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힘들고 누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던 그때, 무엇이 보고 싶은지도 모른 채 무언가 보고 싶었다. 아플 때마다 뭐가 그리운지도 모르게 그리운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서러움이 어딘가 향할 곳이 있기를 바랐다. 그러면 이불 속에서 앓는 마음이 조금은 견딜 만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대상도 없는 막연한 그리움을 꼭 끌어안은 채 이불 속을 파고들면 살갗과 이불이 맞닿은 그 미세한 틈 사이로 한기가 새어들어왔다. 독감 끝물에 한 엄마와의 통화에선 그냥 지나가던 감기였다고만 말했다. - P50

2006년 11월에 처음 메일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20XX년 XX월 마지막 메일링을 받기까지, 한 공간이 건재했다가 사라지는 시간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오래도록 형체도 모른 채 내밀하게 간직해왔던 ‘장소‘와 ‘공간‘ 에 대한 관심은 아마 그때 처음 불거져 나온 걸지도 모른다. 섬들이 모여 이룬 군도. 내가 머무는 방이 아주 작고 누추한 본 섬이라면, 집 밖에도 내가 편하게 오갈 수 있는 다른 섬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 살만 한 곳을, 내 것 같은 공간을 찾아내기 위해 어디서든 살아나 보자 싶던 결심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내 다음 거처를 궁금해하는 마음은 모험심과도 닮아 있었다. 지금까지 그때의 시간을 기억하는 건 그 온기에 기댄 감각이 잠깐이지만 진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도시이방인으로서, 때때로 도시여행자로서 사람이 머무는 곳을 떠돌아더니게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 P59

물론 예쁜 커튼을 걸고 싶은 욕심도 이따금씩 들었다. 나름 감당할 만한 가격에 괜찮은 디자인의 커튼을 골라 위시리스트와 장바구니에 야심차게 담은 것도 여러 번. 하지만 늘 커튼보다 시급하거나, 돈을 지불하기 더 가치 있는 물품들을 떠올리며 결제 앞에서 망설였다. 그러는 동안 내 커튼이 될 뻔한 물건들은 장바구니에서 자동 삭제되거나 품절되곤 했다. 버릇이라면 버릇, 미련하다면 미련한 짓이었는데 장바구니에서 없어지고 나면 이상하 게 아쉽기보다는 차라리 잘 됐다는 마음이 매번 들었다. - P79

에어컨도 없는 비좁은 집에서 선풍기 하나로 열대야와 온열 증세를 묵묵히 견디던 스물다섯 살의 여름과 고독. 젊고 가진 거 없는 세입자와 나이 들고 가진 게 많은 임대인의 자격으로, 나는 나 자신과 할머니를 분리해서 비교하고 있었다. 가진 것도 없고, 정해진 것도 없고, 무슨 재주로 벌어먹고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마당에 월세를 건네러 할머니 앞에만 서면 어쩐지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비교였지만 그랬다. 일흔쯤 돼보 이시던 주인집 할머니는 가늠할 수 없는 긴 시간을 건너 마치 처음부터 ‘주인집 할머니‘였던 것처럼 내 눈앞에 있었으니까. 친할머니나 외할머니를 봐도 나이 들어서의 내 모습을 대입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게 셈을 하는 주인집 할머니의 정정한 모습을 보면서 내 노년의 삶에 있을 수 있는 구체적인 생활을 짐작해보고 있었다. - P85

모든 경험은 경험할 가치가 있다고 애써 맹신했다. 그래야 내가 겪는 고생을 덜 억울해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맹신은 일종의 부적 같은 것이다. 부러 겪지 않아도 될 경험도 있다는 걸 인정하고 나면 듬성듬성 그물지었던 나의 체념과 염세의 세계가 해체될까 봐, 체념으로 버텨온 내가 그대로 무너질까 봐 너무 두려웠다. 삶이 너무 누추해서 내 것이라 하고 싶지 않았다. - P95

조금 더 집다운 집에 살았다면 삶이 좀 더 살만해졌을까. 덜 아팠을까. 상관관계야 있겠지만 몸이 사는 집만큼 마음이 사는 집이 어떤 상태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았다. 녹록지 않은 생활을 버텨냈더니 나는 나에게 좀 더 잘해주고 싶어졌다. 적어도 몸이 사는 집이 누추하다는 이유로 마음 집까지 해치고 싶진 않았다. 마음이 건강하면 누추한 집의 삶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염세와 체념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비관을 줄 여나가고, 보잘 것 없는 와중에도 소중한 것들을 만들어 두려하고, 그런 동시다발적인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천천히 일어나는 동안 곁에는 간간히 사람이 있었다. 내 손으로 두 눈을 가린 채 어둡다고 웅크리 진 말자고 했다. 어둠 속을 혼자 견뎌야 할 때도 문을 열면 거기에 도와줄 누군가 있을 거라고 훈련하듯, 학습하 듯 생각하려 했다.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게 너무 고단해서 절망적이지만 그래도 감당하기 쉬워지고 싶어서 되든 안 되든 애를 써나갔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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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 중에 배어 있는 불편함을 적절히 무시하거나 견디지 못한다면 원룸텔과 같은 성냥갑 생활은 더 숨 막히게 나를 옥죄일 것이었다. 적응하거나 무뎌지는 수밖에 없었다. 초반에는 부엌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목례 정도는 했었지만 나중에는 눈과 입과 귀를 다 닫고 살았다. 될 수 있는 한 나 자신이 타인에게도 그림자였으면, 무엇보다 타인이 나에게 그림자보다도 못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좁은 방보다 더 비좁고 답답하게 느껴지던 게 바로 원룸텔 공동생활 구역이었다. 좁은 내 방이 내겐 가장 편한 곳이었다. - P35

앞으로 얘기하게 될 세 번째 원룸텔에서의 기억인데, 거기는 총무를 따로 두지 않고 사장님이 직접 관리하는 곳이었다. 잘 관리된 본인 원룸텔에 꽤 자부심이 있는 분이었고 그 자부심의 근거로 든 것 중의 하나가 ‘우리는 중국인은 받지 않는다‘였다. 왜냐고 물으니 사장님의 경우에는 몇몇 중국인 유학생들을 받으면서 겪은 인상들이 모든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쾌적한 원룸텔을 자랑하면서 내세운 근거가 고작 그런 이유라니. 하지만 사장님의 노골적인 태도를 무례하다고 느끼는 나 역시 이전 원룸텔에서 괜한 심증 을 품었던 이력 때문에 어느 정도는 그 말을 검증된 정보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약간 불편하게 생각하고 지나쳤던 그 모순적인 마음을 이 책을 쓰면서 다시 되새겨보니 나 자신의 무지함에 낯이 뜨거워진다. 종특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시대에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대상을 범주화하고 낮춰보는 일이 숨 쉬듯 이루어진다. 잘못된 줄도 모르게, 잘못되었는지 검증할 틈도 없이 말이다. ‘다들 그러니까‘, ‘공공연한 일이니까‘로 치부되는 것들을 머리 힘 바짝 주고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할 텐데. 아직 갈 길이 멀다. - P42

싫은 환경과 적당히 화해하는 데에 요령이 없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는 아니고, 그 당시에도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언젠가 서로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친구에게서 ‘꿈을 이루는 데에 방해가 있다면 너는 부술 거냐, 타협할 거냐‘라는 맥락의 질문을 받았는데, 그때 나는 ‘아무리 애써도 바꿀 수 없다면 타협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대답했다. 그때 친구는 내 대답이 실망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타협이라도 잘 해내고 싶었던 나는 싫으면 싫은 감정이 얼굴에 다 티가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말이라도 ‘타협해야지‘라고 말하면 싫은 환경 앞에서 불같이 화내거나 악을 쓰거나 비겁하게 도망치는 대신, 좀 더 세련된 대처 방식을 학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가 답한 ‘타협‘이란 단어는 화해와 협상의 의미였지만 표면적으로는 타성에 젖은 인상이었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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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학자들은 일본어가 아시아의 알타이 어족 중 고립된 언어일 것이라 간주한다. 알타이 어족에는 터키어, 몽골어, 시베리아 동부의 구스어가 포함되는데, 한국어도 대개 이 어족의 고립어로 간주된다. 어족 중에서 일본어와 한국어는 어쩌면 다른 알타이족 언어보다도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어와 한국어 사이에 나타나는 유사성은, 보다 상세하게 공유하는 문법 이라든가 프랑스어가 스페인어로 연결될 때 나타나는 어휘의 유사성과 같은 차원이 아니라, 일반 문법 체계와 기본 어휘를 약 15% 정도 공유하는 데 그친다. 만약 일본어와 한국어가 정말로 관계가 깊다고 한다면, 15%뿐인 공유 어휘는 이 두 언어가 5000년도 전에 서로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프랑스어와 스페인어가 분리된 것은 2000년도 채 안 되지만 말이다. 아이누어와 일본어의 관계는 더욱 의심스럽다. 아이누어는 일본어와 어떤 특별한 관계도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 P659

역사가들은 내게 유럽의 분열과 중국의 통합, 유럽과 중국의 상대적 힘은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이라고 지적해왔다. ‘유럽‘ 혹은 ‘중국‘으로 유용하게 묶여지는 정치적 사회의 지리적 경계는 수세기에 걸쳐 변했다. 중국은 15세기까지 적어도 기술에 있어 유럽을 이끌었고, 미래에도 다시 그렇게 될지 모른다. 이런 사례를 보면 "왜 중국이 아닌 유럽인가?" 라는 질문은 진지한 설명 없이는 하나의 덧없는 현상으 로 언급될지도 모른다. 정치적 분열은 경쟁을 위한 건설적인 토론의 장을 제공했다는 점 외에도 좀 더 복합적인 효과를 낳았다. 예를 들어 경쟁 은 건설적인 만큼 파괴적이라는 사실이다(제1·2차 세계대전을 생각해보라). 분열 자체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다면적인 개념이다. 혁신에 미치는 분열의 영향은 자유와 같은 요소들에 의지한다. 자유로운 사상과 인간은 파편화된 그들이 각각 별개의 것이거나 단지 서로를 복제한 것에 불과하든 간에 그 파편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다. 그 분열이 ‘최적‘ 인지 아닌지는 당시에 적용된 최적의 기준에 따라 변할 것이다. 기술혁신을 위해서는 최적 상태의 정치적 분열이라 할지라도, 경제적 생산성, 정치적 안정성, 인간 행복에는 최적이 아닐지도 모른다. - P688

<총, 균, 쇠>에서 다룬 문제들을 확장시키면 세계 경제학의 중심 문제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왜 미국이나 스위스 같은 나라는 부유한데 파라과이나 말리 같은 나라는 가난한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의 1인 당 국민총생산GNP은 가장 빈곤한 나라들보다 100배나 더 많다. 이는 경제학 교수들이 해결해야 할 고용에 관한 이론 중 자극적인 질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정책적 시사점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그 답을 알아낼 수 있다면 빈곤한 나라들은 그들을 가난하게 하는 요소를 바꾸고 부유한 나라로 만드는 조건을 채택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한 답 하나는 그러한 경제적 불균등이 부분적으로 인간 제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가장 명확한 증거는 근본적으로 동일한 환경인데도 매우 다른 제도 때문에 1인당 국민총생산이 차이 나게 된 4쌍 의 나라들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남한과 북한, 서독과 동독, 도미니 카공화국과 아이티, 이스라엘과 아랍 주변국들인데, 비교를 통해 명백한 예를 들 수 있다. 각 쌍에서 먼저 예시한 부유한 나라들을 설명할 때는 자주 거론되는 여러 ‘훌륭한 제도들‘이 있는데, 효과적인 법률 체계 와 계약집행, 사유재산권의 보호, 부패의 부재, 낮은 암살 빈도, 무역과 자본 흐름의 개방성, 투자를 위한 장려 등이다. - P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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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인 지금의 내 모습이 막연히 꿈꾸던 것과는 아주 다르듯, 매번 이사할 때마다 어떤 집을 찾아낼지 역시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예상 밖의 집을 거점으로 삼은 나는 삶에 익숙해지고 낯설어지기를 반복했다.
집을 옮길 때마다 매일 보는 풍경, 매일 다니는 동선의 기본값이 설계되었고, 집의 평수에 맞춰 품거나 버릴 물 건을 결정해야 했다. 생활이 달라지면 생각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어쩌면 머무름을 뜻하는 ‘거주‘는 꼬물대는 생활을 내포한 활동 명사일지도 모른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일하러 나갔다 돌아온 나를 반겨주는 곳. 집이라기보다는 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작은 공간. 자취 한 호수에서의 경험들로 나는 달라져갔고, 달라진 나는 내 삶에 변곡선을 삐뚤빼뚤 그려나갔다. 비록 어릴 때 꿈꾸던 어른의 모습과는 다를지 몰라도 나는 그 변곡선이 꽤 마음에 든다. - P10

그 모든 게 다 집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한 빌미였다. 빌미로 만든 경험이었지만 낯선 도시에 모인 방방곡곡의 얼굴들은 내게 자극을 줬다. 사람이란 프리즘으로 새로운 세계를 봤고, 그 세계에는 또 새로운 사람이 있 었다. 하고 싶은 게 있든,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든 간에 비슷한 또래들은 상대의 취향을 통해 새로 배우고 감화되어 갔다. 함께 어울리다가 서로에게 반하게 되는 지점에서 다들 자기 세계의 작고 여린 싹을 발견했다. 서로 가 영감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기를 함께 통과하고 있었다. - P22

더 많은 방을 만들기 위해 복도에다 창문 없는 내측방 을 만든 원룸텔의 비인간적인 면모는 살아볼 때 그 불편 함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인간이, 아침에 햇빛 하나 없는 곳에서 눈을 떠야 하다니 정말 감옥도 아니고 뭐란 말인지. 하지만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원룸텔은 다 그런 구조를 답습하고 있다. 사람이 살 구조가 아니라 건물주의 돈이 되는 구조. 집이라고 할 수 없는 주거 형태는 전적으로 덜 간절한 사람의 편의에 맞게 설계되고 대물림 된다. - P25

방을 나설 때마다 열쇠로 방화문을 잠그고 복도를 나서면 한쪽 끝에 붙어 있는 비상구 표시가 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그 비상구 표시를 주시하곤 했다. 유사시 이 좁은 방과 복도를 내가 제일 먼저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가능하면 제발 ‘유사시‘와 같은 상황이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 P26

보증금 없이 급히 서울 생활을 시작하는 데에는 원룸텔만 한 선택지가 없다. 복학까지는 4개월 남짓. 이것도 다 인생 경험이겠거니, 나중에 다 피와 살이 되겠거니 여기며 꿋꿋한 자기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는 걸로 외로운 원룸텔 생활 속에 고립되지 않으려 했다. 씩씩할 것, 울지 않을 것.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그럴듯하지 만 인과관계에 명확한 결함이 있는 이 슬로건이 유행하기 전인데도, 이미 어떤 환경적인 압박으로 인해 스스로 캔디처럼 살기를 주문하고 있었다. 재산도 없고 재능도 없으니 ‘열심히‘로 나를 똘똘 뭉쳐 놓지 않으면 쉽게 바스러져 버릴 것 같은 나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성장하는 느낌이 들 때면 가끔 자랑스러웠지만, 실은 성장할 것투성이인 서툰 내가 너무나도 꼴 보기 싫었던 스물두 살. 낯선 도시에서 끈 떨어진 연이 되지 않으려고 알바하는 틈틈이 보고 듣고 느끼려고 애를 썼다. 서울 지리가 조금씩 눈에 드는 건 좋았지만 실은 복학 뒤가 막막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지난달보다 이번 달 형편이 나아진 것이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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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경우에는 분명한 해답이 나온다. 그곳은 원래 가축화· 작물화에 적합한 동식물이 집중되어 있어서 다른 곳보다 몇천 년 일찍 출발할 수 있었지만, 일단 그 선발 간격을 추월당한 뒤에는 더 이상의 지리적 이점이 없었다. 이 같은 간격이 사라져간 과정은 강성한 제국들이 점차 서쪽으로 옮겨진 경로를 통해 상세히 더듬어볼 수 있다. B.C. 4000~3000년경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국가들이 탄생한 후 처음에는 힘의 중심이 바빌로니아, 히타이트, 아시리아, 페르시아 등의 제국들 사이를 번갈아 이동하면서 줄곧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머물러 있 었다. 그러다가 B.C. 4세기 말 알렉산더대왕 치하의 그리스인들이 그리스로부터 동쪽으로 인도까지 정복하면서 드디어 힘의 중심이 서쪽으로 이동하는 돌이킬 수 없는 첫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B.C. 2세기에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힘의 중심은 서쪽으로 더 이동했고 로마제국이 멸망한 뒤에는 다시 서유럽과 북유럽으로 이동했다. - P624

사실 콜럼버스가 다섯 번째 시도에서 수백 명이 넘는 유럽의 군주 가운데 한 명을 설득하는 데 성공한 것은 바로 유럽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만들기 시작하자 다른 유럽 국가들도 스페인으로 흘러드는 부를 목격할 수 있었고, 그중 6개국이 아메리카의 식민지화에 더 가담했다. 이와 같은 이야기의 전개는 유럽의 대포, 전기 조명, 인쇄술, 소화기 등등 무수한 혁신의 경우에도 마찬 가지였다. 그 모두가 처음에는 유럽 일부 지역에서 무시당하거나 희한한 이유로 반대에 부딪혔지만, 일단 한 지역에서 채택만 되면 결국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 P629

중국은 통일되어 있을 때가 많았고 유럽은 언제나 분열되어 있었는데, 두 경우 모두 역사가 깊다.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생산성 높은 지역들은 B.C. 221년에 처음 정치적으로 통합되었고, 그때부터 대체로 그 상태를 유지했다. 중국에서는 문자가 처음 생길 때부터 문자 체계라고는 하나 뿐이었으며, 장장 2000년 동안이나 문화적 통일성을 지켜왔다.
그러나 유럽은 먼발치에서조차 정치적 통일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유럽은 14세기까지도 1000개에 달하는 독립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1500년에는 500개의 소국이 있었으며, 1980년대에는 최소 25개국까지 줄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늘어나서 내가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순간에는 40개국에 가깝다. 유럽에는 아직도 45개 언어가 존재하고 그 모두가 나름대로 변경시킨 알파벳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화적으로는 더욱 다양하다. 유럽경제공동체BBC를 통해 조금이나마 통일을 꾀하려던 시도조차 좌절되고 말 정도로 유럽은 오늘날까지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이 같은 현상은 유럽에 뿌리박혀 있는 분열 지향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 P630

중국이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과 내부의 장애물이 그리 대단치 않다는 점은 처음에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북중국, 남중국 해안 내륙이 각각 다른 농작물, 가축, 기술, 문화적 특징을 낳아서 그 모두가 차후 통일된 중국에 보탬이 되었다. 예를 들자면 기장 재배, 청동 기술, 문자 등은 북중국에서 시작되었고 벼농사와 주철 기술 등은 남중국에서 발생했다. 이 책에서 나는 대체로 강력한 장애물이 없을 때 이루어지는 기술 확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중국의 연결성은 불이익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어느 한 폭군의 결정은 당장 혁신을 중단시킬 수 있었고 또 실제로 그 같은 일들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유럽의 지리적 분할 상태는 서로 경쟁하는 수십 또는 수백 개의 독립 소국과 혁신의 중심지들을 만들어냈다. 그중에서 어떤 국가가 특정 혁신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또 다른 국가가 그 일을 했고, 따라서 이웃 국가들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에게 정복당하거나 경제적으로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장애물들은 정치적 통일을 막기에는 충분한 것이었지만 기술과 아이디어의 전파를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중국에서처럼 유럽 전역의 유통망을 한꺼번에 차단할 수 있는 폭군은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 P633

히틀러의 경우처럼 개인적인 특이성으로 역사에 분명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은 그 밖에도 많다. 몇 명만 꼽아본다면 알렉산더대왕, 아우구스투스, 석가, 예수, 레닌, 마르틴 루터, 잉카 황제 파차쿠티(15세기에 광대한 잉카제국을 건설함-옮긴이), 마호메트, 정복왕 윌리엄, 줄루 왕 샤카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단순히‘ 어쩌다가 그 시기 그 장소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과연 그들은 실제로 얼마만큼이나 상황을 변화시켰을까? 다음은 이 문제에 대한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의 극단적인 견해다.
"보편적인 역사, 즉 인간이 이 세상에서 이룩한 업적의 역사는 본질적 으로 여기서 활동했던 거인들의 역사다." 이것과 반대되는 극단적인 견해는 프로이센의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장으로, 그는 칼라일과 달리 정치의 내면세계를 오랫동안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정치가의 일이란, 역사 속에서 걸어가는 신의 발소리를 듣고 그가 지나갈 때 옷자락을 붙잡으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문화적 특이성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특이성도 역사를 예측 불가능하게 하는 한 요소다. 어쩌면 바로 그것 때문에 역사는 환경적 요인은 물론이고 그 어떤 원인으로도 일반화시켜 설명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의 취지에 비추어본다면 개인적 특이성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아무리 ‘거인 이론‘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이라도 역사의 가장 광범위한 경향까지 몇몇 거인의 손에 좌우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 P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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