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지의 용도는 밭이었는데 몇 년간 묵어서 거의 잡초밭이었다. 우리는 잡초를 제거하기 시작했고, 5분도 안 되어 저질 체력의 남자가 나무 아래에 앉았다. 나는 낫의 날 방향에 따른 작업의 효율성을 생각하며 일을 했다. 무뎌지는 기미가 보이면 다른 낫으로 교체해서 다시 일했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옆 밭의 할머니가 남자에게 다가오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저런 일꾼은 어디서 구했디야? 나도 좀 빌려줘!!" - P18

「닳아지는 살들」이나 「오발탄」, 최인훈의 「웃음소리」 는 청각 소설이었다. 책을 읽고 혼자 해가 지는 운동장을 가로지를 때 귀에서 소리가 들렸다. ‘가자!‘ 절규이거나 살아 끝날 것 같지 않은 규칙적인 굉음이었다. 그때 나는 인생을 선빵당한 느낌이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누군가에게 ‘사랑해‘ 선빵을 날리고 싶어졌다. 햇살이 삶에 지친 그림자를 끌며 지나가지 않는가! 맞고 기절하든지 말든지. - P21

12살 여자아이의 공장은 밤 11시도 불사하는 가혹한 곳이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우산도 없이 처마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는데 사는 게 억울했다. 그때 내가 처마 밑에서 억울함으로 떠올렸던 생각이 나중에 보니 엥겔스 의대정부 질문에 있던 내용들이었다.
‘노동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은 몇 세부터인가!‘ - P23

기억이 다시 꼬이기 시작한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하겠다.
바람이 소슬해졌다. 집에 가면 오늘 읽은 소설의 독후감을 써야겠다. 기억이 나의 뺨을 때리기 전에. - P28

여자들은 생활력이 강해서 자식을 키운 것이 아니었다. 혼자 자식들을 키우다 보니 강해진 것이었다. - P31

나의 엄마는 혼자 생계를 짊어지고 모진 세상을 억세게 살았다. 그녀의 해방구는 욕설이었는데 노점상을 하거나 보따리 장사를 할 때도 손님과 싸움이 붙으면 거나한 욕설로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했다. 욕설의 내용을 보면 우선 상대방의 집안을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이를테면 조상을 쌍놈이나 후레자식으로 만들어 가문에 먹칠을 했다. 그다음 인체의 신비를 이용해 구석구석 세심하게 기운을 뺐다. 쌔가 만발하고 눈까리가 썩어 문드러지며 대가리를 절구에 빻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동반자살을 노래하는 것이었는데 ‘오늘 너 죽고 나 죽자‘였다. - P49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은 내 영구 머리를 어루만지며 최면을 걸었다. 너는 이 나라를 짊어질 인재로 우리나라를 쌍놈의 나라로 만들면 안 된다는 요지였다. 방언 터지듯 입에서 나오는 욕설과 달리 나는 아름다운 문장을 좋아했다. 『빨강머리 앤』 끝줄의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평화롭도다.‘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독후감을 썼는데 읽어본 선생님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돌아온 탕아‘ 보듯 반색했고 ‘수렁에서 건진 내 딸‘ 보듯 예뻐했다. - P51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여자아이들에게 B군이 "야, 이 미친년들아!"를 시전한 것이다. 나는 그날 햄버거를 뜯어먹는 B군에게 왜 욕을 하면 안 되는지 눈물로 설명을 했다. 그날 B군이 내게 한 말은 이것이었다.
"내가 욕을 하면 엄마가 슬프구나. 근데 할머니는 내가 욕을 하면 막 웃거든!" - P52

성장한 아들들과 독서토론을 할 때 각자의 주장을 펼친다. 그러나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때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내가 튀어나온다.
"싸가지 없는 새꺄!" - P52

"공부의 목적은 인격의 함양이지. 암, 그렇고말고! 다음에 잘하면 되지."
그렇게 말하고 방에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악을 썼다. - P60

나는 병원에서 시어머니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고부가 아닌 같은 여자로서 느끼는 슬픔이었다. 왜 성년인 자식의 인생까지 간여하고 걱정을 하십니까. - P64

그런데 나는 아니었다. 돈을 벌지만 살림을 남에게 맡겼고, 아들을 존경하는 기색도 없이 혼자 책을 보았다. 게다가 각방을 쓰며 해외 출장이다 뭐다 하며 집을 자주 비웠다. 음식을 해서 시누이에게 갖다 바치지도 않았다. 친정 식구들이 자주 들락거리며 재산을 빼돌리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내가 축적한 재산을 당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분통을 터트렸다. 어느 날 내가 말했다.
"아들을 데려가셔도 좋아요."
그녀의 표정이 생각난다. 억울하고 분하고 황당한 얼굴이었다. 여자가 시집을 오면 그 집안의 노예인데, 노예가 노예인 줄 모르니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세상을 뜨기 전 병원에서 내 손을 잡고 말했다.
"작은애야, 내 아들을 잘 부탁한다."
오십이 넘은 아들의 무엇을 부탁한다는 것이었을까.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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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앉아 거의 조는 상태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사실 아무것도 모른 채 단지 마음속 맨 밑바닥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허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건물들이 세워졌다가 가치를 평가받고는 수준 미달로 판정 나서 철거되는 일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반복되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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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는 자기가 심각한 신경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필요한 약 상자들 각각의 위치를 주의 깊게 기억해 두고 있을지도 몰랐다. 한번 쓱 살펴보기만 해도 자신만이 아는 은밀한 순서에 뭔가 이상이 생겼음을 즉시 눈치 챌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서 무섭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할 뿐이었다. 약이 필요했고, 어떻게든 침실을 빠져나와 마침내 약을 구했다. 결국 발각돼서 처벌된다 해도 적어도 하고자 하는 일을 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며 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동안 애니가 한 짓들을 생각해 보건대, 그때 폴이 느낀 체념은 확실히 최악의 징조였다. 체념은 곧 애니가 폴을 어떠한 확실한 선택권도 가질 수 없는 고통에 찌든 한 마리 짐승으로 전락시켰다는 증거였다. - P161

폴은 한동안 날름쇠를 멍청하게 쳐다보면서 해군의 오랜 격언을 생각했다.
‘잘못될 조짐이 보이는 일은 결국 잘못된다.‘ - P171

‘네가 말하는 것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uchim라는 거야. ‘기계 장치에서 나타난 신‘이라는 뜻인데,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다급할 때마다 신이 갑자기 기계 장치를 통해 나타나서 위험을 해결해 버리는 데서 유래한 말이지. 극작가가 글을 쓰다 영웅이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궁지에 몰리면, 꽃으로 장식한 기계 의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장면을 집어넣는 식이지. 영웅이 그 의자에 올라타면 하늘로 끌어 올려져서 위험에서 벗어나는 거야. 아무리 멍청한 시골뜨기라도 그 장면에 숨어 있는 상징성은 알아볼 수 있어. 영웅은 신에게 구원받은 거야. 그런데 가끔씩 전문 용어로 ‘케케묵은 비행기 좌석 밑에 낙하산 수법‘ 이라고 불리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1700년경이 되자 마침내 유행이 끝나 버렸어. 물론 『로켓맨』 시리즈나 『낸시 드루』 추리 소설 문고 같은 만병통치 장르에서는 예외였지만. 애니, 넌 그 소식을 못 들었나 보구나.‘ - P193

폴은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상상은 할 수 있었다. 그의 원고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옳지 않다고 항변하는 애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애니는 옳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고, 옳지 않은 이유를 편집자가 때때로 내뱉는 전혀 믿을 수 없는 문학적 궤변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독자로서 변함없이 부정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었다. 폴은 그것을 이해했고, 그 때문에 자신이 부끄러워함을 알고 놀랐다. 애니가 옳았다. 폴은 사기 치는 글을 썼던 것이다. - P197

애니가 갑자기 사나운 기세로 폴을 향해 껑충 뛰어올랐다. 폴은 애니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허드슨 자동차에서 로켓맨을 빼내려고 사기를 쳐 버린 더러운 영화 각본가 새끼를 붙잡을 수 없기에 대신 자신을 붙잡고 분명히 예전처럼 갖은 학대를 가할 거라고 느꼈지만, 전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애니가 폴을 위해 열어 보인 과거라는 창문 속에서 폴은 오늘날 그녀의 불안정한 정서를 만들어 낸 씨앗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공포에 질려 버렸다. 애니가 느끼는 불공정함은 유치한 것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명백하게 현실적인 문제였던 것이다. - P199

‘좋아. 약을 가져올 때마다 두 번에 한 번은 두 알 중에 한 알을 먹지 않겠어. 한 알은 삼키고 나머지 한 알은 혀 밑에 숨겨 뒀다가 애니가 물 잔을 가지고 나가면 다른 약들과 함께 매트리스 밑에 집어넣을 거야. 그런데 오늘은 아니야. 오늘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된 것 같아. 내일부터 시작해야지.‘
이때 마음속에서 하트의 여왕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게 훈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서 우리는 어제 우리가 한 짓을 깨끗이 바로잡았고, 내일도 우리가 한 짓을 깨끗이 바로잡을 예정이다. 그러나 오늘은 결코 그러지 못하리라.‘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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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분노와 수치심이 들끓었고, 그러면서 처음으로 다리가 뻐근하게 쑤셔 왔다. 그렇다. 작품, 작품에 대한 자부심, 작품 그 자체의 귀한 가치······. 고통이 심해지기만 하면 그 모든 가치들이 검은 장막 속으로 사라졌다. 애니가 그런 꼴로 만들어 버릴 거라는 사실이, 자신을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가 작가라고 여기며 성인 시절의 대부분을 살아온 그를 애니가 그런 꼴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폴로 하여금 애니를 너무 끔찍해서 도망쳐야만 하는 존재로 여기게끔 했고, 애니가 그를 죽이지 않는다 해도 그의 안에 들어 있는 무언가를 죽여 버릴 것만 같았다. - P60

인사불성이 되어 편안하게 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인사불성은 폴의 초대를 거절했다. 대신 ‘30시간째‘가 찾아왔고 그 뒤 에 ‘40시간째‘가 찾아왔다. ‘고통왕‘ 과 ‘너무 목말라‘ 가 합체해서 한 마리가 되었다. (‘나 배고파‘는 오래전에 흙먼지 속으로 뒤처져 버렸다.) 폴은 자신이 현미경 검사판 위에 올려진 납작한 세포 쪼가리나 낚싯바늘 끝에 꿰인 지렁이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두 다 하염없이 꿈틀대며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잖은가. - P79

애니가 재빠르게 주먹으로 원고를 후려쳤다. 둔탁한 소리가 세 번 튀어나왔다. 19만 단어짜리 필생의 역작을 눈앞에 두고 폴은 고통 없이 평온한 상태가 될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19만 단어짜리 필생의 역작을 눈앞에 두고, 폴은 시간이 지날수록 처분해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짐을 느꼈다.
알약. 알약. 망할 놈의 알약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필생의 역작이란 건 허울 좋은 허상일 뿐이지만, 알약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현실이었다. - P86

‘어휴, 네가 무슨 로마 시대 때 적에 맞서 홀로 다리를 지켰다는 호라티우스라도 돼? 도대체 그런 짓을 해서 누굴 감동시키겠 다는 거야? 너 이게 영화나 텔레비전 쇼인 줄 아냐? 용기를 과시 해서 청중들한테 점수 따고 싶은 거야? 애니의 소원을 들어주든가 아니면 버티는 수밖에 없어. 버티면 넌 죽고, 그러면 애니는 그냥 원고를 태워 버리면 그만이야. 이젠 어쩔 거야? 침대에 누워서 그깟 책 때문에 고통당할 거야? 이제까지 출간된 ‘미저리‘ 시리즈 중 가장 적게 팔린 책의 반만큼도 안 팔릴 책 한 권 때문에? 피터 프레스콧 같은 평론가가 위대한 문학의 전당 《뉴스위크》에다 가장 고상하고 신사적인 방식으로 비꼬고 욕하는 평론 기사나 써 댈 그런 책 때문에? 야, 야. 정신 차려! 갈릴레오 같은 위인도 사람들이 심각하게 밀어붙이니까 바짝 쫄아서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했다는 걸 알아야지.‘ - P87

악착같이 살아남으려는 마음속의 기회주의자가 저질러 버리라고 선동했다. 그러나 한쪽 구석에서는 혼수상태 직전의 패배한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며 울부짖었다.
‘19만 단어짜리! 필생의 역작! 2년간의 고단한 작업이 일구어 낸 작품!‘
그리고 진정한 핵심은 이것이었다.
‘진실! 염병할 진실에 관하여 네가 알아낸 것이잖아!‘ - P88

항상 그랬듯이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축복받은 안도감이 느껴졌고, 눈부신 빛으로 충만한 구멍 속에 빠져드는 기분이 들었다.
항상 그랬듯이 원하는 만큼 훌륭하게 써내지 못할 거라는 우울한 예감이 들었다.
항상 그랬듯이 작품을 끝내 완성할 수 없을 거라는,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는 막다른 벽에 쏜살같이 부딪칠 거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항상 그랬듯이 여행을 시작한다는 놀랍고도 기쁘고 벅찬 설렘이 온몸을 휘감았다. - P90

다른 추리들은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엉성할지도 몰랐지만, 애니 윌크스를 바라보는 이런 시각은 지브롤터 해협의 험준한 바위산처럼 견고했다. 폴은 『미저리』를 쓰기 위해 자료 조사를 한 경험이 있어서 신경 불안과 정신 이상에 관해 보통 이상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폴이 알기로 단순한 신경증과 정신병의 경계 사이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는 환자의 경우 극도의 우울증과 공격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쾌활한 흥분 상태가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데, 그 모든 감정들 밑에는 우쭐대기 좋아하며 상처받기 쉬운 자아가 깔려 있고, 그런 자아는 모든 타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 있으며 자기가 위대한 드라마 속의 주인공으로 산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이 세상에는 본성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수 백만 명이 폭발할 날만을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는 것이다. - P105

그들의 자아는 연속적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철저하게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일련의 생각들은 예측이 가능하다. 모두들 같은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사람의 사고는 생각하고 있는 주제에 관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목표, 상황, 또는 어떤 인물에까지 도달한다. (또는 환상을 꿈꾸는 단계에까지 도달한다고 할 수 있다. 신경증 환자는 통제 가능한 현실과 통제 불가능한 환상이 서로 다름을 인식하지만, 정신병 환자는 그 둘을 하나로 보고 똑같이 취급한다.) - P105

폴과 타자기가 서로 물끄러미 쳐다보도록 남겨 둔 채 애니는 발랄한 소녀처럼 방을 뛰쳐나갔다. 애니가 등을 돌리는 순간 폴의 웃음이 사라졌다. 타자기의 웃음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폴은 이 상황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 그때 이미 단번에 꿰뚫고 있었다. 직접 손으로 쳐 보기도 전에 타자기에서 어떤 소리가 날지, 그 타자기 특유의 웃는 표정 사이로 흘러나오는 옛날 만화 주인공 더키 대들스처럼 요란하게 딸깍딸깍거리는 소리가 어떨지 훤히 알 수 있었듯이 말이다. - P116

폴은 턱을 가슴뼈 있는 곳까지 푹 숙이고 겁에 질렸으면서도 영악함이 묻어 나오는 눈으로 잽싸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약을 금방 먹었으니 아직 약효가 나타날 때가 아님을 잘 알았지만, 이미 약 기운이 느껴졌다. 약을 먹는 행위보다 약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깊숙이 마음에 와 닿는 듯했다. 마치 달과 바닷물의 통제권을 선사받은 기분이었다. 또는 직접 가서 뺏어 온 기분이었다. 웅장하고 장엄한 생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죄의식이 들게 하는 무서운 생각이기도 했다. - P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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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둠의 심연을 들여다볼 때, 어둠의 심연도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프리드리히 니체— - P13

고통은 소리 아래 어딘가에 있었다. 고통은 태양의 동쪽과 그의 귀 남쪽에 있었다. 확실히 아는 것이라곤 그게 다였다.
아주 오래전부터인 듯한 긴 시간 동안(그리고 고통과 폭풍에 뒤 덮인 안개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물이었던 때부터) 그 소리는 외부에 존재하는 유일한 자극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또 어디에 있는지 몰랐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죽고 싶었지만, 여름철 먹구름처럼 마음을 가득 채운 고통에 젖은 안개 속에서는 스스로 죽고 싶어 한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다. - P16

반쯤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는 말뚝과 현재의 상황을 연관 지을 수 있었다. 깨달음이 마치 손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듯했다. 고통은 바닷물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기억 속에 각인된 꿈의 교훈이었다. 고통은 단지 오고 가는 것처럼 보일 뿐, 말뚝과 같았다. 때로는 덮여 있었고 때로는 모습을 드러냈지만 항상 제자리에 박혀 있었다. 고통이 짙고 단단한 회색 구름에 가려 그를 괴롭히지 않을 때, 바보스럽게도 그는 감사했다. 그러나 더 이상 속지 않았다. 고통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면서 다시 드러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게다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고통은 두 개의 말뚝이었고, 마음으로 사실을 받아들이기 오래전부터 그의 일부는 그 부서진 말뚝들이 곧 그의 부서진 두 다 리를 의미함을 알고 있었다. - P19

무엇보다 폴을 불안하게 한 것은 애니의 딱딱함이었다. 애니의 몸속에는 혈관도 내장도 없을 것만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직 딱딱한 애니 윌크스일 것만 같았다. 폴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애니의 눈이 사실은 그려 넣은 것이라고 확신하기까지 했으며, 초상화가 걸린 방 안에서는 어디로 움직이든 간에 초상화 속 인물의 눈이 자기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했다. 만약 두 손가락으로 V를 만들어 애니의 콧구멍을 찔러 보면 (만약 들어갈 틈이 있다면), 손가락이 구멍 속으로 1센티미터도 못 들어가서 딱딱한 장애물에 부딪칠 것 같았다. […] 그러므로 애니를 열광적인 숭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우상으로 여긴 폴의 생각은 사실 그다지 놀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상처럼, 애니는 오직 한 가지만을 전해 주었다. 자꾸만 두려움으로 짙어지는 불안한 감정을. 우상처럼, 애니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 - P23

"아니, 물론 그건 아니에요. 내 말은 그저······."
‘그저 지갑 안에 내 나머지 인생이 들어 있으니까 물어본 거지.
이 방을 벗어난 나의 인생이. 고통을 벗어난 나의 인생이. 시간이 마치 지루해진 꼬마가 길게 잡아당긴 입속의 풍선껌처럼 죽죽 늘어지는 이곳에서 벗어난 나의 인생이. 알약이 오기 바로 전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인생은 그렇게 엿가락처럼 늘어졌던 거야.‘ - P26

애니가 긴장을 풀었다. 웃었다. 균열이 닫혔다. 여름 꽃들이 다시 흥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폴은 그 웃음 속으로 손을 뻗었다가는 여차하면 튀어나오길 기다리는 어둠을 만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 P27

폴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 있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려 할 때마다 불쾌한 이미지들이 끼어들었다. 애니의 멍한 모습, 볼 때마다 우상과 암석을 연상시키던 애니의 모습, 그리고 노란 플라스틱 양동이가 무너져 내리는 달덩이처럼 얼굴로 돌진하던 모습. 그런 모습들을 떠올린다고 해서 처한 상태가 바뀔 리 없었고, 사실 아예 아무런 생각도 안 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지만, 일단 애니 윌크스와 그 집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 쪽으로 마음을 돌리기만 하면 생각나는 것이라곤 불쾌한 이미지들뿐이었고, 그 이미지들은 또 다른 불쾌한 이미지들을 줄줄이 불러올 것 같았다. 두려움과 약간의 수치심으로 심장이 너무나 빠르게 고동칠 것 같았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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