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저서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농담을 경향성 없는 농담과 경향성 있는 농담의 두 범주로 분류한다. 경향성이 없는 농담은 아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들려주듯 무해하고 무독하다. 경향성을 갖는 농담은 공격적이거나 저속하거나 아니면 둘 다여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 억눌린 부분을 캐낸다. 1940년대 미국 흑인 연예인들은 무대 뒤에서 터무니없이 과장된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런 농담을 가리켜 ‘거짓말‘이라고 불렀다. 그 ‘거짓말‘은 경향성을 지녔으며, 고지식한 백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길모퉁이, 당구장, 이발소에서 구전되었다. 프라이어는 – 이야기를 왜곡하고, 시끄럽게 불평하고, 큰소리치고, 볼링핀이든 오르가슴에 이른 촌놈이든 닥치는 대로 흉내 내며–거짓말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프라이어가 들려주는 거짓말은 내가 당시 읽고 있던 대부분의 시와 소설보다 인종에 관해서 솔직했다. - P62
비평가들이 지적한 대로 프라이어의 탁월함은 영리한 말솜씨뿐만 아니라 독백을 체화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 흉내 낼 수 있고 방대한 인간의 감정을 잡아내는 일에 눈부신 재능을 갖춘 1인 앙상블 팀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얼굴에 매료됐다. 만약 프라이어의 입담이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낸다면, 그의 얼굴은 그가 받은 상처를 드러낸다. 프라이어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던 반려 원숭이들이 어떻게 죽었으며 그가 뒤뜰에서 슬퍼하는데 이웃집 셰퍼드가 담장을 뛰어 넘어와 그를 위로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러두건대, 프라이어는 여기서 개를 연기한다. 하지만 그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눈으로 인간의 모든 아픔을 상기시킨다. - P63
존 키츠에 따르면 시인은 "정체성이 없다–시인은 끊임없이 어떤 다른 사람을 대신하고 그 사람의 역할을 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문학은 모든 주체가 피해 가는 그 중립자, 그 합성물, 그 모호성이며, 글을 쓰는 사람의 정체성을 비롯하여 모든 정체성이 실종되는 덫이다". - P67
나는 독자가 내 시를 읽고 나서 내 이름을 보면, 그 시와의 연결 퓨즈가 끊어지면서 시가 좋긴 한데 다시 생각해보니 공감은 안 간다고 여기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는 어떤 증거가 있단 말인가? 그냥 내가 재능이 없어서 그런 건지 어찌 알겠는가. 그걸 모른다는 것이 바로 문제였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나는 이 꼼짝달싹 못 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늘 내 신체적 정체성이 문제인 줄 알았으나 글을 쓰면서 깨달은 점은 글에서 나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여전히 내 정체성에 초연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며, 그 때문에 일종의 절망 상태로 곤두박질쳤다. - P68
코미디에는 시에서 만날 수 없는 투명함이 있다. 코미디언은 정체성이 없는 척할 수가 없다. 그들은 무대에 올라가 총살당하는 사람처럼 벽돌 벽을 등지고 선다. 도저히 숨을 곳이 없으므로, 별수 없이 자기 정체성을 먼저 인정하고 나서("자, 여러분은 내가 흑인이라는 걸 알아챘을 겁니다.") 비로소 다른 소재로 넘어가거나 아니면 정체성 문제를 더 본격적으로 파고든다. 또한 청중을 억지로 웃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허튼소리로 코미디를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진짜 웃음은 오르가슴과 마찬가지로 의지와 관계없이 근육이 갑자기 수축하면서 터져 나온다. 놀라야 웃음이 나오고, 놀라는 것은 한 번뿐이다. 그래서 코미디는 가차 없이 찰나적이다. 농담만큼 금방 낡아버리는 것도 없다. - P69
시 낭독은 내가 시에 대한 신념을 잃기 일보 직전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것 말고는 다른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낭독회는 어쩌면 한때는 공동생활의 한 중요한 형태였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정형화된 농담, 숨소리 섞인 "시인의 목소리", 기계적인 웃음소리, 누가 혼자서 음 하며 동의하는 소리 등등 모든 것이 고루한 교회 예배 의식처럼 되어버려, 예전에 지녔던 의미는 흔적만 남았다는 느낌이 심하게 들었다. 나는 현자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시의 힐링 효과를 칭찬하는 시인 역할에 장단을 맞추었지만, 속으로는 그 감상적인 달콤함에 당뇨 쇼크가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최악은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예술적 진정성이 훼손될까 봐 청중의 개념을 거부한 바로 그 시인이었다. 그러나 낭독회에서는 청중을 부인할 길이 없었다. 나는 강연장을 메우고 앉아 지루해하는 백인들을 위해 공연을 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인정받기를 절실하게 갈망했다. - P70
나는 어떤 상을 수상한 유색인종 시인이 질의응답 시간에 한 말을 잊지 못한다. "인종에 관해 쓰고 싶으면 예절 바르게 써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니까요." - P73
시인 프라기타 샤마가 말한 대로, 미국인은 죽음을 애도하는 일도 기한을 정해놓고 하듯 인종에 관해서도 유효 기간을 설정한다. 미국인들은 일정 기한이 지나면 우리가 인종 문제를 극복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비록 나는 회의적이지만, 이 기회에 우리가 미국 문학계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자동으로 규정하는 낡은 인종 서사, 우리의 삶을 백인 청중의 구미에 맞추면서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다양한 현실을 삭제해버리는 낡은 인종 서사를 갈아치우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어진 공식에 따라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일을 그만두자는 것이다. - P75
라히리의 소설은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show, don‘t tell)라는 문예창작 과정의 교리를 대체로 잘 따르고 있다. 그렇게 하면 독자는 등장인물의 고통을 체험하면서도, 수전 손택이 말한 대로 자신의 특권을 등장인물의 고통과 "동일한 지도" 위에 위치 매김 하지 않아도 된다. 등장인물의 내면적 생각이 제거되었으므로 독자는 빈번한 사건 개입에 방해받지 않고 등장인물의 의식이라는 조종석에 앉아 영화 보듯 등장인물의 시각을 체험할 수 있다. - P76
물론 유색인종 작가는 인종적 트라우마를 이야기해야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너무나 오랫동안 백인이 상상하는 대로 구성되어왔다. 출판업계는 작가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를 기대한다. 즉 등장인물이 특이한 가족 관계나 역사적 비극에 의해 시험에 들었다가 결국 자기 긍정이라는 계시에 도달하는 이야기를 기대한다. 아시아계 미국인 작가들의 소설을 보면 작가가 트라우마의 배경을 머나먼 고국 땅이나 고립된 아시아계 가족 내부로 설정하여, 그들의 아픔이 미국의 제국주의 지정학이나 미국 내 인종주의에 대한 새삼스러운 증거가 아님을 확실히 해두는 작품이 많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외부적 요인은–가부장적인 아시아인 아버지, 과거 시대의 백인들–독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도록 충분히 멀찌감치 설정한다. - P77
리처드 프라이어는 고통받는 흑인의 육체가 오랜 세월 미국인들의 오락거리였다는 점을 완전하게 직시하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리처드 프라이어에 관한 특집 기사를 『뉴요커』에 기고한 힐튼 얼스는 흑인의 체험을 미화하는 "단일한 이야기"에 대해 언급한다.
[흑인성이라는 주제는 미국인의 사고에서 기이하고도 불만스러운 여정을 거쳐왔다. 왜냐하면 첫째로 흑인성은 들어줄 사람을 찾기 위해 거의 언제나 백인 위주의 청중에게 설명되어야 했고, 둘째로 흑인성은 오로지 한 가지 이야기 – 진보 성향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억압당한 이야기 – 만 들려준다고 상정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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