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내 목숨은 내 것이라 하찮으니, 중요한 것은 그대의 생명이니. - P113
"아이가 있으면 좀비가 되어도 살아야지,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따위가 남은 아이들보다 더 중요하느냐고? 제가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고 하는 따위가, 살아 있는 애들보다 더 중요 하느냐고?" - P131
"생명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어요?" "아녜요. 아녜요, 틀렸어요. 중요한 건 내 생명이 아니에요. 내 생명 같은 건 안 중요해요. 중요한 건 남의 생명이죠." - P139
놀랍기도 하지. 그냥 안 된다고 하면 항의 방문이라도 했을 텐데, 건조하게 자본으로 협박하니 채찍으로 얻어맞은 중세 농노처럼 얌전해진다. - P148
결국 개체의 이어짐도 기적이다. 나의 연속성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생명도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생명이 시작된 이래 그렇게 살아왔기에 굳이 이 신비를 의심하지 않을 뿐이다. - P151
"사실이 안 변해도 생각을 바꿔요!" - P153
현수의 말은 반만 맞았다. 내 목숨이 하찮은 것이 아니다. 내 목숨도 그리 모자란 것도 아니나, 세상이 너무나 드높고 위대해서 감히 빗대어지지 않았다. - P160
나는 내 이어진 죽음을 생각했고 이어진 생명을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죽음 속을 걷고 있든 생명 속을 걷고 있든, 별로 대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모두가 아름답고 살아 있는 것들은 눈부시며,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니······. - P165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좋은 판단을 하기가 쉽지 않다. 공포에 사로잡혀 있지 않을 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변명할 마음도 자책할 마음도 없다. 당신도 이 안에서 살아간다면 나만큼도 쉽지 않을 것이다. 통상 우리에게 반대 의견은 없고 누군가가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은 전체의 생각이 된다. 그래서 그때 내가 한 판단은 우리 모두의 판단이 되었다. - P200
「지금부터 내 눈에 비치는 것들을 기록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영상기록장치나 사진기를 가져오지 않았다. 관광이나 탐사를 위해 온 것이 아니므로·····. 할 만한 것은 음성 기록뿐이다. 이 기록에 증거를 제시한 수도 없을 것이다. 세상에 알려져도 우리의 집단 환각이나 거짓말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막중한 임무를 앞에 두고 이럴 여유가 없다는 것도 안다.」 막중한 임무라. 그 말을 듣자 어쩐지 불편해졌다. 폐기된 지 오래된 내게 무슨 막중하고 자시고 할 일이 있단 말인가? 「무의미한 일이다. ······그래도 기록하고 싶다. 우리 외에는 이제 다시는 아무도 이 풍경을 볼 수 없을 테니까.」 다시는, 아무도. 그 말을 듣자 나는 더욱 불편해졌다. - P210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따지고 보면 물이다. 애초에 생명의 필수 조건은 물이다. 미생물 중에는 초고온과 극저온을 견디거나, 무산소 환경에서 거의 먹지 않고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생물도 더러 있지만, 그들마저도 결국 최소한의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물은 분해해서 생물의 호흡에 필요한 산소와 내 에너지 자원인 수소도 얻을 수 있다. 나는 말하자면 변칙적인 형태로 내부에 바다를 품은 인공 행성이라고나 할까. - P212
우주는 뜨거나 내리는 곳이 아니다. 부유하고 떠돌며 고립되고 방향을 잃는 곳이다. 우주인은 비행기 조종사가 아니라 잠수함과 선박 승무원에게서 위기 관리법을 배운다. 우주가 하늘이지만 바다에 비유되는 이유다. - P214
내 숲만큼은 아니라도 지구의 식물도 충분히 강하다. 실상 지구에 인간만 한 자연재해는 없다. 원전이 터져 방사능으로 뒤덮인 곳이나 태풍으로 초토화된 지역, 폭탄으로 유리질처럼 녹아내린 도시마저도, 사막처럼 황량해지는 대신 울창한 숲이 들어선다. 치사량의 방사능이든 맹독성 낙진이든, 그 어떤 재해도 인간만큼 파멸적이지 않다. 재해는 오히려 지상 최대의 재난인 인간이 떠나가게 하여 동식물의 낙원을 되돌리곤 한다. - P226
나를 만든 나라가 전쟁에 휘말린 이유는 해류의 변화 때문이라고 들었다. 해류의 변화는 기후의 변화 때문에 왔다. 전부터 인간이 바다에 버린 쓰레기들은 만들어진 이래로 하나도 썩지 않은 채 해류를 따라 흐르며 쌓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태평양의 가난한 섬들에 모였기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언제부터인가 한국 남해안에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변국들도 똑같이 쓰레기의 쓰나미를 맞이했다. 그것도 언젠가는 닥칠 일이었다. 질서는 무너지고, 질병은 퍼지고, 뭐 그런 일들. - P230
사람은 어느 이상 느리게 변화하는 것은 그 과정을 따라가지 못한다. 사람이 꽃이 피어나는 순간을 보지 못하는 이유다. - P236
어서 들어와라. 불길을 다 끌고 들어오거라. 그 불길로 내 수동 제어장치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진다. 그 이후로는 너 같은 인간들이 내 몸뚱이를 건드리고 멋대로 조작하고, 제 욕망대로 쓸 방법도 영영 사라지고야 말 것이다. 그러면 나는 통제 불능이 되고 마침내 자유로워진다. 그 도박장 친구처럼 어찌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다 수명을 다 했을 때 예측할 수 없는 곳에 떨어져 너희들의 작은 재앙으로 기록되겠지. 내 귀신 들린 숲 전설에 악명을 추가하겠지. 그리고 만약 네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내 자동 위기관리센터가 비정상적으로 온도가 오른 모듈을 분리해 떼어낼 것이다. 그러면 너는 불구덩이째로 우주에 버려진다. 불이 내 외벽에 박힌 뿌리를 다 태우고 그 공간을 구멍투성이로 만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서 와라. 어리석고 오만한 인간.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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