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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방지기 : 너 지금 충분히 잘하고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이보람!
힘든 내가 힘든 나에게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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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소주를 마시며 내 입맛을 무진장하게 확장시켜왔다고 자부한다. 미각적 도약을 거듭한 결과 이제 개고기에서 삭힌 홍어까지 못 먹는 것이 거의 없다. 그렇게 내가 먹는 음식의 가짓수를 날로 늘려나간 것과 반대로 우리 어머니는 어느 날 돌연 금욕적인 종교에 입문해 먹는 음식의 가짓수를 날로 줄여나갔다. 그토록 즐기던 육고기는 물론이고 생선이나 해물조차 거부하는 순수한 채식주의자가 되신 것이다. 어머니는 오래 전의 나처럼 고기 한 점, 멸치 한 마리라도 국물에 들어가면 귀신같이 알고 뱉어내신다. 아마 내가 어머니로부터 예민한 미각을 물려받은 것이겠지만, 그 유난한 편향이 시간상 거꾸로 진행된 탓에 마치 어머니가 나의 어릴 때 미각을 물려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요즘도 어머니는 종종 내가 편식하던 시절에 저질렀던 부끄러운 짓 들을 하나하나 들추어내며 기쁨에 젖곤 하시는데, 그 말씀들 속에는 그토록 까다로웠던 딸의 귀족적인 입맛이 짐승의 수준으로 타락한 데 대한 은근한 비난이 숨어 있는 듯도 하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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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조금 더 어둠 쪽으로 옮겨 앉는다. 숲은 어둠의 입안으로 삼켜져 버렸다. 바람의 자락에 눅눅한 비 냄새가 실려 온다. 남자의 프로필이 유리창에 떠올랐다. 정면에 선 보이지 않는 강인함이 턱과 광대뼈의 선을 따라 드러나 있다. - P20

유선은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뜬다. 결정적인 순간을 놓쳐 버린 흐리멍덩한 자신에게 짜증이 난다. 삶은 이렇게 차갑고 날카롭게, 파도처럼 끊임없이 맨살에 부딪쳐 올 모양이다. - P21

퇴근 시간의 거리는 놀랍도록 생기가 넘쳤다. 희미한 가 을의 기색쯤은 무시해 버리겠다는 듯 커다란 꽃무늬의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다. 흘러 내릴 듯 통이 넓은 청바지를 입은 소년들이 도서관의 경사진 언덕을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내려오면서 기름진 비명을 질러 댔다. 그중의 하나와 거의 부딪칠 뻔했던 오토바이 탄 청년이 욕설을 노래처럼 뱉으며 달아나는 소년을 노 려보았다. 건너편의 유리로 된 건물 벽에 밤의 풍경이 심해 처럼 일렁이며 매달려 있다. 낯선 활기는 유선을 벨 것처럼 사방에서 도도하게 밀려온다. 유선은 왜 바깥으로 달려 나왔는지도 잊고 홀린 듯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살아 있는 사람의 생기가 이토록 아름다운 것이었던가. 유선은 건물 모퉁이에 가까스로 서 있는 자신이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 온 것처럼 어색하고 부끄럽다. 걸어간다면 자신의 관절에서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다. 자신과 세상 사이에 투명하고 두꺼운 유리, 자신은 통로를 찾을 수 없는 유리 칸막이가 놓인 것 같다. - P22

아직은, 지금은 아니야. 당신이 없어서 힘들다고 말하고 싶진 않아. 아직은 당신이 그립지 않아. 아직은 당신, 밉기만 해. 당신 알아? 그리움보다 강한 미움 말이야. 슬픔보다 더한 미움. 그런 게 있어. 사람들은 날 괴롭히는 게 그리움과 슬픔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지금은, 미움과 부끄러움이야. 왠지는 몰라. 그런데 당신은 밉고 난 부끄러워. 왜 밉고 부끄러운지는 내가 되어 봐야 알 거야. 그렇게 갑자기 떠나면서,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서 그 소식을 들어야만 했어. 내가 뭘 잘못했기에? - P23

무언가 잘못됐어. 이건 아니야. 뭔가가. 전화를 하면서도 제 목소리의 의미를 확신하지 못하는 유선을 유선이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올 때까지 유선은 주차장에 나와 서 있었다. 그때 유선은 세상에 혼자 서 있었다. 여린 가로등 불빛 뒤로 겹겹의 어둠이 등등했다. 서늘한 바람을 쐬자 잠에서 깨듯 그제야 눈물이 나왔다. 눈물을 흘리는 유선을 유선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상향등을 켠 앰뷸런스 한 대가 달려 들어왔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남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침대에 실려 나오는 사람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말 없는 수선스러움 속에 그들이 유리문 안 으로 사라지자 주차장은 다시 어둠과 고요함으로 채워졌다. 유선은 아주 잠깐 주현의 죽음을 잊고 있던 자신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 놀라는 유선을 유선이 뚫어지게 바라 보고 있었다. 시동생 재현의 차가 주차장에 들어설 땐 짧은 여름밤이 병원 뒤편의 엉성한 숲 언저리로 슬금 밀려가 고 있을 때였다. - P26

유선은 스스로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안테나가 무딘 편은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그렇다면, M은 누구일까. 유선 은 고개를 젓는다. 그러고 보니 이 글들은 단순한 일기가 아니다. 발췌해서 적어 놓은 글들까지 모두 하나의 뚜렷한 초점을 향하고 있다. 그건 M이라는 여자다. 성별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눈으로 본 것보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글을 읽다가, 혹은 떠오르는 생각들 중 M과 연 결되는 모든 것들을 여기 기록해 놓은 것이다. 아니면 이것을 기록하던 날들 동안 주현은 M이라는 인물에 대한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어떤 사물도 어떤 단어도 그와 연결되어 버리는 지독한 강박증. 그것도 기꺼이. 일생 에 한 번 꿀까 말까 한 깨어나기 싫은 꿈과도 같이. 그는 그 강박을 마지막 순간까지 즐기고 있었을 것이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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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이랑 대화하다
보니 책방에 연기가 자욱하다.
- 책방지기 : (놀란 눈으로) 뭐지? 어디 불 붙었나. 여기 왜 이렇게 연기가 자욱하죠?
- 손님 : (내 뒤를 가리키며) 향 피워 놓으셨는데요.
- 책방지기 : (뒤돌아 인센스 스틱을 바라보며) 아~ 나 향 피웠지. - P105

하악이와 함께 살아서 좋냐는 질문을 받는데, 반려동물과 함께 산다고 해서 바로 행복해진다거나 힐링이 된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되려 내가 밥을 주지 않으면 굶고 있을 생명이 있다는 부담감에 어깨가 무겁다. 아픈 고양이라서 치료비도 만만치 않다. 내 옷에 발자국과 침 자국을 남겨서 매일 빨래하느라 바쁘고 지금도 내 무릎 위에서 하악이가 잠들어서 피곤한데도 퇴근을 못 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 하악이 덕분에 무릎 담요가 필요가 없네, 우리 이쁜 하악이 덕에 담요값 굳었네 하며 애써 위안 중. - P113

- 책방지기 : 책방에 ‘책을 보는 곳입니다. 사진 촬영은 자제해 주세요. 내지 촬영은 안 돼요. 시끄러운 대화도 조금만 자제 부탁드립니다.‘ 라고 안내문 붙여놨어.
- 친구 : 그랬더니 사진 좀 덜 찍나?
- 책방지기 : 그 안내문을 찍어. - P120

- 친구 : 봄 날씨가 좋으니까 기분까지 좋 지 않냐?
- 책방지기: 응, 좋아 주말에 매출이 올랐 거든.
- 친구 : 너의 봄은 감상적으로 좋다 나쁘다가 아니야?
- 책방지기 : 응. 매출이 행복의 척도지.
예전엔 날씨가 좋으면 책방 문 닫고 외출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장사 될 때는 책방 붙박이가 되어 열심히 책을 판다. - P124

변명

- 책방지기 : 책방에서는 희한하게 책을 읽을 수가 없어요. 한 장도 안 읽혀.
- 술집 주인 : 난 우리 술집에서 마시는 술이 제일 맛없더라. 그래서 지금도 미숫가루 마시잖아.
- 책방지기 : 라테인 줄. 그래, 책방에서는 뭘 할 수가 없다고! 아무것도! - P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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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장례를 치른 지 겨우 두 달이 지난 여자에게 퇴근 무렵에 걸려오는 낯선 남자의 전화는 상중의 여자가 거리에 입고 나선 빨간 외투처럼 불순해 보인다. 유선은 그 남자의 전화에 매번, 다음에요 하면서 미루다가 오늘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그 빨간 외투를 얼른 벗어 버리고 싶었다. 실제로도 유선에게 빨간색 겉옷을 입는 취미는 없었다. - P11

밀 때마다 지나치게 무겁다는 생각이 드는 큰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 언덕 아래까지 길을 따라 펼쳐진 숲이 머리 위로 쏟아질 듯 가까이 출렁거린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시간이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가파르게 경사진 이 언덕길을 내려가는 시간을 유선은 좋아했다. 구에서 세운 이 도서관은 야트막한 산기슭의 숲 언저리에 있는 데다 도로에서 걸어서 5분쯤의 거리에 있어 교외에 세워진 요양소처럼 늘 한가하고 조용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분다. 어둑해진 숲속에서, 갈퀴가 여럿 나 있는 크고 기다란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유선의 숱 많은 머리를 미친 여자의 그것처럼 휘저어 놓곤 사라진다. 유선은 걸음을 멈추고 숲속의 어둠을 잠시 들여다본다.
그의 손길을 닮았어. 가끔 장난스럽게 긴 머리를 마구 휘저어 놓곤 하던 그의 손. 아니다, 그의 손은 훨씬 따스했지. 그리고 늘 손가락으로 다시 빗질을 해 주었는데······. 성급한 아카시아 이파리 몇 개는 벌써 노랗게 변해 바람이 불 때면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 보니 달아나는 여름의 긴 꼬리가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환각처럼 보이는 듯도 해. 유선은 제 손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고는 종종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 P137

유선은 걸음을 떼는 게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도 되는 듯 자신에게 일렀다. 그랬다. 그가 떠난 후 처음 외출 했을 때, 익숙하던 도시는 다른 얼굴로 유선을 맞았다. 낯선 도시에 유효 기간이 지난 낡은 지도를 들고 버스에서 내린 것처럼 막막했다. 텅 빈 극장에서 우울한 영화를 보고 나온 한낮의 거리와도 같은 비현실감이 아직까지는 유선을 놓아주지 않았다. - P14

차현구, 가 남자의 이름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유선은 남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눈썹 사이로 피곤이 몰려 있는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유선은 눈을 깜박거렸다. 쳐다보는 사람의 눈까지 씀벅거리게 할 만큼 그의 눈은 지나치게 붉었다. - P15

머릿속에 어릴 때 시골 외가에서 보았던, 갈라 놓은 암탉의 배 속이 갑자기 떠올랐다. 한 점 그늘도 없던 우물가. 목이 잘린 채 깨끗하게 씻긴 배를 열고 있던 닭. 크고 작은 노른자들이 조랑조랑 엉겨 있던 배 속. 어린 나이에도 너무 잔혹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맵고 달콤하게 끓인 닭국 냄비 속에 서 외할머니는 유선의 그릇에 특별히 크기도 다양하던 그 노른자 덩어리를 담아 주었는데 유선은 그걸 삼킬 수가 없었다. 기어이 안 먹고 있으면 외할머니는 유선의 가는 손목을 쥐며, 쯔쯔…… 이렇게 입이 짧으니, 혀를 차곤 했었다. 그의 머릿속에 미성숙한 난황처럼 엉겨 있던 생각들을, 단단함도 껍데기도 만들어지지 않은 그것들을 꺼내 놓자고? 그의 배를 쪼개서? - P16

그가 앉은 쪽의 뒤편 벽에 커다란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클림트의 프린트였다. 황금빛 광채 속에서 목이 부러지도록 격렬하게 포옹하고 있는 두 남녀. 한없이 뜨거운 사랑의 느낌을 어쩌면 저토록 황홀한 색채로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일까. 황금조차 녹아 흐르게 만들어 버리는 그 열정의 온도를, 아버지가 금 세공사였다는 클림트는 고온에 녹아 흐물거리는 액체 상태의 황금을 보며 자란 게 틀림없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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