다. 아들은 떠났고 남편은 떠날 것이고 애그니스는 남을 것이고 돼지는 날마다 먹이를 주어야 하고 시간은 한방향으로만 흐른다. - P389

셔츠에 얼굴을 묻는다. 바지를 가슴에 꼭 안는다. 신발 안에 손을 넣어 아이 발의 텅 빈 모양을 느낀다. 옷깃을 여미는 끈을 묶었다 끄른다. 단추를 채웠다 다시 푼다. 옷을 개었다가 펼쳤다가 다시 갠다. - P390

주디스는 자기 자신에게, 고양이들에게, 머리 위 골풀 지붕에 노래를 부른다. 라라–라라–라–라–라, 음을 이어가며 계속 불러 소리가 마음속의 빈 곳을 찾게 한다. 노래가 그 자리를 찾아 쏟아져들어가 안을 채우고 또 채우지만, 물론 아무 형체도 한계도 없는 그 공간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 P399

다른 여자가 자기 아들은 장작을 영 마음에 안 드는 방식으로 쌓는다고, 딸이 청혼을 거부했다고, 그러니 이 애들을 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한다.
바보들, 애그니스는 생각한다. 어리석은 사람들. 애그니스는 새어머니로부터 약간 거리를 두고 선다. 고개를 숙이고 벌집의 반복되는 무늬를 쳐다본다. 벌 크기로 줄어들어 그 사이로 들어 가고 싶다. - P400

애그니스는 이런 곳들에서 기다린다. 귀를 세우고 다른 더 시끄러운 존재의 소리와 요구와 불평을 가려내보지만 아이의 소리만은, 유일하게 듣고 싶은 소리만은 들리지 않는다. 아무것도 없다. 침묵뿐. - P403

주디스는 그러나 바닥을 쓰는 빗자루 소리에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담 너머에 내려앉는 새의 날갯짓에서 본다. 조랑말의 흔들리는 갈기에서, 유리창을 두들기는 우박에서, 굴뚝 아래로 팔을 뻗는 바람에서, 은신처 지붕의 골풀이 바스락거리는 것에서 느낀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마음에 간직한다. 눈을 감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한다. 네가 보여, 소리가 들려, 어디에 있니? - P403

딸들이 할머니를 배웅한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반짝이는 새 같다. 날개를 펼치고 방을 한 바퀴 돌아 저 밖 하늘로 날아가는 새들. - P406

아이들, 이 아가씨들이 어떻게 애그니스에게서 나왔을까? 이 애들이 한때 애그니스가 젖을 먹이고 어르고 씻겼던 작은 존재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애그니스에게 삶은 점점 낯설고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되어간다. - P407

런던에서 바쁜 삶의 중심에 있기만 하면 어떤 것도 그를 건드릴 수 없다. 여기, 이 배 안, 이 도시, 이 삶 속에 있는 동안에는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이 예전 그대로 고스란히 변함없이 존재하리라고, 침대에 세 아이가 잠들어 있으리라고 믿을 수도 있을 것 같다. - P411

죽는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피할 수 없는 뭔가가 다가오는 느낌? 이런 생각이 느닷없이 머리에 떠오르더니 포도주 한 방울이 물에 떨어진 것처럼 생각에 진한 물을 들인다. - P412

수재나는 할머니가 슬퍼하는 것도 적당히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걸 안다. 슬픔을 다지려고 애써야 하는 때가 있다고. 너무 과한 사람이 있다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 P413

수재나는 한 손으로 천을, 다른 손으로 바늘을 꽉 쥔다. 똑같은 크기의 바늘땀을 계속 만들어갈 수만 있다면, 이것도 다 지나갈 거라고 생각한다. - P414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커진다. 침묵이 부풀어올라 둘을 감싼다. 형체와 모양과 촉수가 생기고 공중에서 끊어진 거미줄이 흩날리듯 흔들린다. 그의 몸안으로 숨이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게, 그가 팔짱을 끼고 팔꿈치를 긁고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게 느껴진다. - P422

"일 년은 아무것도 아니야." 애그니스가 땅에 떨어진 캐모마일 꽃송이를 주우며 말한다. "한 시간이나 하루나 마찬가지야. 평생 그 아이를 찾아야 할 수도 있어. 나는 그만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 P425

"뭘 찾았어?" 그가 묻는다.
"아무것도." 애그니스가 답한다. "당신 심장."
"그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가 화난 척하며 말한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어떻게 그런 말을?"
애그니스는 희미하게 웃음을 짓는다. 그가 애그니스의 손을 확 당겨 자기 가슴에 갖다댄다.
"이건 당신 심장이야." 그가 말한다. "내 것이 아니라." - P427

애그니스는 자기가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이다. 몸이 분리되고 녹아내려 이게 누구 살인지 누구 다리인지 입안에 들어온 게 누구 머리카락인지 누구의 숨이 누구의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된다. - P429

"그 애는 여기 없어." 애그니스가 드디어 입을 연다. 등을 쓸던 그의 손이 멈춘다. 애그니스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애써 억누르지만 말 사이사이로 고통이 새어나온다. "사방을 찾아봤어. 기다렸어. 지켜봤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기엔 없어." - P433

"조운은 절대 만족할 수가 없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이 만족하는 것도 못 견뎌. 다른 사람도 자기만큼 불행해야 기분이 좋지. 영원한 불만을 친구로 삼았으니까. 그러니 뭐가 널 행복하게 만드는지를 감춰. 그 반대의 것을 원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그러면 전부 네가 원하는 대로 될 거야. 두고 봐." - P438

애그니스는 그 생각에 푹 빠진다. 그 생각을 고이 싸서 보물처럼 마음에 간직해두었다가 혼자 있을 때, 거대한 집에서 밤에 돌아다닐 때 꺼내어 윤을 내고 감탄하며 들여다본다. - P442

주디스는 아버지가 머무는 동안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린다. 아버지가 새집을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면서 굴뚝과 상인방을 올려 다보고 문을 하나씩 열었다 닫는다. 아버지가 개라면 내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을 듯하다. 아버지는 아침 일찍 안마당에 나가 우물에서 첫 물을 떠서 마신다. 여기 물이 지금껏 마셔본 물 중에서 최고로 신선하고 달콤하다고 말한다. - P444

주디스는 어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주위에서 맴돈다. 어머니 가까이에 있으면 뭐가 보장되기에 그러는 건지, 수재나는 알 수 없다. 안전? 생존? 목적? - P447

타운에 한밤이 찾아온다. 깊고 검은 침묵이 거리에 내려앉고, 들리는 건 짝을 찾는 부엉이의 공허한 울음소리뿐이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들어갈 곳을 찾는 강도처럼 집요하게 거리를 훑는다. 나무 꼭대기를 건드리고 이쪽저쪽으로 휘어박는다. 교회 종 안에서 바르르 떨며 놋쇠를 울려 나지막한 음을 낸다. 교회 근처 지붕 꼭대기에 앉은 외로운 부엉이의 깃털을 흩뜨린다. 바람이 몇 집 건너에 있는 집의 느슨한 여닫이창을 흔들자 안에서 자는 사람들은 침대에서 뒤척이고, 덜덜 떨리는 뼈와 다가오는 발걸 음과 말발굽 소리가 나오는 꿈을 꾼다. - P450

이곳 땅은 한때 습지였다. 축축하고 물이 많고 반은 강이고 반은 땅인 곳이었다. 집을 지으려고 사람들이 물을 빼고 바다 위의 배처럼 건물을 떠받칠 골풀과 가지를 땅에 덮었다. 축축한 날이면 집은 기억한다. 오래된 부름에 이끌리듯 아래쪽으로 기운다. 징두리가 삐걱거리고 굴뚝이 갈라지고 문틀이 느슨해지고 터진다. 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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