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어둠의 심연을 들여다볼 때, 어둠의 심연도 당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프리드리히 니체— - P13

고통은 소리 아래 어딘가에 있었다. 고통은 태양의 동쪽과 그의 귀 남쪽에 있었다. 확실히 아는 것이라곤 그게 다였다.
아주 오래전부터인 듯한 긴 시간 동안(그리고 고통과 폭풍에 뒤 덮인 안개만이 유일하게 존재하는 사물이었던 때부터) 그 소리는 외부에 존재하는 유일한 자극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또 어디에 있는지 몰랐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죽고 싶었지만, 여름철 먹구름처럼 마음을 가득 채운 고통에 젖은 안개 속에서는 스스로 죽고 싶어 한다는 것조차 알 수 없었다. - P16

반쯤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는 말뚝과 현재의 상황을 연관 지을 수 있었다. 깨달음이 마치 손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듯했다. 고통은 바닷물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바로 기억 속에 각인된 꿈의 교훈이었다. 고통은 단지 오고 가는 것처럼 보일 뿐, 말뚝과 같았다. 때로는 덮여 있었고 때로는 모습을 드러냈지만 항상 제자리에 박혀 있었다. 고통이 짙고 단단한 회색 구름에 가려 그를 괴롭히지 않을 때, 바보스럽게도 그는 감사했다. 그러나 더 이상 속지 않았다. 고통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으면서 다시 드러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게다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였다. 고통은 두 개의 말뚝이었고, 마음으로 사실을 받아들이기 오래전부터 그의 일부는 그 부서진 말뚝들이 곧 그의 부서진 두 다 리를 의미함을 알고 있었다. - P19

무엇보다 폴을 불안하게 한 것은 애니의 딱딱함이었다. 애니의 몸속에는 혈관도 내장도 없을 것만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직 딱딱한 애니 윌크스일 것만 같았다. 폴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애니의 눈이 사실은 그려 넣은 것이라고 확신하기까지 했으며, 초상화가 걸린 방 안에서는 어디로 움직이든 간에 초상화 속 인물의 눈이 자기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했다. 만약 두 손가락으로 V를 만들어 애니의 콧구멍을 찔러 보면 (만약 들어갈 틈이 있다면), 손가락이 구멍 속으로 1센티미터도 못 들어가서 딱딱한 장애물에 부딪칠 것 같았다. […] 그러므로 애니를 열광적인 숭배 소설 속에 등장하는 우상으로 여긴 폴의 생각은 사실 그다지 놀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우상처럼, 애니는 오직 한 가지만을 전해 주었다. 자꾸만 두려움으로 짙어지는 불안한 감정을. 우상처럼, 애니는 모든 것을 손에 쥐고 있었다. - P23

"아니, 물론 그건 아니에요. 내 말은 그저······."
‘그저 지갑 안에 내 나머지 인생이 들어 있으니까 물어본 거지.
이 방을 벗어난 나의 인생이. 고통을 벗어난 나의 인생이. 시간이 마치 지루해진 꼬마가 길게 잡아당긴 입속의 풍선껌처럼 죽죽 늘어지는 이곳에서 벗어난 나의 인생이. 알약이 오기 바로 전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인생은 그렇게 엿가락처럼 늘어졌던 거야.‘ - P26

애니가 긴장을 풀었다. 웃었다. 균열이 닫혔다. 여름 꽃들이 다시 흥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폴은 그 웃음 속으로 손을 뻗었다가는 여차하면 튀어나오길 기다리는 어둠을 만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 P27

폴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 있다는 것 자체로도 충분히 힘들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려 할 때마다 불쾌한 이미지들이 끼어들었다. 애니의 멍한 모습, 볼 때마다 우상과 암석을 연상시키던 애니의 모습, 그리고 노란 플라스틱 양동이가 무너져 내리는 달덩이처럼 얼굴로 돌진하던 모습. 그런 모습들을 떠올린다고 해서 처한 상태가 바뀔 리 없었고, 사실 아예 아무런 생각도 안 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지만, 일단 애니 윌크스와 그 집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 쪽으로 마음을 돌리기만 하면 생각나는 것이라곤 불쾌한 이미지들뿐이었고, 그 이미지들은 또 다른 불쾌한 이미지들을 줄줄이 불러올 것 같았다. 두려움과 약간의 수치심으로 심장이 너무나 빠르게 고동칠 것 같았다.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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