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만화 다 그렸잖아요. 초사쿠는
안 그려요. 왜죠?
–초사쿠 씨는··· 지금 고통 속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계십니다.
[…]
하지만, 티끌만 한 실마리라도 찾으면···
고통 속에서 그가 한 발짝이라도 내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쁨이란, 고뇌라는 큰 과수에서 맺히는 열매다."
빅토르 위고가 한 말입니다. - P180

–드디어 완성한 거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한테 가닿은 거 같지?
–네. 이상적인 만화를 만들고자 사방팔방 뛰어다닌 끝에···
–그 책은 이제 당신의 보물이야···
–네.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책을 완성해야만,
그리고 그걸 많은 독자분들께 선보이고 감상을 들어야만 비로소 큰 기쁨을 얻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고통···
그 여정 속에야말로 진실한 기쁨이 있다는 것을···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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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계속 그려내는 게 프로라면···
제게 그럴 힘은 없어요···
예전에 한번 큰맘 먹고 창작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치워봤거든요.
그랬더니 만화 바깥의 모든 세계가 선명하게 보였어요.
무척 아름다운 곳이구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납득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쪽 세계를 바라다보고 싶어졌어요.

8년간의 연재가 끝이 나도···
다음주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음 호가 진열되고···
그런 당연한 사실에 약간 상처받는 내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 - P150

–초사쿠 씨가 먼저 말씀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가 군에게 부탁해서 연재를 끝내셨다고···
–요즘 좀 궁지에 몰렸거든···
내 신세에 그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뭐 침울한 마음도 있지만···
동시에 엄청난 해방감도 느껴··· - P151

–날이 갈수록··· 두려워집니다.
존경하는 작가님들께 돌이킬 수 없는 결례를 범하는 건 아닐까··· 불안해집니다.
수지타산을 고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밀어붙인 것,
지금은 마음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설령 그 책이 나오지 못해도, 시오찡을 탓하는 사람은 없을걸.
다들 그럴 각오로 의뢰를 수락한 거야.
적어도 나는 시오찡이 나한테 제안해준 게 내심 기뻤어. - P153

–네코야마 쿠모타로···
그 사람 별일 없죠?
–네!
네코야마 선생님께서는 정정하십니다.
신작도 집필하고 계세요.
–그가 방금 이야기한··· 만화를 그리던 친구예요. - P164

–그 녀석, 평소에는 로맨틱하고 느긋하지만 만화를 그릴 땐 사람이 바뀌잖아요?!
–네! 정말 딴사람이 된 것처럼···
이번 작품도 대단히 집중해서 몰두하고 계십니다.
벌써 콘티도 네 번이나 다시 그리셨죠···
–그래요···
하나도 안 변했네··· - P166

나도 여기서 50년 동안 아내와 둘이 서점을 운영하면서···
아들이 대를 이어주길 바랐지만 집을 나가는 바람에··· 후후···
나름대로 좋은 일, 나쁜 일 참 많았죠
그리고 그동안
쿠모타로는 분명 본인이 가진 마법 전부를 만화에 쏟아온 거겠죠··· - P167

아까 작가 라인업을 보니 떠오르더군요.
시오자와 씨, 일전에 당신이 만들었던
『코믹 밤』···
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다음 책도 기대할게요.
힘내요. 시오자와 씨.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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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밤에는 토오루랑 둘이서 새벽 내내 만화를 그렸어···
눈이 온갖 소리를 빨아들여 적막하기 그지없는 밤에는···
마치 지구에 우리 둘 뿐인 듯한 기분이 들었지···
여름은 완전히 딴판이었어.
모든 게 눈부시게 빛을 발하니···
이곳의 여름은 마치 토오루처럼 빛났지. - P21

있잖아, 토오루···
이 세상에 우리 둘만 있던 건 아니었나봐··· - P29

하지만 그 녀석이 다시 잡지를 만든다는 소문을 들으니···
마음이 왠지 모르게 술렁거린단 말이죠.
응원하고 싶을 만큼 기쁘다가도···
잘될쏘냐 분한 마음이 일어서··· - P49

작년에 우연히 들른 헌책방에서 선생님의 『폰타의 일상』을 발견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예전과는 전혀 다른 울림이 있더군요···
진실된 작품은 읽는 이의 심경이나 성장에 따라
완전히 다른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는 걸 새삼···
곱씹게 됐습니다.
정보가 넘쳐흐르는 요즘 같은 시대라서 더욱, 선생님의 작품이 꼭 필요합니다. - P54

–뭐라고 해야 하나··· 당했다고나 할까···
–당했다고요?
–나, 딴사람 만화는 잘 안 읽는데···
오는 길에 그 녀석 만화를 읽어 봤더니···
기세가 만만치 않더군.
한 꺼풀 벗은 느낌이라···
뭐랄까. 지금 나보고 이런 걸 그릴 수 있는지 묻는다면··· - P76

–팔리는 작가는 그런 생각을 하는군요···
대단 하세요···
–대단 하단 건 또 뭐야? 너도 그런 적 있을 거 아냐?
–글쎄요··· 저는 누가 봐도 사회 부적응자 라서···
좋아하는 만화를 하루종일 그릴 수 있고···
그걸 좋아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그것만으로도 제겐 기적이에요···
고마운 마음뿐이라···
그외의 것들은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 것 같아요··· - P77

루나는 아빠 만화에 나오는 사람 중에 토고 씨가 제일 좋아.
덩치는 크면서 홈런은 한 번도 못 치구··· 수비도 구멍이잖아?
그래서 늘 벤치 신세인데도 항상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게···
되게 멋있어. - P84

–꿈을 꾸는 듯 매일이 즐거웠어. 정말로..
평생 선생님의 어시로 일하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거든.
–할 만큼 하신 거 아닐까요?
그 시절 미키 선생님의 만화는 완벽하고 멋졌잖아요.
–고럼.
–두 분은 그때 이미 궁극의 만화를 만들어내신 거예요. 부럽습니다.
–핫··· 과연 그럴까?
어쨌든 난 엄청 좋아했어··· - P105

–···스스로 납득한 결정이야?
더이상 만화는 안 그린다는 거···
–마음이 식었다···
···라고 하면 좀 다른 의미일 수도 있는데요···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그려왔던 제 세계가
왠지 모르게 멀게만 느껴지더라고요.
제3자의 눈으로 멀리서 지켜보는 느낌···
그렇게 된 지는 꽤 됐어요.
작품 속 인물들은 더이상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아요.
그들은 그저 꼭두각시일 뿐···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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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물건들이 환자 주변에 있었다. 약, 숟가락, 촛불, 그리고 벽지였다. 나머지 물건들은 떠나버렸다. 자신이 중병이 들었고 죽어간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그는 사물의 세계가 얼마나 거대하고 다양한지 이해했고 자신의 권역 안에 남은 것이 얼마나 적은지도 이해했다. 하루가 다르게 물건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철도 승차권처럼 흔한 물건도 그에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머나먼 것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그로부터 멀리 있는, 주변부에 있는 물건들의 수가 줄어들었는데 다음에는 줄어드는 수가 중심 쪽으로, 그를 향해, 심장을 향해, 마당으로, 집으로, 복도로, 방으로 갈수록 빨리 다가왔다. - P9

그는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 위에서 죽음이 물건들을 무지막지하게 박살내고 있음을 알았다. 쓸데없이 엄청나게 많은 사물들의 총수량에서 죽음이 그에게 남겨놓은 것이라고는 겨우 몇 가지 정도 였는데, 그마저도 그가 그렇게 할 힘이 있었더라면 절대로 자기 집에 들여놓도록 놔두지 않을 물건들이었다. 그가 받은 건 은근한 찔러봄이었다. 그는 친지들로부터 무서운 방문과 시선을 받았다. 그는 평소 부탁해본 적도 없고,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 물건들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 은근한 찔러봄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어찌해볼 수 없이 확고한 것이었다. 그는 사물을 선택할 권리를 잃었다. - P10

떠나가는 물건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름만을 남겼다.
세상에는 사과가 있었다. 사과는 잎사귀에 싸여 반짝거렸고 살짝 빙글 돌기도 했다. 낮의 한 조각과 정원의 하늘빛, 창틀을 움켜쥐고 자신과 더불어 회전시키기도 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나무 아래서, 검은 땅 위에서, 울퉁불퉁한 흙 위에서 사과를 기다렸다. 깨알같이 작은 개미들이 울퉁불퉁한 흙 사이로 기어 다녔다. 정원에는 뉴턴이 앉아 있었다. 사과 안에는 많은 원인들이 숨어 있었는데 더욱더 많은 결과들을 야기할 힘을 가진 원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원인들 중에 포노마레프를 위해 예정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 사과는 추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물의 물질적 구현이 자신에게 사라지고 추상만 남았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고통스러웠다. - P12

‘나는 외부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내 눈과 청력이 사물을 다루는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존재하길 멈출 때 세상도 존재하길 멈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직 살아 있는 내게서 모든 것들이 등을 돌리는 걸 똑똑히 보고 있어. 내가 아직 존재하고 있는데도 말이야! 어째서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거지? 나는 내 뇌가 사물에 형태와 무게, 색깔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나를 떠나갔고 명칭들만 남았어. 주인을 잃은 쓸모없는 이름들만 내 머릿속을 헤집고 있어. 이 이름들이 내게 무슨 소용이야?‘ - P12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환경을 갑자기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었고 그 광경이 나를 뒤흔들어놓았다. 모든 물건이 내게 혈연을 강요했다. 모든 물건이 내게 어떤 명령을 내렸다. 벽에 둥근 시계가 걸려 있었다. - P17

시계는 구전설화였고 전설이었다. 나한테 전설은 필요 없다. 나는 저 시계 소리를 들으며 죽고 싶지 않다. 나는 계속이고 싶지 않다. 나는 가구들의 가족협의회가 나를 에워싸고 있음을 돌연 분명히 깨달았다. 가구들이 내게 충고를 늘어놓고 어떻게 살 것인지 나를 가르친다. 찬장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
"네 인생 여정에 내가 함께할게. 네 뒤에 내가 서 있을 거야. 나는 오래 버틸 수 있어. 난 튼튼해, 두 세대가 내 안에 음식을 보관했어. 난 할 수 있어, 날 소중히 다뤄줘, 그러면 나는 네 아들과 네 손자 때까지도 유용할 거야. 나는 전설이 되는 거지." - P18

슈발로프는 벽 아래 누워 있었다. 구석이 바싹 다가왔다. 그는 벽지의 무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벽지에 난 전체 무늬의 저 부분, 그가 밑에 누워서 잠드는 벽의 그 부분이 이중의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하나는 보통의, 낮의, 전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화환들이고, 다른 하나는 밤의, 잠들기 오 분 전에 감지되는 것이었다. 갑자기 아주 바싹 밀착하자 무늬의 일부가 커졌고 세밀해졌으며 변화했다. 막 잠이 들려고 할 때의 어린아이 같은 느낌과 비슷한 상태에서 그는 익숙하고 규정된 형태들이 변화하는 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 변화가 감동적이었음에야. 빙빙 돌아가는 나선형과 동그라미들 대신에 그는 염소와 요리사를 보았다···. - P26

그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아주 이른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자 그는 양옆을 돌아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지극한 행복의 소리가 그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이 만난 첫날에 이 세상에서 시작된 변화가 지난밤 사이 완성된 것이다. 그는 새로운 땅에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의 눈부신 빛남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가 창턱을 보았을 때 거기에 알록달록한 꽃들이 꽂힌 작은 꽃병들이 서 있었다. 렐랴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자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는데 등이 동그랗게 구부러져 있었고 피부 밑으로 척추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가는 갈대 줄기 같았다. ‘낚싯대, 대나무‘ 슈발로프가 생각했다. 이 새로운 땅에서는 모든 게 감동적이고 우스웠다. 열려 있는 창밖으로 목소리들이 날아다녔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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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스스로를 못 박았다.
일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아이가 예수처럼, 스스로를 붉은 꽃이 가득 깔린 십자가에 못 박았다.
손과 발목의 피가 십자가 나무를 따라 아래로, 봄꽃이 하얀 나무에 농염하게 피어난 것처럼 방울방울 떨어졌다. 물이 바다로 떨어지듯 피가 꽃 위로 똑똑 떨어졌다. 누런 흙이 대지에 섞이듯 흙에 똑똑 떨어졌다. 아이의 얼굴은 고통이나 비틀림 없이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옅은 미소를 담고 있어 커다랗게 만개한 붉은 꽃이 하늘에, 십자가 꼭대기에 피어난 것 같았다. - P518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십자가 아래에 서서 붉은 꽃과 볶은 콩, 오각별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십자가의 아이를 바라보자 십자가를 따라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햇빛이 투명하고 금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피가 하늘에서 알알이 떨어지는 붉은 구슬 같았다. 참새와 까치 떼가 날아왔다. 자주색 구름이 황무지의 가없는 하늘에서 피어올랐다. 자주색과 청백색의 천사같이 생긴 구름이 멀리에서 십자가 상공으로 불어오자 까치들이 담장과 창문, 건물과 마당에서 일제히 고개를 들고 사람들이 알듯 모를 듯한 노래를 불렀다. - P518

모두들 제자리에 섰다. 확실히 방금 지나간 사람은 실험이었다. 그래서 얼른 손을 입가에 나팔 모양으로 모으고 큰 소리로 실험의 이름을 부르면서 왜 안으로 들어가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는 일가족과 짐을 끌며 석양 쪽으로 멀어졌다. 마른풀이 가을 들판을 날아 사라지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일가가 석양에 녹아들었다. 그러다 뒤따라온 무리들이 말해 주었다.
"저기는 땅은 넓은데 사람은 적고, 봄이 되면 만물이 꽃을 피워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들 무리는 안으로 갔고 작가는 모두를 이끈 채 밖으로 나갔다. - P524

신이 시시포스에게 내린 벌은 하늘이 대지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준 것과 같다. 시간은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인류의 몇몇은 시간이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뒤로 물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들 논리에 따르면 내일, 모레의 도래란 그림책을 맨 뒷장부터 한 장씩 앞으로 젖히는 것처럼 예정된 법칙을 뒤에서 앞으로 하나하나 펼쳐내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는 기억으로 간직되지만 미래는 무지와 예측으로 점철될 뿐이다. - P528

시시포스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형벌이라고 보는, 처음에는 그도 똑같이 불안과 재앙이라고 여긴 일에 이미 적응했다. 시간이 그 모든 것에 적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적응은 시간의 적이자 무기가 되어 시간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다. 아침에 바위를 산 꼭대기로 밀어 올리기 시작해 저녁이 되면 바위가 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다음 날 다시 새롭게 밀어 올리지만 또 떨어지는, 고리처럼 계속해서 반복되는 과정을 시시포스는 이미 의무이자 소임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시간의 범주를 내려놓고 오히려 생명의 유실과 소모의 의미를 깨달았다. - P529

아이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이가 시시포스의 무의미한 반복에 새로운 존재와 의미를 불어넣었기 때문이었다. 또 바위의 반복이 없다면 그는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아이를 보기 위해 시시포스는 매일 바위를 올렸다 내리는 일을 기다리고 열정적으로 행했다. 원망이나 거부감, 불평 없이 열심히 움직이고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매일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따라 황혼 속에서 아이에게 말을 걸고 대화하면서 시시포스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와 찬란한 빛이 생겨났다. - P531

징벌이 주는 고통이나 변화, 무료함, 황당함, 죽음 등에 일단 협력하거나 적응하게 되면 징벌은 의미를 잃게 마련이다. 징벌은 태형으로서의 힘을 잃게 되고, 적응은 무기력 함과 부득이함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도출해내게 된다. 이것이 인류가 진화하면서 발전시킨 체념과 타성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타성의 체념 역시 의미 있는 저항과 능력을 갖는다. 타성은 순응을 낳고 적응은 힘을 갖는다. - P533

시시포스는 신이 내린 역방향 형벌에서 자신에 대한 신의 분노와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뒤집힌 처벌과 징계에 적응할 수 없었다. 원래 바위가 굴러 내려갈 때는 그래도 뒤에서 수월하게 산을 내려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바위를 내려 보낼 때 힘껏 밀어야 하는 데다 바위가 저절로 올라간 다음에 뒤에서 따라갈 때, 이미 힘을 쓴 다음에 또 힘겹게 산을 올라야 했기 때문에 두 배의 체력과 정력을 쏟아야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원래 바위를 밀어 올릴 때는 다리와 허리를 구부린 채 고개를 들면 하늘의 환한 빛을 볼 수 있어서 아래에서 위로 올릴 때마다 하늘, 신과 가까워지고 교류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제 밀어 내릴 때는 하늘의 빛이나 별을 볼 수 없어 신과 천당, 정신과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산의 다른 쪽에서 밀어 내리고 올라가기를 반복하면서 그는 다시 징벌과 금기가 육체와 영혼에 미치는 고통과 메마름을 느낄 수 있었다. - P534

생각하다 지쳐버린 그는 더 이상 신이 내준 문제를 고민 하지 않았다. 또한 그 괴상한 문제를 풀고 싶다는 소망과 갈망도 사라졌다. 새로운 순응이 새로운 이유와 힘을 주었고, 생각을 멈추자 안정되고 편안해졌으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 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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