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판단의 근거로 작용하는 이 "자연"이란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어떻게 정의했는가?
"자연 상태"라는 관념, 즉 인간의 문화가 존재하기 전의 자연 혹은 인간의 문화가 부재하는 자연이라는 관념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개념은 우리가 어떤 몸을 살기 적합한livable 것 혹은 즐길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지, 또한 어떤 몸들을 착취하고 소비하고 먹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관해 논하는 우리의 철학 이론, 정치 체계 그리고 견해들을 구축했
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것이 이런 판단들과 구분들을 정당화하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정당화하는 것인가? - P216

커뮤니티 구축과 장애 커뮤니티들 사이의 차이를 관통하는 연대의 가능성을 반영하게 된 단어로서 "장애"가 갖는광범위하고 성긴 의미와 달리, 철학적이고 의학적인 틀에서 "중증 장애"에 관해 전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음" "자명한 비극" "잠재적 인격 결여" 등이다. - P230

쾌고감수능력을 가진 피조물이 살아 있음과 죽어감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없다고 대체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다양한 동물들이 죽지 않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한다는 것을 안다. 거기에는 스스로에게 극도의 통증을 유발하는 행동도 포함된다(어떤 동물이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 발을 물어뜯는 것처럼). 동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게 분명하다. 언제든 죽을 수 있고 죽음 같은 것이 있다는 걸 스스로 모를지라도 말이다. - P231

싱어에게 장애가 창조적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나는 장애인 무용수이자 예술가, 시인인 닐 마커스Neil Marcus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장애는 ‘용감한 고투‘나
‘역경과 마주하는 용기‘ 같은 것이 아니다……장애는 예술이다. 그것은 삶을 사는 독창적인 방식이다."
나는 이 말을 사랑한다. 이것은 예술가로서의 나 그리고 일상을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집거나 어디엔가 도달할 방법을 창조적으로 알아내려고 하는 장애인으로서의 나, 이 양쪽 모두와 공명한다. 마커스의 말은 장애가 단순히 결핍이라는 생각에 저항한다. 게다가 그의 말은 우리가 효율성, 진보, 자립, 이성을 반드시 중심에 두지는 않는 삶의 방식들에서 가치를 찾도록 촉구한다. 장애학 연구자 로버트 맥루어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겪을 장애를 환영하고 그것을 욕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 수 있는가?"


장애는 해방적일 수도 있고, 신나는 일일 수도 있으며, 또한 우리에게 "정상적이기"를 요구하는 사회의 지속적인 공세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유의 장소일 수도 있다. - P238

존슨은 날카롭게 물었다. "우리는 ‘남들보다 더 불행한‘걸까요?" 그러고는 이렇게 썼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어떤 의미로도 말이에요. 변수가 너무 많거든요. 선천적 장애를가진 우리는 장애가 모든 것을 구축하는 존재일 거예요. 후천적으로 장애를 갖게 된 이들은 적응해가겠죠. 우리는 그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제약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풍부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만들어가고 있어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즐기는 쾌락도 즐기지만 우리만의 고유한 쾌락도 즐기죠. 우리는 이 세계가 필요로 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요." - P244

싱어와의 대화에서 내가 방어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우리 중 어떤 이들은 2달러의 알약을 먹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나는 "대부분의 장애인들"이라고대답했다. 하지만 확실히 자신에게 있는 장애를 즐기지 않는 장애인들, 장애를 "창조적"이라고 말하는 것을 비웃는 장애인들,
치료된다는 말에 크게 기뻐할 장애인들은 많을 것이다. 이는 비단 비장애중심주의와 내면화된 억압 때문만이 아니라, 상실, 고통, 개인적 욕망 때문일 수도 있다. 싱어에게 나는 어떤 장애인들은 장애를 갖는 것을 원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그렇지는 않다고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답조차 그런 질문들에 너무나 큰 힘을 부여한다. 고통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고통이 성취를 부정한다고 상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치료의 문제는 자신의 장애에 대한 자긍심 대 의료적 개입이라는 잘못된 이분법을 만들어낸다. - P247

우리가 문제시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사실들이 뜻하는 바가 장애란 객관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으며 그런 감정들만이 장애에 대한 합리적인 반응이라고 보는, 아주 뿌리 깊고 만연한 전제 자체다.
장애가 좋은지 나쁜지, 그것이 고통을 일으키는지 아닌지 증명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별반 기대할 바 없는 게임이다. 게다가 그런 것은 우리로 하여금 취약성, 가변성 그리고 우리가 어떤 세상에 살기를 원하는지 같은 더 중요한 물음들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 P248

우리는 모두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이 고통은 우리 자신의 다른 경험들에 대한 부정을 뜻하지 않는다.
고통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분명 문제적임을 지적하는 것만큼, 고통에 대한 부인 또한 문제적임을 지적해야 한다. 고통을 느끼는 역량은 인간들 사이의 차이와 종들 간 차이를 막론하고 공유되는 것이다. 고통은 공감의 장소이자 타자의 고투를 인식하는 장소다. 어떤 존재가 지닌 고통을 느끼는 역량을 부인한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 다른 동물들에게 너무나 자주 행사해온 극심한 폭력 행위나 다름없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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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함을 사랑한댔지. 나를 사랑했던 것처럼. 이제는 아니지만"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이미 했던 이야기잖아, 필립."
"진짜라는 거네"
"응. 나는 결함을 사랑해." 그녀는 움찔하지도, 불안해하지도 않았다. 이제 입 밖으로 내기가 편안해진 듯했다.
"나는 당신에게 너무 현실적이었던 건가? 상상 속 존재를 만나고 싶어 하는 줄 몰랐네."
"결함은 진짜야, 필립. 우리를 찾아온 거야. 외계인처럼."
"앨리스, 결함은 하나의 관념일 뿐이야. 당신을 투영해 만들어진."
그녀는 반항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결함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그 누군가보다 훨씬 나은 관념이야. 완벽함과 사랑, 완벽한 사랑 그 자체야."
"석류에 대한 사랑, 계산자에 대한 사랑이 완벽하단 말이야?"
"맞아. 결함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사랑. 순수한 사랑이야." - P154

"나는 절대 이길 수 없을 거야. 결함보다 더 수수께끼처럼 굴 수는 없으니까. 존재하는지조차 알기 어렵게 굴잖아" 앨리스는 붉어진 눈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당신은 여기 있어. 나는 갈게. 여기서 흔자 울어. 나는 집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혼자 울게. 똑같이 처참하지만 멀리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섬이 되는 거야. 당신은 여기 아래에, 나는 저 위에" - P157

우리는 둘 다 눈물을 흘렸다. 두 장님과 아파트를 떠올리니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는 공허하고 황량한 우주가 아닌 지구 어딘가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침실과 침대가 있는 평범한 장소. 자동차와 우리 집, 결합이 삼킨 소리굽쇠, 도자기, 재떨이와 두 장님의 딱딱거리는 지팡이 같은 일상적인 물건들이 무거운 추가 되어 우리를 공허에서 꺼내 주는 것 같았다. - P158

나는 우리 사이 공간을 기어가 그녀를 안았다. 내 팔을 그녀의 어깨에 두르고 얼굴은 그녀의 머리칼에 묻었다. 우리는 함께 울었다. 우리 두 사람의 몸은 하나였다. 빈 곳 없이 서로에게 딱 맞는, 대체할 수 없는 두 개의 조각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체로 하나의 시스템이었고, 우주였다. 그 순간만큼은.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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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린네의 용어 호모 사피엔스는 "지혜로운 인간/남자 man ofwisdom"를 뜻하는데, 이는 거의 전적으로 백인 남성에 귀속되는 특징인 이성을 통해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 P173

<가장 가까운 친족>에서 파우츠는 자신이 과학자의 가장요한 규칙을 어겼다고 썼다. "연구 대상을 사랑하지 마라."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계속 그 규칙을 깨뜨려주길 바란다. - P182

동물과 닮았다는 말을 듣는다는 것. 나는 이것이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분리시킨다는 걸 알고 있었다. - P189

동물과 비교당하는 것이 우리에게 강도 높은 모욕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가 동물들에게는 주체적이며 정서적인 삶, 즉 우리로 하여금 책임감을 갖고 대하게 만드는 종류의 삶이 결여되어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서구 전통에서 동물은 우리에게 거의 아무런 의무도 요구하지 않는 존재들의 범주다. 우리는 그것들을 사고팔고 물건처럼 처분할 수 있다. 따라서 누군가를 동물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를 아무런 책무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어떤 죄책감도 없이 대상화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 P195

"종차별주의 담론은 언제나 하나의 인간 집단이 다른 인간 집단을 공격하는 데 쓰일 수 있으며, 이는 다른 종에 속한 사회적 타자 혹은 종뿐만 아니라 성별, 인종, 계급 등으로 구분된 사회적 타자들에 대한 폭력을 용인하는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 P195

인간과 동물의 전시는 종교적·과학적·식민주의적 실천들과 긴밀하게 엮여 있는 하나의 계보를 공유한다. 중세시대에 왕의 힘을 상징했던, 살아 있는 기형의 존재들을 대상으로 한 컬렉션부터 서구 식민지 세력의 승리를 과시하기 위한 19세기의 동물원, 사이드 쇼, 만국박람회까지, 인간과 동물들의 전시 혹은 소위 "식민지 상품들"은 오랫동안 경제적·문화적으로 얽혀왔다. - P197

그들은 과연 동물 취급을 받아도 괜찮은 존재인 걸까.
동물들이 인간의 손에 끔찍한 폭력을 당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폭력은 흔히 인간들이 서로에게 휘둘러 온 폭력과 같은 계보를 공유한다. 동물들이 겪은 끔찍한 일들을 우리가 동물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 이유뿐 아니라, 동물들이 우리의 친족kin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하는 이유의 사례로 본다면 어떨까? 동물임을 자처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폄하가 아니라 동물화와 종차별주의의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일수도 있다면 어떨까? 즉 동물해방이 우리 자신의 해방과 얽혀 있음을 인식하는 방식이라면? - P198

장애 문화에 동물로의 전환 animal turn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너무 이를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동물들에 대한 인식이 커지고 있음을, 동물들을 전적으로 친족으로 간주하는 것이 안전한지를 묻는 조짐 등을 느낄 수 있다. 동물을 장애와 결부시켜 고찰하는 것이 여전히 비하적인 함의로만 남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것을 풍부하고 생산적으로, 그리고 통찰력이 돋보이도록 만들 수 있을까? - P207

애초에 자연스럽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나의 자연스러운 몸이란 무엇인가? 어디에 있는가?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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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물고기는 없다. 단 한 마리도, 당신은 접시 위에 오른 물고기가고통스러워했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런데) 물고기는 정말로 고통스러웠다." - P150

닭 역시 자주 홀대받는 동물 중 하나다. 닭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감정적으로 훨씬 복잡하고 사회적인 생물체다. 닭은 가족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지능을 실험하는 복잡한 과제들을 수행해내며, 산술 능력이 있고, 인과관계를 파악할 줄 알고, 100마리 정도의 얼굴과 모이 쪼는 서열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또한 닭은 미래를 계획하고 문화적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고 한다. 이들은 다양한 위협을 구분하기 위해 최소한 30가지의 다른 발성을 사용하고, 태양이 어느 쪽에 있는지를 파악하여 방향을 잡아 이동할 수 있다." - P150

동물들에게 감각이 있고, 따라서 그들이 즐거움과 고통은 물론이고 다른 감각이나 정서도 느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에 따라 쾌고감수능력sentience은 아주 중요한 윤리적 함의를 띤다. 왜냐하면 느끼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철학자가 말하는 "이해관계interests"를 갖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의 어떤 측면에 "마음을 쓴다 care". 의자나 휴대폰과 달리 우리는 "상처 입을hurt" 수 있기 때문이다. - P153

우리는 지구상에서 발견된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능력을 이제 막 이해하기 시작한 셈이고, 인간의 능력은 그 다양한 능력들 중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있지만 우리는 갖지 못한 지능과 역량에 대해 이야기하는것은 어려운 일이다. 인간중심적인 세계관 탓에 우리로서는 우리 자신의 것 너머에 있는 지능과 경험을 상상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타자의 삶을 이해하고 그 삶에서 무언가 배우려는 시도를 멈춰선 안 된다. - P154

이 책에서 "동물"에 대해 논할 때, 여기서 말하는 동물이란 무엇이고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는, 언뜻 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질문에조차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분류학적 기제를 이미 확정되어 변경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하기보다는 "동물"에 대한 나의 정의definition를넓게 열어두고자 한다. 우리의 환경 그리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들은 우리가 수립한 제한적인 정의를 완고하게 거부하기 때문이다. - P157

"아프리카인에 대해서는 원숭이의 특질을 강조한반면, 유인원에 대해서는 인간적 성격을 부각시켰다"고 한다. 그런 관행들은 (다른 인종화된 인구 집단에 했던 것처럼) 동물과 아프리카 출신 인간 사이의 간극을 좁혀 노예제와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고 영속화하는 데 기여했다. 직립보행 능력은 자연학자들이 인간의 고유함을 논할 때 초점을 맞춘 특성들 중 하나였다. 당시 학자들에 따르면 유인원들이 인간의 한 유형으로 간주될 수 있기 위해서는 두 발로 직립보행할 수 있어야 했다. - P164

인간의 진화를 상상하는 방식에서 직립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지는 우리에게 친숙한 <진화의 행진> 삽화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 삽화는 제작 당시인 1965년부터 진화를 "인간"을 정점에 둔 단선적 과정으로 오도했다. <진화의 행진〉은 점차 직립하고 두 발로 보행하는 존재로 변해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맨 마지막에는 두 발로 직립한 유럽남성이 있다. 진화의 정점은 단지 인간이 아니라 비장애 신체를가진 백인 남성인 것이다. - P166

"동물이란 하나의 말이다. 그것은 인간/남성이 만들어낸 호명이고, 그는 다른 생명체에게 이름을 부여할 권리와 권위를 스스로에게 준 것이다." 많은 동물학animalstudies 연구자들처럼, 데리다 역시 "동물"이라는 말이 게으르고 모욕적인 의미로 쓰인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저작 전반에 걸쳐그는 동물이라는 이름이 포괄하는 존재들이, 바로 그 동물이라는 이름으로 인해 다양성을 제거당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동물들에 대한 명명을 조사하기 위해 <창세기〉를 참조하는데, 이 이야기에서 명명과 지배가 같은 순간에 발생하는 양상을 살핀다. 신은 아담을 자신과 닮게 만들고는 그에게 "바다의 물고기와 나는 것들,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복종케 하라"고 명한다. 그러고는 아담에게(이브가 창조되거나 명명되기 전에) 동물들을 명명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에서 인간/남성은 이미 짐승들과 분리되어 있는데(그리고 여성과도 분리되는데 이 또한 시사하는 바가 많다), 이 분리 과정에서 명명은 그 자체로 결정적이다. - P168

성서에서는 인간에게 영혼이 주어졌다고 하는데, 영혼은 종종 이성이라는 관념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이성에 대한 강조는 인간이 이성적인 영혼을 소유한다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짐승을 인간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로 보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세 가지 측면을 갖는다고 했다. 그중 이성적인 면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고, 영양적인 면은 식물과 함께 갖는 것이고, 감각적인 면은 동물과 함께 갖는 것이다.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동물지》에서 인간을 동물이라고 부르며 태생적 네발짐승 범주에 포함시켰는데, 이는 이후 2000년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참고로이 책은 유럽 분류법의 토대가 된 문헌이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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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명확한 답을 회피하는 중이었다. 시간을 끌고 싶었다. 하지만 소프트 교수가 앨리스와 결함 사이에 끼고 싶어한다 한들, 내가 그걸 도와야 할까? 나와 앨리스도 서로 원하는 게 매번 같지 않은데 말이다. - P135

그날 아침 북쪽에서 산불이 발생했고, 붉게 물든 하늘이 잿가루로 덮었었다. 동쪽에서는 주황빛 태양이 빛나며 아침부터 석양이 지는 것 같은 기이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자동차 앞 유리와 현금 인출기와 공공 조형물 위에 회색 가루가 곱게 쌓였다. 온종일 해 질 녘이 이어지는 듯했다. 마침내 내린 밤은 신의 은총처럼 느껴졌다. - P140

나는 두 장님을 차단한 채 외로운 전사로서 혼자 상황을 처리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앨리스가 사라진 것이 나만의 문제여야 했다. 에반과 가르스나 소프트 교수의 문제가 되도록 두고 싶지 않았다. - P143

"시간이 주관적인가요 객관적인가요?" 가르스가 뒷좌석 어둠 속에서 단조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에반과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손목시계가 5시 30분을 가리키고 나는 온종일 내 시계를 믿고 있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당신의 시계는 반 시간 늦은 5시를 가리키고 있는 거예 요. 우리 둘은 서로 다른 시간 속에 산 거죠. 당신이 2시일 때 나는 2시 30분이었고, 당신이 4시 15분일 때 나는 4시 45분이었으니 당신은 나에 비해 반 시간 과거에 살았던 겁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시간을 확신하면서 말이죠. 우리 는 말다툼을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붕괴되어 완전히 사라지고 우리 둘만 남았다고 칩시다. 이제 참고할 만한 것도 없고 시간을 관찰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어요. 나는 5시 30분을 살고 있고 당신은 5시를 살고 있으니 시간여행이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시간여행?" 에반이 말했다.
" 5시가 5시 30분과 소통하는 거지" 가르스가 말했다.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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