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요. 노끈 이 쪽을 좀 잡아 주세요. 그럼 우리 사이가 이어졌죠. 이 전엔 난 나고 당신은 당신이었는데, 이 노끈으로 우린 연결되어서 ‘나와 당신‘이 된 거죠.
지금 당신과 내가 각기 반대편으로 뛰어가면 당신은 날 끌어당기게 되고 난 또 당신을! 한 줄에 매인 메뚜기처럼, 아무도 도망갈 수가 없어요. 또는 마치 부부처럼. (잠시 멈춘다) 하지만, 이 비유는 별로 좋지 않군. - P11

노끈 한쪽 끝을 다 내게 줘 봐요. 한쪽 끝은 당신들이 잡고 있고, 그럼 난 여러분들과 각기 다른 관계를 갖게 되죠. 느슨한 관계, 팽팽한 관계, 먼 관계, 가까운 관계, 그리고 여러분도 각기 내게 영향을 주겠지. 우린 각자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서로를 당기고 있는 셈이지. (멈춘다) 마치 거미줄에 걸린 파리처럼. (멈춘다) 또 거미처럼. (멈춘다) - P12

이 노끈이 마치 우리 손 같아. (그가 손을 놓자 상대방도 손을 놓고, 노끈은 바닥에 떨어진다) 길게 빼고 있는 더듬이 같기도 하고. (그가 손을 놓자 상대방도 손을 놓는다) 또 우리의 언어 같기도 해. 안녕, 또는 안녕하세요 처럼. (또 한 노끈이 바닥에 떨어진다) 또 마치 우리의 눈길 같아. (또 노끈 하나를 대신 한다) 우리 생각까지 포함해서 (상대방을 등지고 서나 둘은 서로 교통하는 바가 있다) 당신이 그녀를 그리워하거나 아니면 그녀가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겠지. (그녀와 어깨를 스치며 지나친다. 그녀는 또 다른 사람과 마주보고 있다) 그 노끈 하나 하나가 무리들을 당기고 있지. - P13

(자기 얼굴에 종이를 붙이며)
이건 아주 공평해.
그래. 물론이야.
지면 벌을 달게 받아야지.
다들 벌로 종이 한 장씩 붙였어.
종이 안 붙인 사람이 도리어 이상한데? 겁나는 걸. - P32

다들 말하는 거 들었지? 그런데 왜 넌 스페이드가 아니라고 고집하는 거지? 겁이 나나? 너 쥐새끼 먹어봤어? 팔딱팔딱 뛰고 입안에서도 여전히 찍찍 울어대고, 긴 털도 없고 눈도 안 뜬, 마취시켜서 실험용으로 쓰는 쥐새끼 말이야?
먹어봤다면 감히 진실을 말하게 되지. 친구.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지. 말해봐. 스페이드야 아니야?

내 생각엔 그래도 허탕인 것 같아.

정말 재미없는 작자야. 다들 김빠지게 하잖아. 이런 자는 정말 싫어. 안 그래?

(술병을 돌려 사람마다 한 모금씩 마시며 한마디씩 한다) 싫어.
싫다고, 싫어. 싫어. 싫다니까. 싫다고. 싫어. 싫어. 싫다고······

(술병을 가져간다) 이렇게 보기 싫은 자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둘러싸며) 쫓아버려!
꺼지라고 해!
모두를 불안하게 한다니까.
정말 지겨워.
왜 우리들 술도 못 마시게 만들지?
혼을 내 줘! - P35

이 사람이 손해 보는 건 너무 우직해서지. 그래야 한다는 게 뭔가?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뿐이지 꼭 그래야 한다는 게 어쨌다는 거야?

그럼 왜 그래야 한다는 게 있어선 안 되지?

(화가 나서) 뭐가 꼭 그래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만 하는 거야?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곧장 사람을 떼어내서) 그래야 한다는 말을 하지 마!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지! - P36

너 거짓말할 줄 모르냐?

어머닌 거짓말 못하게 하세요.

넌 아직 어린애로구나. 어른치고 거짓말 못하는 사람 없지.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즐거운 나날을 보낼 수가 없거든. - P41

나랑 말하는 사람은 누구지?

네 그림자. 네가 낸 소리의 사상----

넌 죽어라 날 따라 다녀----

네가 네 자신을 읽어 버렸을 때----

날 일깨워주려고? 날 더 고통스럽게 해----

넌 그렇게 지쳐 빠져서까지 찾는 게 뭐야?

날 정신이 나게 하는군! 난 정말 잃어버렸어. 근데 어디서 찾아야할지 모르겠단 말야.

(아픈 곳을 찌른다) 찾으려는 게 무언지도 모를 걸?

그런 것 같아······ 다들 찾고 있지 않아? - P46

(또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도 꿈을 찾고 있소?

아니, 난 말 한 구절을 찾고 있어.

시를 짓고 있소?

누구나 시를 지을 수 있어. 누구나 사랑을 할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지.

그럼 당신은----

생각! 누구나 머리는 있지만, 누구나 다 생각이 있는 건 아니거든.

맞아. 당신이 찾고 있는 구절은 분명 멋진 경구겠군요.

그게 꼭 굉장한 경구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문제는 그 구절을 못 찾겠다는 거지. 내 생각의 맥이 끊겨버렸어. 끊겨 버린 생각은 줄이 끊긴 연처럼 다시 되돌릴 수가 없지. 그 구절을 찾지 못하면 생각도 찾을 수가 없어. 생각은 하나 하나 꿰어 있는 쇠사슬 같죠. 이해하겠소? - P48

사람들은 다 여기서 찾는데 저쪽 가서 뭘 하게요?

여긴 내가 찾는 게 없어서요.

뭘 찾는데요?

(괴로워하며) 뭘 찾는지 나도 몰라요.

다들 봐요. 이 사람은 참 이상해. 뭘 찾는지 모른대요!

다시 한 사람 그는 이미 뭔가를 찾은 게 분명해. (사람들이 금방 그를 둘러싼다)

아뇨. 정말 아니에요. (비켜난다)

(사람들 가운데서 나와) 어디로 가려고?

지나가려고.

아무 것도 못 찾았잖아? 근데 왜 그냥 지나가고?

난 안 찾을 거야. 난 저리로 가겠어.

우린 다 아직 여기서 찾고 있는데 너만 저쪽으로 가겠다고?

가게 할 거야?

안 돼! - P49

찾고 싶지 않다! 좋아. 그래. 찾고 싶지 않으면 억지로 찾으랄 수는 없지. 당신이 찾고 싶지 않아도 모두가 찾지 않을 수는 없지. 다들 찾는데, 당신만 찾지 않을 수 없어. 다들 찾지 않으면 너도 물론 찾지 않아도 돼. 다들 찾으려는데 넌 찾지 않고, 다들 모두를 찾는데, 넌 모두를 찾지 않고, 다들 찾도록 찾지 않고, 넌 찾든 아니든 넌 찾지 않아도 다들 찾아, 넌 찾든 안 찾든 다들 찾지 않아---- 너도 찾고 다들 찾고---- - P50

넌 이곳의 규칙을 알고나 있는 거야? 계속 알려줬잖아. 넌 어쩌자고 아직도 고치질 않지?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된 거야?
뻣뻣해! 손 좀 봐야겠어!

잠깐. 그건 안 돼. 야만적이야. 아직도 돌아서지 않겠다면, 억지로 그럴 것도 없어. 그럼 이 사이로 지나가라 하지. (바지 가랑이를 가리킨다) 어때?

(와---- 하고 웃는다) 좋아! - P51

사실 이건 너의 자아연민일 뿐이야. 넌 이렇게 끝내버리고 싶지 않겠지. 이 허영 덩어리야. (퇴장해 버린다) - P55

(가볍게 노래한다) 그가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아내를 놀려
아내를 놀려
아내를 놀려
자기 아내를
자기 아내를
자기 아내를 - P82

그럼 들어보시오! 마디마다 정이요, 열 손가락마다 마음이지요. 이 세상 남녀 간에 뜻을 전하고, 온갖 매력을 드러내는 거야 다 손에 달려 있지요. (독백으로) 장주야, 장주, 넌 남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위로 하늘의 모습을 알고 아래로 유명한 세계를 알며, 깊고도 오묘한 것을 모르는 게 없다지만, 여인의 손에도 이렇게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는 것, 그리고 네 아내의 손이 이렇게 곱다는 건 더더욱 몰랐구나! (참지 못하고, 아내의 손을 당긴다) - P86

(독백으로) 이 여자 제멋대로군, 대단한 바람둥이야! 장주야, 너 오늘 한번 일 치지 않으면 부부로 산 게 억울하겠다! (방백으로) 그 장주가 범속한 세상을 초월한 듯만 여기더니, 어디 이 더러운 가죽을 벗어날 수 있더냐? - P88

(연거퍼 손을 비비며, 독백으로) 너 장주야, 장난아 연극을 하든, 정말 아낼 시험하든 여기까지 왔으니, 안하면 안했지 그만두진 못하리라. 어디 체면 볼 경황이 있느냐! (방백으로) 지금은 내가 장주이든 아니면 바람둥이 귀공자가 희롱을 하는 것이든, 또 희롱하는 게 자기 아내이든, 남의 집 바람둥이 여인이든 가릴 것 없다. 무조건 하는 거야! - P89

판관 나리······ 제발······ 나리, 저희를 굽어 살피사······
하늘같은 나리······ 저희는 떠돌 만큼 떠돌았어요······ 떠돌 만큼······
제발······ 나리······ 저희를 살피시어······
하늘같은 나리······ 저희를 살피시어······저흰 떠돌 만큼 떠돌았어요······
저희······ 떠돌이귀신들은······ 떠돌 만큼 다녔어요······
낮도 없이······ 밤도 없이······ 떠돌았어요······
낮도 없고······ 밤도 없이······ 이젠 처분을 내려주세요······
해도 없고 달도 없이······ 선 것도 선 게 아니고······ 앉은 것도 앉은 게 아닌 채로······
이제 판결을 내려주세요······해도 달도 없이······ 어떤 판결보다도 견디기 어려워요······
선 것도 선 게 아니고······ 앉은 것도 앉은 게 아니고······ 해도 달도 없이······
해도 달도 없이······ 이제 죄를 정해주세요······ 갈 곳으로 보내주세요······
어떤 형벌보다도 괴로워요······ 선 것도 선 게 아니고······ 앉은 것도 앉은 게 아니고······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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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추워졌다. 복지원 안의 아스팔트길들은 질척한 눈으로 덮여 있다. 하늘은 유황으로 가득하고, 얼음처럼 찬바람은 가로수길의 백양나무에 게으르게 매달린 마지막 잎사귀들을 채간다. 가로수 길은 정해진 도로 규율의 본질로서 전혀 구부러짐 없이 복지원 구내를 가로질러 간다. 소녀에게 이것은 황금시대의 시작이다. - P86

소녀는 동급생들에 대한 말 없는 헌신을 무척 만족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동급생들이 서로 싸울 때 자신의 의견은 아랑곳없이 자기를 그들의 목적에 이용할 줄 아는 아이들을 믿고 편든다. 그리고 양쪽 편 다 소녀를 이용할 줄 아는 경우에는 동시에 두 편을 다 든다. 단순히 남들이 자기한테 털어놓은 일만 간직하면 되고, 또는 외울 것만 말하면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충분히 가능하다. 따라서 학급 안의 투쟁에서 소녀가 차지하는 위치는 언제나 명예로운 위치는 아니다. 본래 한 인간의 위치라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제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굽기 전의 생선처럼 속을 완전히 비워야만 다른 사람의 못된 행동, 또는 행운이나 불행을 완전히 신용있게 간직할 충분한 공간이 남는 것이다. - P90

이제 소녀가 대체로 말이 없어진 이후. 그리고 소녀의 정신적인 중립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이후에는 생리적인 중립도 분명하게 나타났고, 흔들리고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면서 동시에 폐쇄적인 한 덩어리 살이 한 공간 안에서 야기하는 도발, 그런 도발은 지양된 것처럼 보인다. 이 육체는 아무런 도발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그 몸은 속으로부터 전혀 저항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세게 잡아보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 몸을 향한, 구역질 섞인 모든 욕망은 늪 같은 그 몸 안에서 가라앉는다. 그런 욕망은 그냥 삼켜지고, 가라앉고, 질식한다. - P94

소녀는 과거에 있었던 것에 대한 기억과 있어야 할 것에 대한 기억을 다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자기가 마치 꽁꽁 묶인 사람, 불 속에서처럼 시간 속에서 꽁꽁 묶여 이제는 아동 복지원에 한 개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사람처럼 느낀다. - P97

소녀는 자주 약속을 지키러 왔다. 그리고는, 예정되어 있듯이, 텔레비전 방에 놓여 있는, 천이 다 닳아버린 긴 의자에서 다른 아이들 틈에 끼어 앉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 와보면 거기엔 아무도 없고 소녀 혼자만 있는 경우도 많았다. 소녀만 모르는 사이에 약속이 취소된 것이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소녀는 이런 약속들이 가벼운 물질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약속은 실행되기도 하고, 실행되지 않기도 하며, 내일이나 모레 실행되기도 하는데, 약속 취소는 가벼운 깃털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이다. 오직 소녀의 동경이 시멘트처럼 굳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미리 가진 기쁨의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소녀만이 가벼운, 어린아이다운 무심에 대해서 오랫동안 귀가 먹은 것이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소녀는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이해했다. 그리고 여기서는 사건들이 유실되지 않는다는 것, 어린 시절은 넓은 시간의 바다 위에서 떠돌고 있다는 것을 또한 이해했다. - P99

토요일 오후 방 친구들이 한마디 작별 인사도 없이, 마치 소녀가 자기들한테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방을 떠날 때도 그것은 소녀를 그들과 똑같은 존재로서 가장 진실하게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들이 돌아왔을 때 소녀를 다시 보게 되리라고 확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소녀가 장롱이나 침대처럼 아주 당연하게 가구 목록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이 아침에 한마디 인사도 없이 하루를 시작할 때 그것은 서로 혼동할 만큼 아직 많은 날들이 자기들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들이 아침에 만나는 얼굴들은 오래오래 똑같은 얼굴일 것이기 때문에 법석을 떨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얼굴들 가운데 소녀의 얼굴도 있다. - P100

잠을 깨우는 시간이면 밖은 아직도 어둡다. 당직 사감이 문을 두드린다. […] 그들의 눈은 아직 감겨 있다. 그들의 꿈속으로 규칙이 밀고 들어온다. 꿈을 꾸고 난 뒤에 드는 첫 생각은 피할 수 없이 학교에서 볼 시험에 대한 생각이다. 매일 시험이 있다. 겨울에는 무슨 시험이든지 안 보는 날이 없다. 침대 밖으로 한 발짝이라도 내딛자마자 시험의 아가리로 들어가게 된다. 이 요정들은 마음속에 거부감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몸을 일으켜 맨발을 학교 실내화에 꿰고 방을 빠져나간다. 아이들은 복도를 지나 세면실로 가서 하얀 이빨을 닦는다. 소녀는 이 아이들의 너무나 당연한 반감이 부럽다. 그 분명한 전선, 너무나 완전한 그들의 나쁜 기분, 아무도 나무랄 수 없는 반항에 대한 이 아이들의 권리가. - P112

방과 후, 정확하게 위치가 정해진 숨을 내쉰 이후 소녀는 대개 잠이 든다. 왜냐하면 방과 후 시간의 얼굴, 그 자유시간의 얼굴에 대해서는 한번도 완전한 확실성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녀는 그 얼굴을 부활시키기 위해 자기가 행복해야 할지, 힘들어 해야 할지, 아니면 무관심해야 할지, 또는 몹시 구역질을 느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시간은 수많은 얼굴들을 가졌고, 일체의 계획을 벗어나 있었다. 날씨라든가, 숙제, 또는 예정된 오락에 의존하고 있던 그 시간은 대부분 커다란 비밀로 남아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 소녀는 창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창 앞에는 나무들이 점점 초록색을 띠어가고 있다. 소녀의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눈이 내린다. - P132

무릇 인식이란 점점 가속도가 붙게 마련이고, 또 모든 이해는 눈사태처럼 진행되듯이, 처음에는 도대체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다가 어느 시점부터인지 그리고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게 시작되고, 마침내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다고 받아들일 용기가 일단 생기면 어느 누구도,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힘이 되듯이, 소녀가 정말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의 과정도 그렇게 진행되었다. -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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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전쟁 동안 쉽지 않은 일들을 겪었지만 삶을 사랑했어. 아마 전쟁을 겪으면서 전보다 더 삶을 사랑하게 되었을 거야. 죽은 사람을 많이 본 어머니는 그만큼 더 삶에 밀착하게 된 거야. 그리고 나는 아버지에 관해서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 아버지는 비록 살아나기는 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죽은 사람들 쪽에 속하게 된 거라고. 죽음에 엄습당한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살갗을 갖게 된 거야. 다른 사람들의 살갗은 살아있는 것을 두르고 있지만, 아버지의 경우 살갗은 살아있는 것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했어. 어머니가 손을 잡으려 하면 아버지가 늘 움찔하며 손을 치웠던 것이 기억나. 아버지는 언제까지고 후퇴만 거듭하고 있었어. 그게 아버지의 지병이었던 것 같아.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손을 잡으려 하면 손을 치웠어." - P127

아버지와 나는 복도의 십자가상 아래 앉아 있다. 우리 주위에는 옷장에서 꺼낸 온갖 물건이 늘어져 있다. 우리는 옷가지와 상자, 서류철, 책, 꽃병, 낡은 그릇들 사이에 앉아 있다.
우리는 넘겨보고 열어보고 밀쳐놓고 집어보고 펼쳐보고 밀쳐놓고 보여주고 구겨버리고 찢어버리고 밀쳐놓는다. 모든 것이 먼지투성이다. 할머니가 사진을 묶었던 고무 밴드는 이제 바싹 말라버려 사진들을 빼내려고 하면 툭 끊어진다. 종이상자들은 무게 때문에 찌그러졌다. 조그만 상자들은 열쇠가 없고 외투에는 좀이 슬었고 트렁크에서는 냄새가 난다.
[…]
우리는 넘겨보고 열어보고 밀쳐놓고 집어보고 펼쳐보고 밀쳐놓고 보여주고 구겨버리고 찢어버리고 밀쳐놓는다. - P128

나는 내 할머니였던 할머 니가 처음에는 남자가, 그 다음에는 동물로, 그 다음에는 기존의 모든 것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을 본다. 나는 할머니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원했지만 그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존재가 말하는 것을 듣는다. "모든 것이 너무 많았고, 모든 것이 너무 적었다." 내가 알지 못 하는 어떤 존재의 목소리가 말한다. "나는 금양모피를 찾으러 가는 중이야." - P141

내 애인이 나를 깨물며 말한다. "언젠가 너는 더 젊은 남자를 찾게 될 거야." "말도 안 돼요." 내가 말한다. 내 애인이 나를 깨물며 말한다. "너에게서 모든 게 성장하는 걸 보면 정말 멋져." 그가 말한다. "언젠가 너는 더 젊은 남자를 찾게 될 거야" "허튼소리 말아요." 내가 말한다. "난 알아." 그가 말한다. "그건 정상적인 거야. 그리고 나는 삶 안으로 사라질 거야." "삶 안으로 사라진다고요?" 내가 묻는다. "그래." 그가 말한다. "나는 나가버릴 거야. 삶 안으로 말이야. 그리고 사라질 거야." "아름답군요." 내가 말한다. "그렇지 않아. 이건 아주 끔찍한 거야. 하지만 너는 아직 이해하지 못해." 그가 말한다."너는 너무 어려." - P141

내가 엄마와 점점 닮아간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내가 엄마처럼 말한다고 한다. 마치 엄마가 내 몸을 입은 것처럼. 내 살갗을 걸치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는 동안 나는 어디 있는 것인지 나도 모른다. 나는 엄마처럼 기침하고 엄마처럼 웃는다. 그리고 누군가 내 마음을 다치게 하면 나는 꼭 엄마처럼 무지막지한 말들을 쏟아낸다. 나는 나이를 먹었고, 엄마는 다시 사지를 쭉 뻗고 있을 만한 널찍한 살갗 속에 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디 있는 것이지 나도 모른다. - P144

몇 주, 몇 달 동안 나는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꼼짝 않고 앉아 있던 나는 바닥에 쓰러진다. 쓰러지는 나에게 솨 하는 소리가 들려 온다. 눈처럼 하얀 그 소리, 과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 소리가. 솨 하는 그 소리에 내 두 귀가 아주 밝아진다. 그리고 문득 나는 깨닫는다. 고요가 들어서는 그 한순간을 채우기에는 과거의 모든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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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그 무엇은 발설되건 발설되지 않건 돌처럼 엄연히 존재하고, 그 무엇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것을 성가신 돌처럼 밀쳐버린다. - P65

참된 사랑을 품은 사람은 상대방이 고통을 겪을 동안에는 자신의 중요한 문제를 가볍게 접어버리며, 사랑은 순수하게 동지적인 지원을 배제하지 않고, 또 열정이란 위급한 상황에서는 현명하고 의미 있게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감퇴시키기보다 오히려 고양시킨다는 것을. 희망에 탐닉하는 것은 현실적인 어떤 것에 탐닉하는 것과 단 한 가지 점에서 구분된다. 희망에 대한 탐닉은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희망의 실현에서 지원을 얻지 못하면 희망을 품은 자를 지극히 가파른 경사면으로 몰고 가며, 그렇기에 언젠가 그가 균형을 잃으면 떨어져 부서지게 만들거나 무엇이든 충격적인 일을 당하게 한다. - P66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면, 언제든 다시 잃게 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면, 남는 것은 여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적은 것을 가졌고 이 너무 적은 것이 언제든 다시 잃을 수 있는 것보다도 많다면 그런 것을 뭐라 형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 P67

그렇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의 움직이는 발끝과 침묵을 의식하고 있으며 나 역시 이 모임에서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기에, 이를테면 침묵의 공존 같은 것이 생겨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의 침묵은 그 여행 때와 마찬가지로 나를 향한 것임을 내가 받아들여야 하지만, 그에 의지에 반하여 침묵은 우리 두 사람을 묶어준다. 마치 대립된 두 파가 싸움을 벌이려고 들어선 말 없는 땅 한 조각이 그 두 파를 이어주고 후일 전쟁터라 불리면서 나머지 땅들과는 영원히 구분되는 것처럼. - P71

나는 사진 속의 바다에 갔을 때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아직 기억한다. 해변을 걷는 동안 아버지는 바다를 가리키고 흥분한 듯 두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여기는 수백만 년 전에 땅이 갈라진 곳이야. 그 때 단괴들이 생겨났고, 이 단괴들이 서로 분리 되어 유동했어." 아버지는 소리치듯 말했다. "이른바 바다라는 것은 그 단괴들 사이에 넓게 자리 잡은 물에 불과해."
그 때 처음으로 나는 이른바 바다 앞에 서 보았고 그 광대한 넓이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물고기들이 그 막대한 물의 무게를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정말 궁금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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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들어 할머니는 가끔 분을 너무 두텁게 바른다. 또 어떤 때는 바지 지퍼 올리는 것을 잊는다. 블라우스에 얼룩이 묻어 있거나 손톱 끝이 지저분할 때도 있다. 얼굴의 솜털을 뽑는 것도 잊어버린다. 이제 할머니는 여자 같지 않다. 늙은 여자 같지도 않다. 할머니는 그저 늙은 어떤 것, 사람이 아닌 늙은 동물이나 식물처럼 보인다. 나는 늙어 완전히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그런 변신이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 P51

이제 할머니는 그동안 쓸 만큼 쓴 몸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다. "이걸 먹어야 하니?" 할머니가 묻는다.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 "물론 드셔야죠." 내가 할머니 접시에 고기를 담으려 하자 할머니는 손사레를 치며 말한다. "관둬라." 할머니는 샐러드 잎만 하나씩 찍어 이 사이로 쑤셔넣는다. 그러고는 설탕에 절인 과일을 되작거리다 아이스크림을 휘젓고는 녹은 아이스크림을 후루룩 마신다. "지루하구나." 할머니가 말한다. "늘 똑같잖아. 위로 넣고 아래로 내보내고. 꼭 먹어야 하니?" "그럼요." 가끔 할머니는 나에게 자신의 접시를 밀어서 대신 먹으라고 한다. 처음에 나는 할머니에게 너무 양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는 알게 된다. 할머니는 자신이 먹는 것이 여전히 사람의 음식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지루하구나." 할머니가 말한다. - P51

이제 나는 밤에 할머니 옆에서 자는 것에 익숙하다. 할머니는 이제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해 밤중에 화장실을 찾지 못한다. 할머니는 평생을 지내온 집을 더 이상 알지 못한다. 가끔 할머니는 잠결에 말을 하거나 뭔가를 외친다. 그러면서 응답을 기다리는 것 같다. "가치 없는 것—!, 가치 없는 것—!" 그 구절의 뒷조각은 할머니의 꿈속에 머물러 있다. 내 안의 무엇인가 그 나머지 구절을 말하는 것에 저항한다. 나는 할머니 옆에 누워 내 꿈을 꾼다. 내 꿈속에서 나는 안다. 할머니는 그 시를 끝맺지 못할 동안만 살 수 있다는 것을. 할머니는 내가 응답 없이 묵묵히 있는 것을 불만스러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할머니가 말한다. "하나의 단어가 빽빽한 단어들의 수풀을 헤치고 길을 찾아가는 걸 보면 참 재미있어." - P53

하지만 어느 틈엔가 우리는 이 여행이 일종의 귀양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생전 처음 엄마들로부터 떨어져 우리끼리 휴가를 보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귀양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치 섬에 귀양 간 사람의 생활이 그 섬에 국한되어버리듯, 우리가 서로에게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 내 오빠나 다름없는 그는 나에게로 국한되고 나는 그에게로 국한되었다는 의미에서이다. - P61

내 오빠나 다름없는 그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뱀처럼 출렁이고 기다란 팔은 활기 있게 움직이지만, 야영장에 도착한 다음부터 그의 눈빛은 돌처럼 굳어버리고 그의 시선은 나를 막고 서는 방패 같다. 마치 실향의 고통에 돌처럼 굳은 마음으로만 맞설 수 있는 사람처럼. 그에 반해 나는 난파를 당해 어느 섬에 휩쓸려간 사람 같다. 내가 도착하자마자 그 섬의 샘물은 말라버리고, 후일 사람들은 얼굴에 거미줄을 뒤집어쓴 채 말라붙은 내 시체를 발견한다. 나는 내 여행 동료를 본다. 그는 약속을 지켜 국경 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가 거기 있는 것은 그저 우리 계획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임을 안다. 빌린 돈을 갚는 마음으로 혹은 붕괴 직전의 집을 헐어 버리는 마음으로. 국경 역에서 마침내 그를 따라잡고 나서야 나는 분명히 깨닫는다. 우리의 계획에서 남은 것은 앙상한 골격뿐이라는 것, 다시 말해 함께 도보로 국경을 넘기로 했다는 그 사실뿐이라는 것을. 그 골격을 채웠던 살은 먼 곳에 떨어져 있고, 그 사이의 무한한 공간에는 태양빛이 내리쬐고, 나에게서는 피가 흘러나온다. 그는 내가 부르는 소리에 답하지 않았고 내 눈에서 점점 멀어져 마침내 사라졌다.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 P61

이 휴가 동안 밤마다 나는 원칙상 내 오빠라 할 수 있는 그와 한 텐트에서 잠을 잔다. 아주 얇은 천의 텐트만이 우리를 비와 흙에서 분리한다. 그런 텐트에 그와 함께 누워 있는 밤이면 나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와 등 밑의 가지와 돌을 세고 때로는 내 몸무게를 견디고 기어가는 작은 벌레의 움직임도 느낀다. 밤마다 나는 이제 그에게 말을 할까 망설인다. 그러나 그와 나 사이에는 기절해 버린 몸뚱이처럼 침묵이 버티고 누워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침묵에서 알게 된다. 그, 평소 오빠 같던 그는 우리 사이에 기절해 있는, 아니 아예 죽어버린 듯한 이 차가운 몸뚱이 뒤에 숨었고 내가, 평소 누이 같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알지만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내 입에서 무슨 말인가 나오는 것을 막으려 한다. 그리고 그의 살아 있는 아름다운 몸에 대한 내 관심은 언제부턴가 영혼적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게 되었고, 이제 나는 혹시라도 내 말이 그 몸을 나에게서 떼어놓을까봐 말을 하지 못한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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