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스스로를 못 박았다.
일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아이가 예수처럼, 스스로를 붉은 꽃이 가득 깔린 십자가에 못 박았다.
손과 발목의 피가 십자가 나무를 따라 아래로, 봄꽃이 하얀 나무에 농염하게 피어난 것처럼 방울방울 떨어졌다. 물이 바다로 떨어지듯 피가 꽃 위로 똑똑 떨어졌다. 누런 흙이 대지에 섞이듯 흙에 똑똑 떨어졌다. 아이의 얼굴은 고통이나 비틀림 없이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옅은 미소를 담고 있어 커다랗게 만개한 붉은 꽃이 하늘에, 십자가 꼭대기에 피어난 것 같았다. - P518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십자가 아래에 서서 붉은 꽃과 볶은 콩, 오각별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십자가의 아이를 바라보자 십자가를 따라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햇빛이 투명하고 금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피가 하늘에서 알알이 떨어지는 붉은 구슬 같았다. 참새와 까치 떼가 날아왔다. 자주색 구름이 황무지의 가없는 하늘에서 피어올랐다. 자주색과 청백색의 천사같이 생긴 구름이 멀리에서 십자가 상공으로 불어오자 까치들이 담장과 창문, 건물과 마당에서 일제히 고개를 들고 사람들이 알듯 모를 듯한 노래를 불렀다. - P518

모두들 제자리에 섰다. 확실히 방금 지나간 사람은 실험이었다. 그래서 얼른 손을 입가에 나팔 모양으로 모으고 큰 소리로 실험의 이름을 부르면서 왜 안으로 들어가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는 일가족과 짐을 끌며 석양 쪽으로 멀어졌다. 마른풀이 가을 들판을 날아 사라지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일가가 석양에 녹아들었다. 그러다 뒤따라온 무리들이 말해 주었다.
"저기는 땅은 넓은데 사람은 적고, 봄이 되면 만물이 꽃을 피워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들 무리는 안으로 갔고 작가는 모두를 이끈 채 밖으로 나갔다. - P524

신이 시시포스에게 내린 벌은 하늘이 대지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준 것과 같다. 시간은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인류의 몇몇은 시간이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뒤로 물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들 논리에 따르면 내일, 모레의 도래란 그림책을 맨 뒷장부터 한 장씩 앞으로 젖히는 것처럼 예정된 법칙을 뒤에서 앞으로 하나하나 펼쳐내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는 기억으로 간직되지만 미래는 무지와 예측으로 점철될 뿐이다. - P528

시시포스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형벌이라고 보는, 처음에는 그도 똑같이 불안과 재앙이라고 여긴 일에 이미 적응했다. 시간이 그 모든 것에 적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적응은 시간의 적이자 무기가 되어 시간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다. 아침에 바위를 산 꼭대기로 밀어 올리기 시작해 저녁이 되면 바위가 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다음 날 다시 새롭게 밀어 올리지만 또 떨어지는, 고리처럼 계속해서 반복되는 과정을 시시포스는 이미 의무이자 소임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시간의 범주를 내려놓고 오히려 생명의 유실과 소모의 의미를 깨달았다. - P529

아이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이가 시시포스의 무의미한 반복에 새로운 존재와 의미를 불어넣었기 때문이었다. 또 바위의 반복이 없다면 그는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아이를 보기 위해 시시포스는 매일 바위를 올렸다 내리는 일을 기다리고 열정적으로 행했다. 원망이나 거부감, 불평 없이 열심히 움직이고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매일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따라 황혼 속에서 아이에게 말을 걸고 대화하면서 시시포스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와 찬란한 빛이 생겨났다. - P531

징벌이 주는 고통이나 변화, 무료함, 황당함, 죽음 등에 일단 협력하거나 적응하게 되면 징벌은 의미를 잃게 마련이다. 징벌은 태형으로서의 힘을 잃게 되고, 적응은 무기력 함과 부득이함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도출해내게 된다. 이것이 인류가 진화하면서 발전시킨 체념과 타성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타성의 체념 역시 의미 있는 저항과 능력을 갖는다. 타성은 순응을 낳고 적응은 힘을 갖는다. - P533

시시포스는 신이 내린 역방향 형벌에서 자신에 대한 신의 분노와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뒤집힌 처벌과 징계에 적응할 수 없었다. 원래 바위가 굴러 내려갈 때는 그래도 뒤에서 수월하게 산을 내려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바위를 내려 보낼 때 힘껏 밀어야 하는 데다 바위가 저절로 올라간 다음에 뒤에서 따라갈 때, 이미 힘을 쓴 다음에 또 힘겹게 산을 올라야 했기 때문에 두 배의 체력과 정력을 쏟아야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원래 바위를 밀어 올릴 때는 다리와 허리를 구부린 채 고개를 들면 하늘의 환한 빛을 볼 수 있어서 아래에서 위로 올릴 때마다 하늘, 신과 가까워지고 교류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제 밀어 내릴 때는 하늘의 빛이나 별을 볼 수 없어 신과 천당, 정신과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산의 다른 쪽에서 밀어 내리고 올라가기를 반복하면서 그는 다시 징벌과 금기가 육체와 영혼에 미치는 고통과 메마름을 느낄 수 있었다. - P534

생각하다 지쳐버린 그는 더 이상 신이 내준 문제를 고민 하지 않았다. 또한 그 괴상한 문제를 풀고 싶다는 소망과 갈망도 사라졌다. 새로운 순응이 새로운 이유와 힘을 주었고, 생각을 멈추자 안정되고 편안해졌으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 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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