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는 하나의 생존 형식이었다. 노예들은 유머를 통해서 노예제로부터 필연적으로 심리적 거리를 둘 수 있었다. 또한 유머는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암호였다. 그곳에서 주인님은 외부자이고 놀림의 대상이다. 랠프 엘리슨은 에세이 「웃음의 호사스러움」에서 백인은 흑인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놀림을 당했다는 전반적으로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낀다고 적고 있다. - P80

결국 흑인이든 백인이든 어떤 여자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프라이어는 자신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생각한다. 이것은 프라이어가 흑인 남성의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근육질의 외피를 벗어버리고 자기 치부를 드러내는 방식인 것이다. - P83

한은 가혹했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미국에 의해 지탱되었고 정치적으로 바로 세우지 못한 독재의 역사 때문에 쌓인 울분, 아쉬움, 수치심, 우울, 앙심의 혼합물이다. 한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다음 세대로 대물림될 수도 있다.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한을 느끼는 것이다.
프라이어의 온갖 흉내 연기 사이사이로 분노와 절망이 스친다. "내가 백인이 아니고 흑인이라서 다행이에요. 당신네 백인들은 달에도 가야 하잖아요"라고 말할 때 서리는 프라이어의 우수는 웃음이 그친 한참 후까지도 맴돈다. 그 우수는 그가 세상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앙리 베르그송은 유머는 숭고함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신성이 배제되어 있고 온전하게 인간적이라고 적고 있다. 즉 우리는 유머를 통해 초월성보다는 우리의 피부를 통절히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 P83

프라이어는 내가 소수적 감정(minor feelings)으로 칭하는 것을 채널링하는 사람이었다. 소수적 감정은 일상에서 겪는 인종적 체험의 앙금이 쌓이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끊임없이 의심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자극받아 생긴 부정적이고, 불쾌하고, 따라서 보기에도 안 좋은 일련의 인종화된 감정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어떤 모욕을 듣고 그게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뻔히 알겠는데도 그건 전부 너의 망상일 뿐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소수적 감정이 발동한다. - P84

소수적 감정은 현대 미국문학에 잘 등장하지 않는데, 그런 감정이 생존과 자기 결정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서사에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소설의 구성 원리와는 다르게, 소수적 감정은 중대한 변화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의 결여에 의해, 특히 변하지 않는 구조적 인종주의와 경제 상황에 의해 촉발된다. 소수적 감정을 다루는 문학은 인종 트라우마를 개인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극적인 장치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트라우마가 개인을 제자리에 묶어 두는 현상을 탐구한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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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저서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농담을 경향성 없는 농담과 경향성 있는 농담의 두 범주로 분류한다. 경향성이 없는 농담은 아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들려주듯 무해하고 무독하다. 경향성을 갖는 농담은 공격적이거나 저속하거나 아니면 둘 다여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 억눌린 부분을 캐낸다. 1940년대 미국 흑인 연예인들은 무대 뒤에서 터무니없이 과장된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런 농담을 가리켜 ‘거짓말‘이라고 불렀다. 그 ‘거짓말‘은 경향성을 지녔으며, 고지식한 백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길모퉁이, 당구장, 이발소에서 구전되었다. 프라이어는 – 이야기를 왜곡하고, 시끄럽게 불평하고, 큰소리치고, 볼링핀이든 오르가슴에 이른 촌놈이든 닥치는 대로 흉내 내며–거짓말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프라이어가 들려주는 거짓말은 내가 당시 읽고 있던 대부분의 시와 소설보다 인종에 관해서 솔직했다. - P62

비평가들이 지적한 대로 프라이어의 탁월함은 영리한 말솜씨뿐만 아니라 독백을 체화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 흉내 낼 수 있고 방대한 인간의 감정을 잡아내는 일에 눈부신 재능을 갖춘 1인 앙상블 팀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얼굴에 매료됐다. 만약 프라이어의 입담이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낸다면, 그의 얼굴은 그가 받은 상처를 드러낸다. 프라이어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던 반려 원숭이들이 어떻게 죽었으며 그가 뒤뜰에서 슬퍼하는데 이웃집 셰퍼드가 담장을 뛰어 넘어와 그를 위로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러두건대, 프라이어는 여기서 개를 연기한다. 하지만 그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눈으로 인간의 모든 아픔을 상기시킨다. - P63

존 키츠에 따르면 시인은 "정체성이 없다–시인은 끊임없이 어떤 다른 사람을 대신하고 그 사람의 역할을 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문학은 모든 주체가 피해 가는 그 중립자, 그 합성물, 그 모호성이며, 글을 쓰는 사람의 정체성을 비롯하여 모든 정체성이 실종되는 덫이다". - P67

나는 독자가 내 시를 읽고 나서 내 이름을 보면, 그 시와의 연결 퓨즈가 끊어지면서 시가 좋긴 한데 다시 생각해보니 공감은 안 간다고 여기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는 어떤 증거가 있단 말인가? 그냥 내가 재능이 없어서 그런 건지 어찌 알겠는가. 그걸 모른다는 것이 바로 문제였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나는 이 꼼짝달싹 못 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늘 내 신체적 정체성이 문제인 줄 알았으나 글을 쓰면서 깨달은 점은 글에서 나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여전히 내 정체성에 초연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며, 그 때문에 일종의 절망 상태로 곤두박질쳤다. - P68

코미디에는 시에서 만날 수 없는 투명함이 있다. 코미디언은 정체성이 없는 척할 수가 없다. 그들은 무대에 올라가 총살당하는 사람처럼 벽돌 벽을 등지고 선다. 도저히 숨을 곳이 없으므로, 별수 없이 자기 정체성을 먼저 인정하고 나서("자, 여러분은 내가 흑인이라는 걸 알아챘을 겁니다.") 비로소 다른 소재로 넘어가거나 아니면 정체성 문제를 더 본격적으로 파고든다.
또한 청중을 억지로 웃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허튼소리로 코미디를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진짜 웃음은 오르가슴과 마찬가지로 의지와 관계없이 근육이 갑자기 수축하면서 터져 나온다. 놀라야 웃음이 나오고, 놀라는 것은 한 번뿐이다. 그래서 코미디는 가차 없이 찰나적이다. 농담만큼 금방 낡아버리는 것도 없다. - P69

시 낭독은 내가 시에 대한 신념을 잃기 일보 직전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것 말고는 다른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낭독회는 어쩌면 한때는 공동생활의 한 중요한 형태였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정형화된 농담, 숨소리 섞인 "시인의 목소리", 기계적인 웃음소리, 누가 혼자서 음 하며 동의하는 소리 등등 모든 것이 고루한 교회 예배 의식처럼 되어버려, 예전에 지녔던 의미는 흔적만 남았다는 느낌이 심하게 들었다. 나는 현자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시의 힐링 효과를 칭찬하는 시인 역할에 장단을 맞추었지만, 속으로는 그 감상적인 달콤함에 당뇨 쇼크가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최악은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예술적 진정성이 훼손될까 봐 청중의 개념을 거부한 바로 그 시인이었다. 그러나 낭독회에서는 청중을 부인할 길이 없었다. 나는 강연장을 메우고 앉아 지루해하는 백인들을 위해 공연을 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인정받기를 절실하게 갈망했다. - P70

나는 어떤 상을 수상한 유색인종 시인이 질의응답 시간에 한 말을 잊지 못한다. "인종에 관해 쓰고 싶으면 예절 바르게 써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니까요." - P73

시인 프라기타 샤마가 말한 대로, 미국인은 죽음을 애도하는 일도 기한을 정해놓고 하듯 인종에 관해서도 유효 기간을 설정한다. 미국인들은 일정 기한이 지나면 우리가 인종 문제를 극복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비록 나는 회의적이지만, 이 기회에 우리가 미국 문학계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자동으로 규정하는 낡은 인종 서사, 우리의 삶을 백인 청중의 구미에 맞추면서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다양한 현실을 삭제해버리는 낡은 인종 서사를 갈아치우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어진 공식에 따라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일을 그만두자는 것이다. - P75

라히리의 소설은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show, don‘t tell)라는 문예창작 과정의 교리를 대체로 잘 따르고 있다. 그렇게 하면 독자는 등장인물의 고통을 체험하면서도, 수전 손택이 말한 대로 자신의 특권을 등장인물의 고통과 "동일한 지도" 위에 위치 매김 하지 않아도 된다. 등장인물의 내면적 생각이 제거되었으므로 독자는 빈번한 사건 개입에 방해받지 않고 등장인물의 의식이라는 조종석에 앉아 영화 보듯 등장인물의 시각을 체험할 수 있다. - P76

물론 유색인종 작가는 인종적 트라우마를 이야기해야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너무나 오랫동안 백인이 상상하는 대로 구성되어왔다. 출판업계는 작가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를 기대한다. 즉 등장인물이 특이한 가족 관계나 역사적 비극에 의해 시험에 들었다가 결국 자기 긍정이라는 계시에 도달하는 이야기를 기대한다. 아시아계 미국인 작가들의 소설을 보면 작가가 트라우마의 배경을 머나먼 고국 땅이나 고립된 아시아계 가족 내부로 설정하여, 그들의 아픔이 미국의 제국주의 지정학이나 미국 내 인종주의에 대한 새삼스러운 증거가 아님을 확실히 해두는 작품이 많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외부적 요인은–가부장적인 아시아인 아버지, 과거 시대의 백인들–독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도록 충분히 멀찌감치 설정한다. - P77

리처드 프라이어는 고통받는 흑인의 육체가 오랜 세월 미국인들의 오락거리였다는 점을 완전하게 직시하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리처드 프라이어에 관한 특집 기사를 『뉴요커』에 기고한 힐튼 얼스는 흑인의 체험을 미화하는 "단일한 이야기"에 대해 언급한다.

[흑인성이라는 주제는 미국인의 사고에서 기이하고도 불만스러운 여정을 거쳐왔다. 왜냐하면 첫째로 흑인성은 들어줄 사람을 찾기 위해 거의 언제나 백인 위주의 청중에게 설명되어야 했고, 둘째로 흑인성은 오로지 한 가지 이야기 – 진보 성향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억압당한 이야기 – 만 들려준다고 상정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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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잘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잘 믿지 못한다. 그래서 목소리를 너무 크게 낸다고, 자존심이 너무 세다고, 혹은 야심이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자책한다. 샤마는 그 시에서 자기 가족의 자존심을 이카로스에 비유한다. "보라, 우리가 하늘에 너무 가깝게 솟아올랐다가 어떻게 추락했는지. 추락이 우리를 끝장내지 못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았을까. 여기 떨어지고, 저기 떨어지고, 비명을 지르며.
오 허세부리지, 너희 생각만큼 나쁠 리는 없으니." - P47

정이라는 한국말은 번역하기 까다롭지만, 가장 근접한 정의는 한국인끼리 흔히 느끼는 "즉각적인 깊은 연결감"이다. 내가 그 심리치료사와 정으로 이어졌다고 상상했나? 왜 그 사람이 나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마치 우리가 공유하는 유산이 친밀함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도 되듯 말이다. 어쩌면 내가 한국계 미국인 치료사를 찾았던 것은, 길고 느린 심리치료를 원치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마도 내 삶을 별로 설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유대인 친구 하나는 자기는 절대로 유대인 심리치료사에게 가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의 모든 문제가 문화적인 문제라고 쉽게 전제되기 때문이란다. 때로는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 경험을 상대방에게 애써 설명할 필요가 있다. - P48

트라우마를 겪고 이곳으로 이민 온 많은 이민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일이든 감수한다. 사람을 속인다. 아내를 구타한다. 노름을 한다. 그들은 생존자이고, 대다수의 생존자가 그렇듯, 지독한 부모가 된다. 나는 다오를 보면서, 당신의 아버지가 집에서 질질 끌려 나오는 모습을 목격하던 우리 아버지를 생각했다. 역사를 통틀어 강제로 질질 끌려가던 아시아 사람들을 생각했다. 태어난 고향 집에서, 제2의 고향 집에서, 태어난 고국에서, 제2의 고국에서 쫓겨나고 내쳐지고, 퇴출, 퇴거, 추방되던 그들을 생각했다. - P57

나는 "다음은 아시아인이 백인이 될 차례"라는 소리를 들으면 "백인이 될"을 "사라질"로 교체한다. 다음은 아시아인이 사라질 차례다. 우리는 성취가 대단하고 법을 잘 지킨다는 평판을 듣다가 기억상실의 안개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권력자가 되지 못하고 그저 권력에 흡수될 것이고, 백인의 권력을 나눠 갖지 못하고 우리의 조상을 착취한 백인 이데올로기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인종 정체성은 쟁점에서 벗어나며, 괴롭힘을 당하거나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매번 발언을 방해받는 것도 인종 정체성과는 무관한 거라고 이 나라는 우긴다. 우리 인종은 심지어 이 나라와도 무관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론조사에서 흔히 "기타"로 분류되고 신고된 강간, 직장 내 차별, 가정폭력 사건의 인종별 집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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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흑인과 아시아인의 관계는 그동안 꽤 힘들었다. 20세기 중반 이후로 아시아인들은 더 이상 해충이나 짐승처럼 취급받지 않고 ‘모범 소수자‘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즉, 흑인들처럼 범죄를 저지르거나 빈곤하지 않은, 근면하고 ‘우등한‘ 소수자라는 뜻이었다. 수많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이런 고정관념을 받아들였지만, 백인 우월주의의 위계질서에서 봤을 때 모범 소수자라는 고정관념은 아시아인이 백인만큼 우등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아시아인은 흑인과 비교했을 때에 한해서만 우등하다는 의미였다. 미국 백인 사회는 아시아계 미국인의 성공을 놓고 소수자가 근면하게 일하면 정부의 사회적 지원이 필요 없다는 증거라며 자기들 편리하게 이용했다. 고정관념을 받아들인 아시아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은 모범 소수자 지위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영리하고 성공적인 집단으로 간주된 것은 맞지만, 그와 동시에 로봇 같고, 무감정하고, 쉽게 교체될 수 있는 존재, 즉 기본적으로 여전히 인간 같지 않은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시아인은 보이지 않는(invisible) 인종이어서, 언론매체, 정치, 오락물 등에서 찾아볼 수 없고 우리의 인종 정체성 때문에 직장에서 승진하거나 지도적 위치에도 오르지 못하고 간과되었다. - P13

나는 래미시 소재 와이오밍 대학교에서 개최된 낭독회에 참석해야 했다. 이 무렵에는 극심하게 우울한 상태였다. 얼굴을 도려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는데 간신히 비행기를 탄 것만도 기적이었다. 예상대로 낭독회는 순조롭지 못했다. 청중에게 내 시를 낭독하는 일은 나의 한계를 난폭하게 깨닫는 것과 같다. 청중이 지닌 시인에 대한 관념과 내가 그 시인이라는 증거의 부실함 사이에 놓인 무한대의 간극에 직면하게 된다. 나는 도저히 시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시아인은 존재감이 별로 없다. 아시아인은 미안스러운 공간을 차지한다. 우리는 진정한 소수자로 간주될 만한 존재감조차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는다. 다양성 요건을 채울 만큼 인종성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너무나 탈인종적이어서 실리콘 같은 존재다. - P23

대중의 머릿속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은 모호한 연옥 상태에 놓인다. 백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니며, 흑인에게는 불신당하고 백인에게는 무시당하거나 아니면 흑인을 억압하는 일에 이용당한다. 우리는 서비스 분야의 일개미이며 기업계의 기관원이다. 우리는 리더가 되기에 적절한 "얼굴"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에 대량으로 숫자를 처리하며 기업의 바퀴가 잘 굴러가도록 기름이나 치는 중간 관리자가 된다. 사람들은 우리의 콘텐츠를 문제 삼는다. 저들은 우리가 내적 자원이 없다고 여긴다. 나는 겉으로는 태연해 보이지만, 역부족이라는 기분에 함몰된 내 상태를 감추기 위해 물밑에서 미친 듯이 발을 저으며 언제나 과잉 보상을 한다. - P26

우리는 마치 서로 밀어내는 두 개의 음이온과도 같았다. 소년이 나를 함부로 대한 것은 그가 자신을 혐오했기 때문이다. 내가 소년을 함부로 대한 것은 내가 나를 혐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혐오한다는 증거가 있나? 왜 나는 그의 수치심이 그 네일숍을 망치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 P30

아이오와에서 미량으로 솔솔 새어 나오던 인종주의는 은근히 야비했다. 나는 웬 피해망상이냐며 항상 나 자신을 비판했다. 강의 중에 내가 인종 정치를 거론할 때마다 경멸의 장벽에 직면했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급기야 나는 그들의 경멸을 내면화하여 인종을 주제로 하는 시들을 너무나 인종스럽다며 비웃었다. 아시아 정체성이라는 주제만으로는 예컨대 자본주의처럼 좀 더 묵직한 주제와 함께 엮지 않는 한 불충분하고 부적절하다고, 저들은 내게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아이오와 문예창작 과정에 다니던 다른 유색인종 작가 중에 정체성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 싫어서 자신의 시와 소설에서 인종적 요소를 말끔히 지워버린 사람들을 알고 있다. 지금 되돌아보면 묘하게도 그들은 전부 아시아계 미국인이었다. - P35

아무 생각 없는 백인에게 인종 문제를 참을성 있게 가르치기란 정말 고되고 피곤하다. 내가 가진 설득의 능력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야 한다. 인종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수다로 끝날 수가 없다. 그것은 존재론적이다. 그것은 남에게 내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왜 아픔을 느끼는지, 나의 현실이 그들의 현실과 왜 별개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아니, 실상은 그보다도 훨씬 더 까다롭다. 왜냐하면 서구의 역사, 정치, 문학, 대중문화가 죄다 저들의 것이고, 그것들이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P37

미국인 대다수는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티슈를 크리넥스라고 부르듯 중국인을 아시아인을 부르는 대유법으로 여긴다. 저들은 우리가 수많은 민족의 느슨한 연합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시아계 미국 사회에서 "우리"를 가늠할 자격 조건은 너무나 많다. 남동아시아인, 남아시아인, 동아시아인과 태평양 섬 주민, 성 소수자와 이성애자, 무슬림과 비무슬림, 부자와 빈민일 수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아시아인은 모두 자기를 혐오할까? 나를 갉아먹는 자존심이 인종적 현상이 아니라 그냥 나 개인의 빌어먹을 문제라면? - P38

아시아인은 같은 인종 집단 내에서 가장 소득 격차가 심하다. 노동계급 중에 아시아인은 의류 산업과 서비스 산업에서 제3세계 수준의 노동 환경에 노출된 채 최저임금 이하의 급여를 받으며 일하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노예 같은 존재인데도, 복지가 축소되면 백인 노동자만 타격을 입는 것처럼 가정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한 점의 불평이라도 시작할라치면, 미국인들은 갑자기 우리를 다 안다는 식이다. 너희가 왜 화를 내! 다음은 너희가 백인이 될 차례야! 우리가 조립라인 위에 줄줄이 놓인 아이패드인 양. - P38

조르조 아감벤이 말하는 ‘벌거벗은 생명‘은 사회의 보호 속에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대조되는 순전한 생물학적 삶이며, "누구든 그를 죽여도 살인죄를 짓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는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오로지 영원한 도주를 통해서만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식물이나 돼지처럼 인간의 몸이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으로 축소된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매춘부가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이 홀로 죽으면, 그가 존재했다고 할 수 있을까? - P40

이민자가 동화됨으로써 얻는 특권은 남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그렇다고 동화(assimilation)를 권력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일단 힘이 생기면 존재가 노출되어서 과거에 도움이 되었던 모범 소수자 자격이 이제는 그 사람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존재가 아니어서 그렇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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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은 멋지고 아주 존경스러운 것이기는 하나, 세상에도 보기 흉한 송장 같은 몸뚱이에 들어 앉아, 통탄스럽게도 다른 능력들을 먹어 치우는 버릇이 있어, 지성이 가장 큰 덩치로 자란 곳에서는 마음도, 감각도, 아량도, 자비도, 인내도, 친절과 그 밖의 모든 것들이 질식 직전에 몰리게 된다. 게다가 시인들은 자신을 높이 평가하며, 다른 사람들은 하찮게 본다. 그리하여 시인들은 항시 반목하고, 상처를 입히고, 시기하며, 재치 있는 말대꾸에 바쁘다. 그것도 달변으로 한다. 그리고 탐욕스럽게 공감을 요구한다. - P189

이른 4월의 화창한 밤이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초생달의 빛과 섞이고, 거기에 가로등 불빛이 가세해서 인간의 얼굴과 렌 씨의 건축물들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그럴 수 없이 부드럽게 보였지만, 그것이 녹아 없어지려는 지점에서 은색의 불빛이 그것을 다잡아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대화도 그래야 한다고 올랜도는(바보 같은 공상에 잠기면서) 생각했다. 사교계도 그래야 하고, 우정도 그래야 하고, 사랑도 그래야 한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인간 상호 간의 교제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는 순간, 아무렇게나 배열된 헛간들, 나무들, 건초더미들과 마차가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의 완전한 상징처럼 보여 우리는 또 다시 탐색을 시작한다. - P191

멀리서 야경꾼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서리 내리는 새벽 정각 열두 시오." 이 말이 입 밖에 떨어지자마자 자정을 알리는 시계의 첫 번째 소리가 들려 왔다. 그때 처음으로 세인트폴 대성당의 둥근 지붕 뒤에 모여 있는 작은 구름이 올랜도의 눈에 띄었다.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구름은 커지면서 주위를 어둡게 했고, 맹렬한 속도로 퍼졌다. 동시에 가벼운 미풍이 일더니, 자정을 알리는 여섯 번째 종소리가 울릴 때쯤에는, 동쪽과 서쪽과 북쪽 하늘은 개였는데도, 하늘 전체가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어둠으로 덮여버렸다. 그러고는 구름이 북쪽으로 퍼져나갔다. 런던의 높은 지대를 차례로 구름이 삼켜버렸다. 불빛을 환하게 밝힌 메이페어만이 대조적으로 전보다 더 환하게 불타고 있었다. 여덟 번째 종소리가 울리자, 구름 조각 몇 개가 서둘러 피커딜리 위로 퍼져 나갔다. 그 구름들은 모여서 맹렬한 속도로 서쪽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았다. 아홉 번째와 열 번째, 그리고 열한 번째 종소리가 울리자, 거대한 어둠이 런던 전체를 뒤덮었다. 자정을 알리는 열두 번째 소리와 함께 주위는 완전히 캄캄해졌다. 사나운 구름 덩어리가 도시를 뒤덮었다. 모든 것이 캄캄했다.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18세기가 끝이 났다. 19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 P199

더욱 나쁜 것은, 이제 눅눅한 습기가 모든 집에 스며들었다는 사실이다–습기라는 것은 가장 교활한 적인데, 햇빛은 커튼으로 막을 수 있고, 서리는 뜨거운 불로 녹일 수 있는데 비해, 습기는 우리가 잠든 사이에 침입하기 때문이다. 습기는 조용하고 보이지 않으며 도처에 존재한다. 습기에 나무가 불어나고, 물주전자에 백태가 끼게 하고, 쇠를 부식시키며, 돌을 못 쓰게 만든다. 이 과정은 너무도 천천히 진행되어, 우리가 서랍장이나 석탄통을 들어 올렸을 때, 우리 손 안에서 모든 것이 조각이 날 때에야 비로소 습기의 피해를 알게 된다. - P200

습기는 안으로 뚫고 들어왔다. 사람들은 가슴에는 냉기를, 머리에는 습기를 느꼈다. 그들은 감정을 어떻게든 따뜻하게 녹여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에 이런저런 꾀를 부려보았다. 사랑과 탄생, 죽음이 갖가지 미사여구에 싸였다. 남녀 두 성은 점점 더 거리가 벌어졌다. 솔직한 대화는 허용되지 않았다. 쌍방 모두에게서 핑계와 은폐가 끈덕지게 행해졌다. 그리고 밖의 축축한 대지에서 담쟁이나 상록수가 무성한 것처럼, 안에서도 마찬가지로 높은 출생률을 구가했다. 평균적인 여인의 일생은 출산의 연속이었다. 19세에 결혼해서 30세가 될 즈음에는 15명 내지는 18명의 아이를 낳았다. 쌍둥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해서 대영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습기는–습기를 막을 재주가 없었으므로–목공예품으로 들어간 것 처럼 잉크병에도 들어왔다–그 결과 문장이 불어나고, 형용사가 늘어나고, 서정시는 서사시가 되고, 한 칸 정도 길이의 에세이로 쓸 수 있었던 것이 열 권, 스무 권의 백과사전이 되었다. - P202

이 모든 것들이 이것을 막을 재주가 없는 민감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유스비우스 처브가 증인이 되어 줄 것이다. 그의 회고록 끝부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가 어느 날 아침 "온통 하찮은 것에 대해" 2절판 원고지 35매를 쓰고, 잉크병 마개를 닫은 뒤 정원을 한 바퀴 돌기 위해 나갔다. 곧 그는 자신이 관목 숲에 둘러싸인 것을 알았다. 그의 머리 위에서는 무수한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그는 "발밑에서 훨씬 더 많은 잎더미를 밟고 있는 듯"했다. 정원 끝자락에 피워놓은 젖은 모닥불에서 짙은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 지구상의 어떤 불로도 저 거대한 초목 더미를 모두 태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어디를 보아도 식물이 무성했다. 오이들의 줄기가 풀밭을 지나 "소용돌이꼴로 말리면서" 그의 발치까지 뻗어 있었다. 거대한 꽃양배추들은 층층이 쌓이며 자라나, 그의 혼돈된 상상속에서 그것들은 느티나무들과 겨루는 듯했다. 암탉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색깔의 달걀을 끝없이 낳았다. 그때 그는 한숨을 쉬면서, 그 자신이 애가 많다는 생각과, 지금 집 안에서는 불쌍한 아내 제인이 열다섯 번째 애기 출산의 진통 한가운데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어떻게 암탉을 나무랄 수 있겠는가, 하고 자문했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천상 그 자체, 또는 천상의 정면, 즉 하늘은 천사들의 동의를, 사실은 선동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냐하면 하늘에는 겨울 여름 할 것 없이, 일 년 내내 구름이 고래처럼, 아니 코끼리처럼 몸을 틀고 뒹굴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것이 아니었다. 처브는 그에게 압박해오는 한없이 드넓은 하늘을 이렇게 비유할 수 밖에 없었다. 즉 영국 제도 위에 넓게 퍼져 있는 하늘 전체가 거대한 깃털 침대와 다름없다고, 정원과 침실과 닭장의 무차별적인 생산력이 하늘에 그대로 복사되어 있었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 가 지금 인용한 글을 쓰고, 그의 머리를 가스 오븐에 디밀었으며, 나중에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일이 끝난 뒤였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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