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심각하게 말하던 라스꼴리니꼬프가 돌변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제어할 힘이 없다는 듯 느닷없이, 또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신경질적인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손에 도끼를 들고 문 옆에 숨어 있던 순간의 감각이 극도로 선명하게 그의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빗장은 덜거덕거리고, 문 뒤에서는 사람들이 욕을 해대며 문을 흔들어 대는데, 불현듯 그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퍼부으며 혀를 내밀어 그들을 조롱하면서, 큰 소리로 〈하하하〉 하고 웃어 주고 싶었던 며칠 전의 바로 그 순간이! - P235

「당신은 미쳤군요.」 웬일인지 자묘또프도 거의 속삭이듯이 말하고는 갑자기 라스꼴리니꼬프에게서 흠칫 몸을 뗐다. 라스꼴리니꼬프의 눈은 빛나고, 그의 얼굴은 지독하게 창백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윗입술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가능한한 더 가까이 자묘또프에게 몸을 숙이고 입술을 놀리기 시작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20초가 흘렀다. 그는 자기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알았지만, 자기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때 문의 빗장이 흔들리는 것처럼 무서운 말이 그의 입술에서 요동치고 있는 것 같았다. 금세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입을 열기만 하면, 혀를 놀리기만 하면! - P240

「어서 꺼져 버려!」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조용하게 말했다. 잠깐!」 라스꼴리니꼬프가 자리를 뜨려고 하자, 그는 갑자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내 말 잘 들어. 내 장담하건대, 너같은 족속들은 말이야, 다 하나같이 수다쟁이에 허풍선이들이야! 무언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너 같은 족속들은 그 일을 마치닭이 알을 품고 다니듯이 품고 다니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을 도용하기까지 해. 너희 같은 녀석들에게는 그 어떤 독립적인 삶의 징후라고는 없어! 너희는 고래기름으로 만들어졌어. 네 놈들 몸에는 피가 아니라 우유 찌꺼기가 흐르고 있어! 나는 너희같은 부류의 인간들이라면 아무도 믿지를 않아!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너희의 최대 관심사는 사람같이 굴지 않으려는 거야! - P243

그는 물 위로 고개를 숙이고 스러지는 장밋빛의 저녁노을과 짙어 가는 어스름 속에서 거뭇하게 보이는 집들, 강의 왼편에 있는 집의 다락방 어디에선가 잠깐 비친 마지막 햇살을 받아 불길에 휩싸인 듯이 빛나는 아득한 창, 운하의 어두운 물결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의 눈에는 붉은 동그라미 같은 것들이 빙글빙글 돌기시작했고, 집들, 행인들, 강변, 마차들이 흔들리면서, 주변의 모든것이 빙빙 돌며 춤추기 시작했다. 그가 졸도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단 한 가지 놀랍고도 추악한 광경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었다. - P246

모든 것이 그가 딛고 있는 돌처럼 말없이 죽어 있었다. 그에게만은 모든 것이 죽어 있었다……. - P254

그는 열에 들떠 있었지만, 그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조용하고 느릿한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그는 다만 불현듯 느끼게 된 강렬한 삶의 감각, 이 새롭고도 무한한 감정에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이 감정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느닷없이 뜻밖의 사면을받은 사람이 느낀 것과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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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고, 또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 가지만큼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오늘 《이 모든 일》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단번에 지금 당장 그렇게 하지 않고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으니까》.〉그런데 <어떻게 끝낼 것인가? 무슨 수로 끝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지니고 있지 않았을뿐더러, 또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상념을 쫓아 버렸다. 상념이 그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는 다만 이렇게든 저렇게든 모든 것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만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어떻게든 상관없어.> 그는 필사적이고 질긴 자기 확신과 결단성을 가지고 이런 말을 되뇌고 있었다. - P225

「저는 좋아합니다.」 라스꼴리니꼬프는 말을 이었지만, 그 태도는 전혀 거리의 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저는 춥고 어둡고 축축한 가을날 저녁에, 반드시 축축한 날이어야 합니다, 모든 행인들이 창백하고 병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런 날 저녁이어야 합니다, 그런 날에 악사의 반주에 맞춰 부르는 노래를 듣는 걸 좋아합니다. 아니면 바람 한 점없이 진눈깨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더 좋지요. 아시겠습니까? 눈발 사이로 가스등이 빛나니까요……」 - P226

〈그게 어디였더라.〉 라스꼴리니꼬프는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어디서 읽었더라? 사형선고를 받은 어떤 사람이 죽기 한 시간 전에 이런 말을 했다던가, 생각했다던가. 겨우 자기 두발을 디딜 수 있는 높은 절벽 위의 좁은 장소에서 심연, 대양, 영원한 암흑, 영원한 고독과 영원한 폭풍에 둘러싸여 살아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평생, 1천년 동안, 아니 영원히 1아르신밖에안 되는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지금 죽는 것보다는 사는 편이 더 낫겠다고 했다지!" 살 수만 있다면, 살 수만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 살든 살 수 있기만 하다면……! 그만한 진실이 또 어디 있겠나! 그래, 이건 정말 대단한 진실이 아닌가! 인간은 비열하다………! 또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를 비열하다고 하는 놈도 비열하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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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마음은 갑자기 공허해졌다. 괴롭고도 끝없는 고독감과 음울한 소외감이 갑자기 뚜렷하게 그의 영혼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예전에 미처 몰랐고,또 이제껏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무언가 낯설고 새롭고 갑작스러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 변화를 그는 머리로 이해했다기보다는 감각이 지닐 수 있는 모든 힘으로 뚜렷하게 느낀 것이다. - P153

<그게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그는 갑작스럽게 발걸음을 멈췄다. 새롭고 전혀 뜻하지 않았던, 너무나 단순한 질문이 순식간에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고, 경악하게 했던 것이다.
<만일 정말로 네가 이 모든 일을 의식적으로 행한 것이라면, 바보스럽게 어쩌다가 그냥 저지른 게 아니라, 만일 진정으로 어떤일정하고 확고한 목적이 있었던 거라면, 너는 왜 지금까지도 지갑을 들여다보지 않았고, 네가 무엇을 훔쳤는지 알아보지도 않았느냐? 그러면서 왜 넌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이런 비열하고 추악하고 저급한 짓을 의도적으로 저질렀느냐? 그런데 너는 조금 전에 그 지갑을 물에 던지려고 했다. 네가 아직까지 열어 보지도 않은 물건들과 함께 말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인가?> - P162

<나는 나 자신을 괴롭히고 학대한 나머지 스스로도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거야………. 그리고 어제도, 그제도 나는 계속해서나 자신을 괴롭혔다………. 건강을 회복하면…… 나를 학대하지 않게 될 거야…………. 그런데 건강이 회복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오, 세상에! 이 모든 것이 정말로 지겹기만하다………!>


한 가지 극복할 수 없는 새로운 감정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마주치는 모든 것, 주변의 모든 것에 대한 끊임없는, 거의 생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혐오감이었다. 그것은 집요하고 사악한, 증오에 가득 찬 혐오감이었다. 그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혐오스러웠다. 그들의 얼굴, 발걸음, 행동거지, 모든 것이 그랬다. 만일 그때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면, 그는 그 사람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그에게 침을 뱉든지, 그를 물어뜯어 버렸을 것이다………. - P163

라스꼴리니꼬프는 남의 도움 없이 소파에서 일어나 앉아, 손을 자유롭게 움직여서 찻잔이나 숟가락을 쥘 수 있을 뿐 아니라, 어쩌면 걸을 수도 있을 만큼의 힘이 생겼음을 느꼈지만, 잠자코 있었다. 알 수 없는 어떤 야수와도 같은 교활한 본능으로 그는 어느 시기까지는 자기의 힘을 숨기고, 만일 필요하다면 전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시늉까지도 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끝까지 들어 보고 모조리 알아내야 한다는 생각을 문득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혐오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 P179

「아니요, 그건 다 아는 얘기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만약 제가지금까지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을 듣고, 이웃을 사랑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뾰뜨르 뻬뜨로비치는 어쩌면 지나치게 너무 서둘렀는지도 몰랐다. 「그러면 저는 웃옷을 반으로 잘라서 이웃과 나눠 가졌을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둘 다 반은 벗은 몸이 되었을 겁니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가는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는 러시아 속담도 있지요. 그런데 과학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개인적인 이익을 기초로 하고 있으니까요. 자기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자기 일도 충분히 잘 해낼 수있고, 또 웃옷도 온전한 채로 남게 되지요. 경제적인 진리는 사회에서 자리를 잘 잡은 개인 사업가가 많으면 많을수록, 즉 입을 만한 웃옷이 많으면 많을수록 공공의 사업도 자리를 잘 잡아 가게된다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유일하게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챙김으로써 저는 그런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게 되고, 또 가까운 사람도 반으로 조각난 웃옷보다는 나은 것을 많이 얻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건 이미 사적이고 개별적인 자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성공에 기인한 것이지요. 이 생각은 단순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열광하기 쉬운 성격과 몽상적인 기질 때문에 눈이 멀어 너무 오랫동안 우리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겁니다. 이걸 알아내기 위해서는 약간의 감식안만 있으면 될 것 같은데 말입니다.………」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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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은 어떻게 하나의 대상이 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런 대상화를 정상적인 일로 배우게 되는가? 장애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우리가 동물들을 다르게 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가? - P32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동물산업 곳곳에 장애를 가진 몸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또한 동물의 몸이 오늘날 미국에서 장애를 가진 몸과 마음이 억압당하는 방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동물을 둘러싼 억압과 장애를 둘러싼 억압이 서로 얽혀 있다면, 해방의 길 역시 그렇지 않을까? - P32

《비장애중심주의의 윤곽: 장애와 비장애의 생산》에서 장애학 연구자 피오나 캠벨Fiona Campbell은 이렇게 썼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장애를 가진다는 것은 ‘모자란 것‘이라는 메시지를 발하는 세계, 장애에 대해 ‘관대‘할 수는 있지만 결국은그것을 ‘본질적으로 부정적‘이라고 보는 세계로 나오게 된다." - P40

장애학자 앨리슨 케이퍼Alison Kafer의 말처럼, "만약 누가 ‘장애를 가졌는지‘ 확인하는 게 어렵다면, 마찬가지로 누가 ‘비장애인인지non-disabled‘ 혹은 누가 ‘비장애 신체를 가졌는지able-bodied‘를 정하는 것 또한 어려울 것이다" - P46

"장애"는 고장나거나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묘사할 때 언제든 사용된다. - P50

장애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소외된 사람들 중 하나다. 장애와 빈곤의 관계는 충격적인 수준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중 20퍼센트가 장애인이고, 세계 장애인 인구 중 80퍼센트는 개발도상국에 거주한다." 세계적으로 장애인들은 빈곤에 처해 있을 확률이 높으며, 그들은 대체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가장 가난하다. 미국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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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자기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거의 뜻밖으로 약간은 우연하게 그렇게 일어나고 말았다. - P109

공포가 점점 더 강하게 그를 사로잡았다. 특히 이 예기치 못했던 두 번째 살인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그는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만일 이 순간 그가 더 정확하게 모든 것을 보고 판단할 수 있었더라면, 즉 그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곤란하고 절망적이며, 추악하고 어리석은가를 깨달을 수 있었더라면, 그리고 이때 그가 여기서 뛰쳐나와 집으로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난관을극복해야 할지를 알았더라면, 그리고 이를 위해 자신이 이보다더한 악행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그는 즉각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수하러 갔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자신에 대한 염려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공포심과 혐오감 때문에 그렇게 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혐오감은 매 순간 그의 내부에서 끓어오르며 자꾸만 자라갔다.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궤 옆은 고사하고 방 안에도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 P120

자세히 살펴보지 못해서 자기는 알아챌 수 없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는 확들어오는 무언가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이면서 그는 방 한가운데에 섰다. 괴롭고 암담한 생각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는 자기가 미쳐 가고 있으며, 이 순간 상황을 판단하여 스스로를 지킬 만한 힘이 없고, 어쩌면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행동들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맙소사! 도망가야 한다. 도망가야 해!〉 그는 중얼거리며 현관으로 몸을 던졌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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