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 선로를 건너온 어떤 남자가 다가왔다. 채 마흔 살이 안 된 아직 젊은 남자였지만, 나이보다 몇십 년은 더 되는 세월이 눈 속에 켜켜이 쌓였다. 이전에는 옷소매 안에 들어 있었을 튼튼하고 건강한 팔뚝은 사라지고 오른쪽 소매가 텅 비어 덜렁거렸다. 그는 전선에서 돌아왔고, 전쟁은 그의 육신에, 그 나이대의 남자에게는 뜻밖이라고 할 주름 속에, 그가 깨어 있을 때조차 몰려와 소용돌이치면서 그가 아주 미세하게라도 목을 움츠리게 만드는 악몽들 속에 깊이 박혔다. - P233

우리는 추위를 뚫고서 전차들과 애처로운 눈빛의 말이 끄는 마차들 사이로 요리조리 피해 걸으며 도시를 가로질렀다. 건물 하나하나가, 골목 하나하나가, 건물들이 일렬로 들어선 거리 하나하나가 나를 빨아들이는 바람에 갈지자가 된 나의 걸음걸이에 메티의 나무라는 시선이 꽂혔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열 가지의 아름다움의 형식과 열 가지의 서로 다른 서사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교차로 하나하나는 매번 쾌락의 포기였다. 도시가 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고 이제 나를 떠나지 않으리라. 로마의 위대함도, 베네치아의 마법도, 혹은 나폴리의 격정도 절대로 피렌체를 잊게 하지 못했다. 그곳은 이탈리아의 도시들 가운데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그냥 가장 아름다운 도시였다. 비올라는 더더욱. - P234

절단 작업, 그것은 지옥, 배의 화물창과 마찬가지여서 가장 보람 없는 작업이었다. 우리는 건물 전면에 사용될 대리석 외장재들을 다시 자르고 짜 맞췄다. 가끔은, 채석장에서 작업이 미리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 조각에 쓰일 원자재들을 대강 다듬기도 했다. 메티는 그 지역의 가장 근사한 계약 중 하나를, 그러니까 두오모 성당 일부의 개보수 작업을 막 따낸 참이었다. 일이 너무 많아 그는 외지에서까지 사람을 고용했다. 구내식당에서는 정예 조각가들, 음식을 놓고 기꺼이 다툼을 벌이는 쾌활한 그들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먼지를 뒤집어쓰고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접시에 코를 박고 있는 〈절단 작업자들〉 사이의 대조가 선명했다. 조각가들이 아무리 오만하더라도, 실제로 오만했지만, 우리에게 시비를 걸려고 들지는 않았다. 절단 작업장은 거친 사내들, 전과자, 탈영병, 징집 회피자 등의 소굴이었고, 세상은 그런 모든 것을 하찮은 비열함이라고 여겼지만 사실 그런 비열함을 안고 살자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 P240

「중요한 건 네가 무엇을 조각하는가가 아니야. 왜 그것을 하는가이지.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봤니? 그게 뭘까. 조각한다는 게? 〈형체를 부여하기 위해 돌을 쫀다〉라는 답은 하지 마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잖니.」
스스로에게 단 한 번도 물어본 적 없던 질문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고, 나는 아는 척하지도 않았다. 메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조각을 한다는 게 뭔지 깨닫는 날, 넌 단순한 분수대만으로도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게 할 거다. 그동안, 미모, 충고 하나 하지. 인내해라. 이 강, 변함없이 고요한 이 강처럼 말이야. 이 강, 아르노 강이 화를 낸다고 생각하니?」 - P258

술이 잔뜩 오르면 그들 가운데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이 장엄하게 일어서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러면 좌중은 조용해졌고, 드높이 솟아오른 오페라 아리아가 귀에 들려오면 우리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 남자들은 노래를 불렀는데, 해야 할 말이 있어서였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였다. 그런 밤이면, 바닥이 끈적이고 해적판 카루소의 노래에 취한 그 장소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대였다. 그곳의 팔리아치오들은 진정 미치광이들이었고 돈 조반니들은 말할 것도 없었으니, 노래하는 사람들 전부가 쉼 없이 사랑하고 살인을 저질렀으니까. - P260

나는 그에게 고갯짓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 사람도 나도 감정의 분출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리는 결핍, 조여 맨 허리 띠와 함께 태어난 사람들로, 이런 환경에서는 감정조차 아끼기 마련이었다. - P270

우리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눴고, 으레 그러듯이 다시 보자는 약속을 했고, 그러고 나서 나는 역사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이 벽 저 벽 부딪혀 가며 쌀쌀한 밤공기 속을 배회했다. 미래가 더는 그렇게 암울해 보이지 않았다. 술에 취한 자 특유의 낙관주의가 불안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새벽이 속살대기 마련인 저주에 재갈을 물렸다. - P271

그 순간 익숙한 향내를, 빵 반죽과 장미 와 땀이 뒤섞인 내음을 맡았다.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나를 일으켜 세우더니 모든 것이 괜찮아질 거라고, 내가 엄마를 보지 못해도 자신은 나를 보고 있다고 속삭였다. 정향, 제라늄, 백단, 에델바이스, 아니스, 걱정과 슬픔 등 다른 향내도, 격노한 수많은 어머니, 혼령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어머니들의 향내도 떠돌았는데, 자신의 새끼가 학대당하는 일을 겪었던 그들이 내 곁으로 왔다. 잠시 뒤 의식을 되찾은 나는 물에 빠졌던 사람처럼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나는 벽에 기대어 앉았다.
[…]
그래서 나는 내가 세상에 도착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가르쳐 줬던 가장 소중한 행위를 했다. 나는 일어섰고, 걸었다. - P272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쉰 살인데도 얼굴에는 태양과 추위와 다양한 방식의 학대에 의해 1백 년 치 모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르지 않는 기쁨의 샘에서 길어 올려 신선했다. - P274

「태어난 뒤로 우리가 하는 단 하나의 일이 바로 죽는 거란다. 아니면 가능한 한 최선을 다해 그 피할 수 없는 순간을 늦추려고 하거나. 나의 고객들은 모두 같은 이유로 온단다, 미모. 표현 방식이야 제각각일지라도, 그들 모두 겁에 질렸기 때문이지. 나는 카드를 뽑고 위로할 말들을 지어내. 그들 모두 올 때보다는 조금 더 고개를 쳐들고 돌아가고, 아주 짧은 순간이나마 조금은 덜 두려워해. 그들은 그걸 믿으니까. 그게 중요한 거야.」 - P281

「네 차례가 되면, 물론 그때가 아직 멀었기를 바라지만, 내 말을 믿어, 너도 겁이 날 거야. 누구나 그러듯이, 겁이 날 거라고.」 - P282

그 시절에는 누군가를 신뢰하기가 힘들었지만, 특이한 명예 코드를 지닌 그 무뢰한들 사이에서만큼 편안한 기분이 들었던 적은 이제껏 없었다. 당신이 파시스트든 볼셰비키든, 가톨릭교도이든 무신론자이든,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간경화에 딸기코에 불콰해진 얼굴의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었고, 밤이 출렁이는 한 새벽까지 서로를 붙잡고 그 시절의 풍랑에서 피신해 있었다. - P283

한 시간 뒤, 우리는 거리에 있었다. 눈은 이미 그쳤다. 달빛 아래 도시가 대낮처럼 반짝였다. 은밀한 슬픔으로 뱃속이 따끔거렸고, 우리의 걱정 없던 시절에서 솟아난 유령이 조롱하듯 자신의 쇠사슬을 흔들어 댔다. - P293

그 늙은 개자식이 왜 그런 행동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숙취와 숙취 사이에 솟구치는 딸꾹질처럼 올라온 인정의 찌꺼기일지도. 그런데 그를 닮은 주제에 그를 비난하다니, 나는 누구인가? - P305

바로 어둠 속에서 흥분이 끓어오르는 법이니까.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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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야 뭐라 할지 모르겠으나 열두 살의 슬픔이 아주 오래 가는 법은 없다. 내가 탄 기차가 무엇을 향해 덜컹거리며 나아가는지는 몰랐지만 내가 기차를 타본 적이 없다는 건 알았다—아니면 내가 기억을 못 하든가. 모든 것이 너무나 빠르게 지나갔다. 전나무든 집이든, 뭔가를 응시하려고 하자마자 곧 사라져 버렸다. 풍경, 그건 움직이기 위해 생겨난 건 아니지 않은가. - P21

다행히도 나비가 있었다. 나비는 생미셸드모리엔에서 들어왔고, 줄지어 지나가는 산들과 나를 갈라놓은 유리창에 내려앉았다. 나비는 유리창을 상대로 잠깐 투쟁하다가 포기하고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훗날 봄철이면 보게 될, 화려한 색채와 황금빛이 어우러진 영광스러운 자태를 지닌 아름다운 나비는 아니었다. 그저 회색빛에, 눈을 잔뜩 찌푸리고 보면 살짝 푸른빛이 감도는 보잘것없는 나비, 햇살에 지친 자벌레나방이었다. 내 나이 또래 남자애들이 그러듯이 나비를 괴롭혀 볼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고, 그러다가 날뛰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차분한 요소인 나비를 응시하고 있으면 울렁거림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를 안심시키려고 어떤 우호적인 힘이 보내 준 나비는 여러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그 덕분에 그 무엇도 정말이지 보이는 그대로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비는 나비가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로서 아주 작은 공간 안에 웅크린 거대한 무언가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직관적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이러한 깨달음은 몇 십 년 뒤에 최초의 원자 폭탄에 의해 확인될 테고, 어쩌면 그보다도, 죽어 가는 내가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원의 지하 공간에 남겨 두고 가는 것이 바로 그러한 깨달음이리라. - P21

원석 한가운데 중앙 없지 않은가 - P31

고향에 전기가 들어오기를 꿈꿨던 인제니에레 카르모네가 우리 동네 분위기가 얼마나 찌릿찌릿한지 보았더라면 황홀해했을 텐데. 두 사람만 스쳐도 매번 벼락이 내려칠 가능성이 농후했으니, 무슨 결과를 촉발할지 결코 알 수 없는 전자의 이동인 셈이었다. 우리는 독일인, 오스트리아–헝가리인, 우리 자신의 정부, 우리의 이웃과 전쟁 중이었고,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상대로 전쟁 중이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쪽이 전쟁을 원하면 다른 쪽은 평화를 원했고, 그러다 보면 언성이 높아졌고, 결국 평화를 원하는 쪽에서 먼저 주먹을 날리는 것으로 끝이 났다. - P38

하지만 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살아오는 내내 바뀌었으며 나중에는 오페라 가수들과 축구 선수들까지도 포함하게 될 나만의 우상들을 모신 만신전에 기도를 올리면서 저녁마다 그 사실을 확인했다. 어쩌면 내가 젊었고, 나의 하루하루가 아름다워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한낮의 아름다움이 밤의 예지에 무엇을 빚지고 있는지, 나는 오늘에서야 헤아린다. - P42

- P52

일꾼들이 벌써 감귤밭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 내가 방문할 날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 대서양 저편의 나라에서는, 대지가 뱉어 내는 검은 기름, 전쟁을 촉발하여 돈을 벌게 해줄 끈적이는 원유 덕분에 사람들이 부자가 되어 가는 중이었다. 피에트라달바에서 재물은 태양과 함께 바뀌어 가는 색채에서, 달콤 쌉싸름한 맛 혹은 추운 아침 날 느껴지는 달콤함에서 왔다. 나는 그런 오렌지 세상이 그립다. 그 누구도 오렌지를 놓고 싸운 적은 없었으니까. - P78

나는 높은 곳에서 일할 때면 늘 안전을 확인했다. 아버지 덕분에 갖게 된 신중함인데, 그 내용은 다음의 격언으로 요약되었다. 성당이 올라갈 때면 조각가들이 비처럼 떨어진다. - P84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렇게, 관습과 계급의 장벽이 파놓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심연을 한 걸음에 건너뛰면서.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 누구도 말한 적 없는 위업이자 말 없는 혁명. 비올라는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았다. 그리고 바로 그 찰나에 나는 조각가가 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그러한 변화를 의식 하지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에, 낮은 초목들과 올빼미가 공모하는 가운데 우리의 손바닥이 합쳐지자 뭔가 조각해야 할 것이 있다는 본능적 깨달음이 생겼다. - P103

나는 그 애가 내게 시범을 보이는 동안 가까운 벤치에 앉아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 애는 거의 반 시간 동안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꼼짝을 안 했다. 비올라의 톡톡 튀는 말과 생각들이 앞다퉈 쏟아질 때면 비올라의 존재로 포화 상태였던 나의 상상의 세계가 이제는 새로운 소리들로 밤의 어둠을 채웠다. 무덤 사이로 기어가는 소리, 내 시야의 끝자락에서 펼쳐지는 죽음의 무도. 마을에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꺼풀이 없는 눈들이 나뭇가지 뒤에서 나를 지켜본다. - P112

「다른 책도 가져다줄게. 그러다가 들키면 재수 없는 거고. 이해가 되지 않아도 그냥 읽어. 그런데, 넌 몇 살이니?」
「열셋.」
「나도. 몇 월인데?」
「1904년 11월.」
「오, 나도! 혹시 우리가 한날에 태어났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우주적 쌍둥이일 텐데.」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가 시간과 공간을 가로질러서, 우리를 능가하며 그 무엇도 절대 부술 수 없는 힘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을 거란 말이지. 자, 셋까지 센다, 셋에 다 같이 자신의 생일을 말하는 거야. 하나, 둘, 셋」 - P113

멀어져 가면서, 나는 아주 신경 써서 세 번 뒤돌아봤다. 한 번은 저번에 못 한 것, 또 한 번은 이번 것, 그리고 마지막은 참을 수가 없어서였다. - P114

여명의 빛이 진종일 지속되는 피에트라달바의 봄만큼이나 감미로운 건 다시 만나 보지 못했다. 마을의 돌들은 여명의 장밋빛을 낚아채어 반사할 수 있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타일, 금속, 암석 노출지에 끼어든 운석, 신비의 샘, 심지어 주민들의 눈에까지 그 색채를 넘겨주었다. 여명의 장밋빛은 마지막 사람이 잠이 들어야만 진정되었으니, 가끔은 어둠이 내리고 나서도 초롱 불빛 아래에서 여자애를 바라보는 사내애의 시선 속에 살아남기 때문이었다. 그다음 날이 되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피에트라달바, 여명의 돌. - P124

하지만 책들은 계속해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책들과 함께 우주가 확장되었다. 조각을 하다가 어느 결엔가 나의 행위가 외톨이의 것이 아니라는 막연한 생각을 평생 처음으로 하게 됐다. 그 행위는 내 이전의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정련되었듯이, 내 뒤에 올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그리되리라. 망치질 하나하나는 먼 곳에서부터 왔고, 그것들은 오랫동안 서로의 소리를 듣게 되리라. - P140

「내 부모는 늙었다고. 나이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들은 다른 세상 사람들이지. 그들은 앞으로 우리는 말을 타듯이 날게 되리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여자들은 수염을 달고 남자들은 보석으로 치장하리라는 걸. 내 부모의 세계는 죽었어. 넌 좀비를 무서워하지만 네가 무서워해야 할 건 바로 그 세계라고. 그 세계는 죽었는데도 여전히 움직이거든. 누구도 그것을 보고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으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그건 위험한 세계야. 그 세계는 저절로 무너져.」 - P145

찰나 동안, 비올라와 나는 키가 같아진다. 우리는 거의 열네 살이다. 정확히, 똑같은 키. 이 상태는 지속되지 않을 테고, 그 애는 그 사실을 알고 있고 나도 그러니, 우리 둘 다 알고 있다. 나는 우리라고 말하기를 좋아하니까. 이 순간이 지나면, 비올라는 계속해서 키가 자라서 하늘을 향해 솟구치겠지. 나는 여기, 땅바닥에 붙어 있을 테고. 그 순간 우리는 오랫동안 서로를, 서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묘지의 밤, 대낮의 열기에 그을린 색채로 가득한 밤에, 이러한 만남, 예기치 못한 동등함에 거의 놀라다시피 하며. 찰나 동안, 나는 어느 결엔가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벌써 그 애를 쑥쑥 크게 하는 힘들이, 그러니까 쌓여 가는 세포들과 늘어나는 뼈들이 작동하고 있고, 분자가 하나씩 하나씩 늘어날수록 비올라는 나로부터 멀어진다. - P148

나는 옷가지를 벗어 던지면서 달리기 시작했고, 태어날 때 부터 끌고 다니는 이 평범하지 않은 몸뚱어리에 마음 쓰지 않고 물로 뛰어들었다. 그 물, 기적의 샘물은 기적을 낳는 게 틀림없었다. 일단 물에 잠기자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아졌으니까. 머리 하나만 물 밖으로 나온 나도 물 아래에서는 키가 크고 힘이 세고 우람했다. - P156

웃어라, 팔리아치오, 그러면 모두가 박수를 치리라. - P160

비올라가 옳았다. 이 세계는 이미 죽었다. 나의 복수는 20세기의 것, 나의 복수는 현대적이리라. 나는 나를 내몰았던 사람들의 식탁에 함께 앉으리라. 나는 그들과 동등한 자가 되리라. 가능하다면, 그들을 넘어서리라. 나의 복수는 그들을 살해하는 데 있지 않으리라. 그것은 그들에게 미소를 짓는 데, 오늘 그들이 내게 보여 줬던 내려다보는 듯한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 데 있으리라. - P161

처음에 경계하던 별은 곧 비올리에게 애정을 갖게 되어서 한 달 뒤에는 곰 사건의 진실성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노라고 털어 놓았다. 「저 애는 너무 작고 저토록 연약한데, 어떻게 곰을 품고 있을 수 있겠어?」 나는 비올라를 잘 알았고, 나는 그 애가 곰 여러 마리, 동물원 전체, 서커스단과 그 천막까지, 그리고 화약고도, 여러 대의 비행기도, 넓은 바다와 산도 전부 다 품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올라는 우리의 삶을 만드는 조물주였고, 손가락 한 번 튕기거나 미소 한 번 짓는 것으로 우리의 삶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였다. - P171

「아니야, 미모. 나는 네게 한계가 없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어. 위로도 아래로도, 큰 걸로도 작은 걸로도. 모든 경계는 만들어 낸 거야. 그 점을 이해한 사람들은 그걸, 그런 경계를 만들어 낸 사람들을 몹시 불편하게 하고, 나아가 그걸 믿는 사람들은 더욱더 불편하게 만들기 마련이야. 그러니까 거의 모두가 불편해진다고 할 수 있어. 마을 사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내 가족조차 나를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알고. 난 상관 안 해. 모두가 네게 반대하면 네가 올바른 길에 들어선 것임을 알게 될 거야.」 - P199

거닐다. 나는 보통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기 위해서, 뭔가를 갖다 놓거나 가져오기 위해서 걸었다. 나의 걸음은 실용적이었다. 거닌다는 것은 사회적 특권,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의 예술이었다. - P210

나는 그 결합이 미칠 영향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결혼하게 되면 비올라가 대학에 가지 못하리라는 것 말고는. 그리고 날지 못하리라는 것 말고는. 더는 죽은 자들의 말을 들으러 가지 못하리라는 것 말고는. 우리를 왕처럼 열렬히 맞아 줄 그런 강변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기대감으로 내가 계속 머리를 물 밖에 내놓고 헤엄치게, 조금 더 헤엄쳐 나가게 격려해 주지 못하리라는 것 말고는. 벌써, 나는 가라앉는 중이었다. - P218

그는 자신이 쥐고 있는 이 특종감이 돈이 될 거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다가, 그러한 유혹의 공격을—정말이지 악마는 일을 쉬는 법이 없다—얼른 물리친다. 그가 입을 여는 일은 없을 거다. 비탈리아니의 생명이 저녁 미풍에 가물거리다가 자신의 비밀을 품고 조용히 꺼지게 내버려둘 터이다. 신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의 평생을 모든 비밀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대한 비밀에 바친 파드레 빈첸초야말로 그 사실을 아주 잘 알 만한 위치에 있다.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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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 썩게 하리라.
다 썩어 문드러지게 하리라.
내가 지표 위로 전부 덮일 것이다. 불비처럼 세상에 흩뿌려질 것이다. 내가 모조리 먹어치울 것이다. 내 포자와 씨앗을 지상 가득히 뿌릴 것이다. 나는 빌딩을 썩게 하고 철근을 으스러뜨리고 콘크리트를 부술 것이다.
인간이 만든 것들을 다 집어삼킨 뒤 땅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것이다. 나는 지구 위를 죄다 뒤집어씌우며 무성하게 번식할 것이다. 내 귀신 들린 숲이 너희를 남김없이 잡아먹고 자라나리라. 모든 죽은 것들이 살아서 들뛰고 생동하게 하리라.
그렇게 화산처럼 폭발하며 증식하다 마침내 먹을 것이 없어져 스스로를 먹을 것이며, 그러다 소멸해갈 것이다. 그렇게 내가 다 으스러져 사라진 자리에 새 숲이 자라나리라. - P257

친구가 새벽 무렵에 말했다. 얘, 전에 내가 재미있는 기사를 본 적이 있어. 누가 우주비행사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대.만약에 당신이 화성에 갈 수 있다면, 그런데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면, 아니, 가다가 죽거나 가자마자 죽을 수도 있다면, 그래도 화성에 갈 기회가 온다면 가겠느냐고 물었대. 그런데 비행사들이 다 가겠다고 답했다지 뭐니. 왜냐면 자신의 인생은 애초에 우주에 있었으니까. 제 삶이 거기서 끝난다면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테니까······. 나는 늘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더라고. 늘 알겠더라고······.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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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내 목숨은 내 것이라 하찮으니, 중요한 것은 그대의 생명이니. - P113

"아이가 있으면 좀비가 되어도 살아야지,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따위가 남은 아이들보다 더 중요하느냐고? 제가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고 하는 따위가, 살아 있는 애들보다 더 중요 하느냐고?" - P131

"생명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어요?"
"아녜요. 아녜요, 틀렸어요. 중요한 건 내 생명이 아니에요. 내 생명 같은 건 안 중요해요. 중요한 건 남의 생명이죠." - P139

놀랍기도 하지. 그냥 안 된다고 하면 항의 방문이라도 했을 텐데, 건조하게 자본으로 협박하니 채찍으로 얻어맞은 중세 농노처럼 얌전해진다. - P148

결국 개체의 이어짐도 기적이다. 나의 연속성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생명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생명이 시작된 이래 그렇게 살아왔기에 굳이 이 신비를 의심하지 않을 뿐이다. - P151

"사실이 안 변해도 생각을 바꿔요!" - P153

현수의 말은 반만 맞았다. 내 목숨이 하찮은 것이 아니다. 내 목숨도 그리 모자란 것도 아니나, 세상이 너무나 드높고 위대해서 감히 빗대어지지 않았다. - P160

나는 내 이어진 죽음을 생각했고 이어진 생명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죽음 속을 걷고 있든 생명 속을 걷고 있든, 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아름답고 살아 있는 것들은 눈부시며,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니······. - P165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좋은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 않을 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변명할 마음도 자책할 마음도 없다. 당신도 이 안에서 살아간다면 나만큼도 쉽지 않을 것이다. 통상 우리에게 반대 의견은 없고 누군가가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은 전체의 생각이 된다. 그래서 그때 내가 한 판단은 우리 모두의 판단이 되었다. - P200

「지금부터 내 눈에 비치는 것들을 기록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영상기록장치나 사진기를 가져오지 않았다. 관광이나 탐사를 위해 온 것이 아니므로·····. 할 만한 것은 음성 기록뿐이다. 이 기록에 증거를 제시한 수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 알려져도 우리의 집단 환각이나 거짓말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막중한 임무를 앞에 두고 이럴 여유가 없다는 것도 안다.」
막중한 임무라. 그 말을 듣자 어쩐지 불편해졌다. 폐기된 지 오래된 내게 무슨 막중하고 자시고 할 일이 있단 말인가?
「무의미한 일이다. ······그래도 기록하고 싶다. 우리 외에는 이제 다시는 아무도 이 풍경을 볼 수 없을 테니까.」
다시는, 아무도. 그 말을 듣자 나는 더욱 불편해졌다. - P210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따지고 보면 물이다. 애초에 생명의 필수 조건은 물이다. 미생물 중에는 초고온과 극저온을 견디거나, 무산소 환경에서 거의 먹지 않고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생물도 더러 있지만, 그들마저도 결국 최소한의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물은 분해해서 생물의 호흡에 필요한 산소와 내 에너지 자원인 수소도 얻을 수 있다. 나는 말하자면 변칙적인 형태로 내부에 바다를 품은 인공 행성이라고나 할까. - P212

우주는 뜨거나 내리는 곳이 아니다. 부유하고 떠돌며 고립되고 방향을 잃는 곳이다. 우주인은 비행기 조종사가 아니라 잠수함과 선박 승무원에게서 위기 관리법을 배운다. 우주가 하늘이지만 바다에 비유되는 이유다. - P214

내 숲만큼은 아니라도 지구의 식물도 충분히 강하다. 실상 지구에 인간만 한 자연재해는 없다. 원전이 터져 방사능으로 뒤덮인 곳이나 태풍으로 초토화된 지역, 폭탄으로 유리질처럼 녹아내린 도시마저도, 사막처럼 황량해지는 대신 울창한 숲이 들어선다. 치사량의 방사능이든 맹독성 낙진이든, 그 어떤 재해도 인간만큼 파멸적이지 않다. 재해는 오히려 지상 최대의 재난인 인간이 떠나가게 하여 동식물의 낙원을 되돌리곤 한다. - P226

나를 만든 나라가 전쟁에 휘말린 이유는 해류의 변화 때문이라고 들었다. 해류의 변화는 기후의 변화 때문에 왔다. 전부터 인간이 바다에 버린 쓰레기들은 만들어진 이래로 하나도 썩지 않은 채 해류를 따라 흐르며 쌓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태평양의 가난한 섬들에 모였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언제부터인가 한국 남해안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변국들도 똑같이 쓰레기의 쓰나미를 맞이했다. 그것도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다. 질서는 무너지고, 질병은 퍼지고, 뭐 그런 일들. - P230

사람은 어느 이상 느리게 변화하는 것은 그 과정을 따라가지 못한다. 사람이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보지 못하는 이유다. - P236

어서 들어와라. 불길을 다 끌고 들어오거라.
그 불길로 내 수동 제어장치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 이후로는 너 같은 인간들이 내 몸뚱이를 건드리고 멋대로 조작하고, 제 욕망대로 쓸 방법도 영영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그러면 나는 통제 불능이 되고 마침내 자유로워진다. 그 도박장 친구처럼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다 수명을 다 했을 때 예측할 수 없는 곳에 떨어져 너희들의 작은 재앙으로 기록되겠지. 내 귀신 들린 숲 전설에 악명을 추가하겠지.
그리고 만약 네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내 자동 위기관리센터가 비정상적으로 온도가 오른 모듈을 분리해 떼어낼 것이다. 그러면 너는 불구덩이째로 우주에 버려진다. 불이 내 외벽에 박힌 뿌리를 다 태우고 그 공간을 구멍투성이로 만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서 와라. 어리석고 오만한 인간.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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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잘못된 것 같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건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다. 하긴, 정답이라는 게 과연 존재할까 싶었다. - P19

"형, 나는 사랑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해." - P36

"일반 학교에 다녀 보니까, 그 아이들도 부모들과 웬만해서는 부딪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생활하고 있더라고."
잠시 생각에 잠긴 노아가 다시 툭 한마디 내뱉었다.
"귀찮다나?"
"귀찮아?"
되묻자, 녀석이 끄덕였다.
"그 말을 듣는데 좀 짜증이 났어."
"왜?"
허공을 바라보던 노아의 시선이 천천히 내게로 돌아왔다.
"행복에 겨운 새끼들이지. 낳아서 키워 주고 돌봐 줬는데 부모가 귀찮다? 나쁜 자식들이야, 진짜. 이렇게 말이야.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어."
"......"
"부모들도 저 녀석들을 귀찮아하지 않을까? 저 녀석들에게 짜증도 내고 화도 내지 않았을까? 나는 절대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 P41

그래, 노아의 말처럼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 과는 없을 것이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하고 상대를 원망하 기 전에 그 상대를 그렇게 만든 진짜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하지만 이 인과 관계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 P42

사람들은 꽤나 근본을 중시했다. 원산지를 따져 가며 농수산물을 사 먹듯 인간도 누구에게서 생산되었는지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내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일까? 나는 그냥 나다. 물론 나를 태어나게 한 생물학적 부모는 존재할 테지만, 내가 그들을 모른다고 해서, 그들에게서 키워지지 않았다 해서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나의 부모가 누구인지보다 훨씬 가치 있는 일 아닐까? […] 생물학적 부모가 누구인지 알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특권 의식을 느낄 만큼 그리 대단한 일일까? 그렇게 소중해서 매일같이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 P42

생각이 많다는 건 칭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다만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물론 가끔은 쓸데없는 생각들이 세상을 바꾸는 경우도 있겠지만 말이다. - P51

"나는 네가 차별 없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사회는 원산지 표시가 분명한 것을 좋아하잖아요." - P51

부모 면접을 보고 싶다면서 아이를 좋아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니. 개인적인 사정은 또 뭘까? 돈 문제겠지. 두 사람은 보정하지 않은 홀로그램처럼 말과 행동 또한 거침이 없었다. 센터를 찾는 대부분의 프리 포스터들이 정부의 혜택을 원하는 것과 결국은 같은 목적일 테지만, 굳이 차이를 따지자면 진실을 애써 감추느냐 솔직히 털어놓느냐였다. - P57

누군가가 나를 꿰뚫고 있다는 기분은 썩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감사한 경우도 있다. 나를 잘 알고 있음에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배려하는 모습이 그렇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쉽게 말하고 또 쉽게 생각한다. 내가 알고 있는 상대가 전부라고 믿는 오류를 범한다. 그런 사람 중에서 진짜 상대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기 마음조차 모르는 인간들인데. - P61

"가끔 생각하고는 해요. 유전자를 무시할 수 없다면······ 저를 낳은 부모도 저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겠지, 하고. 아이가 생기자 그분들은 제가 자신들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곰곰이 생각해 봤을 거예요. 결국 필요 없다고 판단한 거죠. 물론 어디까지나 제 상상에 지나지 않아요.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의논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나라는 존재는 깨끗이 잊었겠죠. 저는 가시처럼 뾰족한 성격을 물려받았고요. 어쨌든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제 삶도 썩 편하지는 않았겠네요." - P75

바깥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를 과연 몇 명이라고 생각할까? 아니면 몇 개라고 생각할까? 이런 것들이 쓸데없는 궁금증인 걸까. 헬퍼는 기능도 종류도 다양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딱 맞는 헬퍼를 고르려고 노력한다. 이를테면 이곳 센터의 아이들이 부모를 선택하는 것처럼. 그런데 과연 완벽하게 딱 맞는다는 것이 존재할까? - P77

아무리 강한 힘으로 권력을 얻었다고 해도, 전 우두머리의 새끼를 물리치고 약한 상대를 짓밟는다고 해도, 승리의 시간은 결코 영원하지 않을 테니까. - P89

"그럼 이곳에 오는 다른 사람들은 준비가 됐고요?" 나는 박이 말한 준비의 의미를 알고 싶었다. 부모가 된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아이를 맞이할 준비란? 준비를 하면 좋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물론 박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대략은 알고 있었다. 새 가족을 맞이한다는 건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니까. - P91

"프리 포스터들은 마치 육아 서적을 열심히 읽은 후에 자, 이만 하면 아기를 낳아도 되겠어, 생각하는 사람 같지 않나요?"
"······"
"세상 어떤 부모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잖아요."
"······"
"부모와 아이와의 관계, 그건 만들어 가는 거니까요." - P91

때로는 부모이기에 나약하고, 부모이기에 무너져 내릴 때가 있겠지. 거짓말도 하고, 잘못된 판단도 하겠지. 노아의 전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부모에게 길을 안내해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어깨를 빌려줘야 하는 상황도 생기겠지. - P92

"네가 만약 살아남은 새끼 원숭이 에드거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너도 던컨이 그랬듯 공격적인 수컷이 되어 지금의 우두머리를 처단할 것 같니?"
박의 질문을 듣자 나는 문득 이 책의 저자가 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새끼 원숭이에게 ‘에드거(Edgar)‘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새끼 원숭이의 이름이 에드거잖아요. 에드거라는 이름의 어원은 행복을 만드는 사람, 뭐 그런 거래요. 이 녀석이 영리하다면 복수심 때문에 아론이나 던컨처럼 평생 불안해하며 살지는 않을 것 같아요. 에드거의 행복은 그야말로 녀석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 - P94

자꾸 박의 그늘진 얼굴이 떠올랐다. 마치 환영처럼, 빛의 잔상처럼······ 그래, 박도 사람이었다. 작은 일에도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 - P99

진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에만 쓸모가 있다. 그게 진실의 역할이었다. 사람들이 NC 출신과 자신들은 다르다고 선을 긋는 것이 이득이라고 믿는다면, 그게 곧 진실이 될 수밖에 없었다. - P104

"반가웠어. 너는 되게 어른스럽다. 어른인 우리보다 훨씬."
"어른이라고 다 어른스러울 필요 있나요."
이것 역시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모든 어른의 가슴속에는 자라지 못한 아이가 살고 있다고 했다. 여자의 가슴속에 발레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열 살 아이가 살고 있는 것처럼. - P109

"세상의 모든 부모는 불안정하고 불안한 존재들 아니에요? 그들도 부모 노릇이 처음이잖아요. 누군가에게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한다는 뜻 같아요. 많은 부모가 아이들 에게 자기 약점을 감추고 치부를 드러내지 않죠. 그런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가 무너져요." - P111

우리는 양 떼가 아니기에, 양치기 개가 몰아가는 대로 우르르 움직일 수 없었다. 우리가 원하는 진짜 어른은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고 믿고, 자신들이 모르는 걸 우리가 알 수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 P112

원칙과 규율을 칼같이 지키는 것보다 힘든 것은 원칙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유를 허락하는 일이었다. - P113

박은 꼭 노아에게 걸맞은 부모를 찾아 줄 것이다. 좀 욱하는 성격이 문제지만, 그 나름 생각이 깊은 녀석이다. 노아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가젤이나 얼룩말, 기린인지도 몰랐다. 부모를 만남과 동시에 뛰고 걷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아이들. 그럼에도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가기 버거운,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 만약 진짜 인간이 그렇게 태어날 수만 있다면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그러나 기억할 수 없는 어릴 적 상처나 아픔이 조금은 덜하지 않을까. 가젤이라······. - P122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세상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 많은 것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생물학적 부모가 누군지 모를 뿐, 나는 상처 받은 어린 시절도 없다. 나는 감히 박의 아픔을 가늠할 수 없다. 그런데도 박이 겪은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부끄러웠다. 박과 최, 아키와 노아 앞에서 잘난 척하면서 떠들곤 했던 나 자신이······. - P142

‘세상 어떤 부모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잖아요.‘
‘부모를 결정하는 선택권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다. 아닌가요?‘
쿵쾅거리던 심장이 차차 가라앉았다. 가슴속으로 서늘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사람들이 NC 센터를 오해하듯이 나도 나만의 틀 속에 세상을 가둬 놓고 그게 전부라고 믿었다. 그 너머를 상상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까지 나는 그런 시선으로 무엇이든 멋대로 평가해 온 것이다. - P142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꿈이고 목표다. 아무리 하나의 어머니가 최고의 환경과 최고의 교육을 동경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 어머니의 꿈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는 어머니와 전혀 다른 인격체였고, 전혀 다른 꿈을 가진 한 명의 사람이었다. - P158

어쩌면 지금도 많은 아이들이, 자신의 꿈이 아닌 부모 꿈의 대리인으로 살아가는지도 몰랐다. 아니, 자신이 대리인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수도······.
문득 일전에 하나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결국 내가 나를 이룬다고 믿는 것들은 사실 내가 모르는 사이 에 만들어진 것들이잖아. ······그럼 기억이 형성되기 전의 나는 어떻게 키워졌을까?‘ - P159

온전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건, 그게 누구든,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내가 나를 이루는 요소라고 믿는 것들이 정작 외부에서 온 것일 수도 있으니까.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 낯선 사람과 친구가 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리듯, 내가 나를 알고 친해지기까지, 그렇게 스스로를 이해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 P159

"엄마와 나를 분리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어. 엄마는 그런 나를 보면서 심한 배신감을 느꼈지. 당신은 나를 위해 모든 삶을 희생하고 언제나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더 이상 엄마 따위는 필요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어. 그럴수록 나는 엄마가 아닌 내 삶을 향해 나아갔고, 어느새 독립할 나이가 되었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여겼어. 그런데, 그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됐어."
"뭔데요?"
"내가 엄마에게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이 필요했듯이······."
"······."
"엄마 역시 나로부터 독립이 필요했다는 걸 말이야." - P160

독립이란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를 떠나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의 말처럼, 어쩌면 부모 역시 자녀 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는 건지도 몰랐다. 자녀가 오롯이 자신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걸 부모에 대한 배신이 아닌 기쁨으로 여기는 것, 자녀로부터의 진정한 부모 독립 말이다. - P160

"한 가족이 된 것을 기뻐할 때도 있을 테고, 후회할 때도 있을 거야. 너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야. 얼굴 표정, 목소리만으로 서로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 정도로 가까워지겠지. 그렇게 되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야. 내가 친구들과 그랬듯이. 해오름과 부부가 되었을 때 또 그랬듯이." - P163

나는 테이블에 놓인 그림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걸 그리기 위해 해오름은 꽤 시간을 들였겠지. 재능은 얼마나 잘하는가에 달려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절대 멈추지 않는 것, 그게 재능 같았다. 싸우고 다투고 매일같이 상처를 입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지 않는 가족처럼 말이다. 아니, 그건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는 무엇 아닐까. - P167

"사실은 너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구나."
"······저도 저를 모르는걸요."
나도 내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네가 나에게 시간을 더 주는구나."
문득 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를 더 알아 갈 수 있는 시간." - P169

일 년 내내 맑은 날만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구름과 비바람이 없다면 살아남을 식물이 있을까. 이 세상은 사막이 될지도 모른다. - P174

우리는 더 좋은 부모, 더 능력 있는 부모를 기다리는 게 아닐지도 몰랐다. 그저 나와 인연이 닿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뿐일지도. 탯줄처럼, 신비한 끈처럼 이어진 누군가를 말이야. - P175

부모에 대한 우리의 기대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내가 만날 부모만큼은 진심으로 아이를 아껴 주고 경제적으로 풍족 하고 지성과 교양을 갖춘, 완벽한 사람일 것이라는 기대. 그러나 몇 번의 페인트를 거치면서 알게 된다. 우리도, 그들도, 조금씩 문턱을 낮추고 어느 정도 타협하는 심정으로 변한다는 것을 말이다. - P184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마주한다는 건 생각보다 큰 용기를 필요로 하니까. 박의 용기가 과연 그 자신에게 어떤 것을 가져다주었는지 궁금했다. 박이 없는 동안 나는 그의 말을 곱씹어 보고는 했다.
‘나를 위해서야. 나를 위해서······.‘ - P185

박의 말처럼 어떤 시대든 차별은 존재했다. 그러나 그 차별과 억압을 조금씩 부숴 나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의 발전이기도 하다. - P194

잘 닦인 고속도로를 놔두고 좁고 험한 길을 택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찾는 사람이 늘면 언젠가는 좁고 험한 길도 넓고 평평해질 것이다. 시작은 돌멩이 하나를 치우는 일일 것이다. 벌써 누군가는 돌멩이를 멀리 풀숲으로 던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뒤에 오는 사람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 P194

물론, 나도 앞날을 생각하면 두려웠다. 그러나 분명 기회는 있을 것이다. 그것이 기회임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노력만 한다면 말이다. 나는 아직 세상에 나가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벌써부터 지레 겁먹을 필요가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경험을 해 보고 싶다. 그 속에서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 P195

모른다는 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모르기 때문에 배울 수 있고, 모르기 때문에 기대할 수 있으니까. 삶이란 결국 몰랐던 것을 끊임없이 깨달아 가는 과정이고 그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는 긴 여행 아닐까?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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