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물건들이 환자 주변에 있었다. 약, 숟가락, 촛불, 그리고 벽지였다. 나머지 물건들은 떠나버렸다. 자신이 중병이 들었고 죽어간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그는 사물의 세계가 얼마나 거대하고 다양한지 이해했고 자신의 권역 안에 남은 것이 얼마나 적은지도 이해했다. 하루가 다르게 물건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철도 승차권처럼 흔한 물건도 그에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머나먼 것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그로부터 멀리 있는, 주변부에 있는 물건들의 수가 줄어들었는데 다음에는 줄어드는 수가 중심 쪽으로, 그를 향해, 심장을 향해, 마당으로, 집으로, 복도로, 방으로 갈수록 빨리 다가왔다. - P9

그는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 위에서 죽음이 물건들을 무지막지하게 박살내고 있음을 알았다. 쓸데없이 엄청나게 많은 사물들의 총수량에서 죽음이 그에게 남겨놓은 것이라고는 겨우 몇 가지 정도 였는데, 그마저도 그가 그렇게 할 힘이 있었더라면 절대로 자기 집에 들여놓도록 놔두지 않을 물건들이었다. 그가 받은 건 은근한 찔러봄이었다. 그는 친지들로부터 무서운 방문과 시선을 받았다. 그는 평소 부탁해본 적도 없고,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 물건들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 은근한 찔러봄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어찌해볼 수 없이 확고한 것이었다. 그는 사물을 선택할 권리를 잃었다. - P10

떠나가는 물건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름만을 남겼다.
세상에는 사과가 있었다. 사과는 잎사귀에 싸여 반짝거렸고 살짝 빙글 돌기도 했다. 낮의 한 조각과 정원의 하늘빛, 창틀을 움켜쥐고 자신과 더불어 회전시키기도 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나무 아래서, 검은 땅 위에서, 울퉁불퉁한 흙 위에서 사과를 기다렸다. 깨알같이 작은 개미들이 울퉁불퉁한 흙 사이로 기어 다녔다. 정원에는 뉴턴이 앉아 있었다. 사과 안에는 많은 원인들이 숨어 있었는데 더욱더 많은 결과들을 야기할 힘을 가진 원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원인들 중에 포노마레프를 위해 예정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 사과는 추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물의 물질적 구현이 자신에게 사라지고 추상만 남았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고통스러웠다. - P12

‘나는 외부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내 눈과 청력이 사물을 다루는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존재하길 멈출 때 세상도 존재하길 멈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직 살아 있는 내게서 모든 것들이 등을 돌리는 걸 똑똑히 보고 있어. 내가 아직 존재하고 있는데도 말이야! 어째서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거지? 나는 내 뇌가 사물에 형태와 무게, 색깔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나를 떠나갔고 명칭들만 남았어. 주인을 잃은 쓸모없는 이름들만 내 머릿속을 헤집고 있어. 이 이름들이 내게 무슨 소용이야?‘ - P12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환경을 갑자기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었고 그 광경이 나를 뒤흔들어놓았다. 모든 물건이 내게 혈연을 강요했다. 모든 물건이 내게 어떤 명령을 내렸다. 벽에 둥근 시계가 걸려 있었다. - P17

시계는 구전설화였고 전설이었다. 나한테 전설은 필요 없다. 나는 저 시계 소리를 들으며 죽고 싶지 않다. 나는 계속이고 싶지 않다. 나는 가구들의 가족협의회가 나를 에워싸고 있음을 돌연 분명히 깨달았다. 가구들이 내게 충고를 늘어놓고 어떻게 살 것인지 나를 가르친다. 찬장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
"네 인생 여정에 내가 함께할게. 네 뒤에 내가 서 있을 거야. 나는 오래 버틸 수 있어. 난 튼튼해, 두 세대가 내 안에 음식을 보관했어. 난 할 수 있어, 날 소중히 다뤄줘, 그러면 나는 네 아들과 네 손자 때까지도 유용할 거야. 나는 전설이 되는 거지." - P18

슈발로프는 벽 아래 누워 있었다. 구석이 바싹 다가왔다. 그는 벽지의 무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벽지에 난 전체 무늬의 저 부분, 그가 밑에 누워서 잠드는 벽의 그 부분이 이중의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하나는 보통의, 낮의, 전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화환들이고, 다른 하나는 밤의, 잠들기 오 분 전에 감지되는 것이었다. 갑자기 아주 바싹 밀착하자 무늬의 일부가 커졌고 세밀해졌으며 변화했다. 막 잠이 들려고 할 때의 어린아이 같은 느낌과 비슷한 상태에서 그는 익숙하고 규정된 형태들이 변화하는 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 변화가 감동적이었음에야. 빙빙 돌아가는 나선형과 동그라미들 대신에 그는 염소와 요리사를 보았다···. - P26

그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아주 이른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자 그는 양옆을 돌아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지극한 행복의 소리가 그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이 만난 첫날에 이 세상에서 시작된 변화가 지난밤 사이 완성된 것이다. 그는 새로운 땅에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의 눈부신 빛남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가 창턱을 보았을 때 거기에 알록달록한 꽃들이 꽂힌 작은 꽃병들이 서 있었다. 렐랴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자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는데 등이 동그랗게 구부러져 있었고 피부 밑으로 척추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가는 갈대 줄기 같았다. ‘낚싯대, 대나무‘ 슈발로프가 생각했다. 이 새로운 땅에서는 모든 게 감동적이고 우스웠다. 열려 있는 창밖으로 목소리들이 날아다녔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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