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장례를 치른 지 겨우 두 달이 지난 여자에게 퇴근 무렵에 걸려오는 낯선 남자의 전화는 상중의 여자가 거리에 입고 나선 빨간 외투처럼 불순해 보인다. 유선은 그 남자의 전화에 매번, 다음에요 하면서 미루다가 오늘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다. 그 빨간 외투를 얼른 벗어 버리고 싶었다. 실제로도 유선에게 빨간색 겉옷을 입는 취미는 없었다. - P11

밀 때마다 지나치게 무겁다는 생각이 드는 큰 유리문을 밀고 나오자 언덕 아래까지 길을 따라 펼쳐진 숲이 머리 위로 쏟아질 듯 가까이 출렁거린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는 시간이다. 하루의 일을 끝내고 가파르게 경사진 이 언덕길을 내려가는 시간을 유선은 좋아했다. 구에서 세운 이 도서관은 야트막한 산기슭의 숲 언저리에 있는 데다 도로에서 걸어서 5분쯤의 거리에 있어 교외에 세워진 요양소처럼 늘 한가하고 조용했다.
등 뒤에서 바람이 분다. 어둑해진 숲속에서, 갈퀴가 여럿 나 있는 크고 기다란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유선의 숱 많은 머리를 미친 여자의 그것처럼 휘저어 놓곤 사라진다. 유선은 걸음을 멈추고 숲속의 어둠을 잠시 들여다본다.
그의 손길을 닮았어. 가끔 장난스럽게 긴 머리를 마구 휘저어 놓곤 하던 그의 손. 아니다, 그의 손은 훨씬 따스했지. 그리고 늘 손가락으로 다시 빗질을 해 주었는데······. 성급한 아카시아 이파리 몇 개는 벌써 노랗게 변해 바람이 불 때면 팔랑거리며 떨어져 내렸다. 그러고 보니 달아나는 여름의 긴 꼬리가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환각처럼 보이는 듯도 해. 유선은 제 손으로 머리를 빗어 내리고는 종종걸음으로 언덕을 내려갔다. - P137

유선은 걸음을 떼는 게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도 되는 듯 자신에게 일렀다. 그랬다. 그가 떠난 후 처음 외출 했을 때, 익숙하던 도시는 다른 얼굴로 유선을 맞았다. 낯선 도시에 유효 기간이 지난 낡은 지도를 들고 버스에서 내린 것처럼 막막했다. 텅 빈 극장에서 우울한 영화를 보고 나온 한낮의 거리와도 같은 비현실감이 아직까지는 유선을 놓아주지 않았다. - P14

차현구, 가 남자의 이름이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신 유선은 남자의 눈을 쳐다보았다. 눈썹 사이로 피곤이 몰려 있는 그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유선은 눈을 깜박거렸다. 쳐다보는 사람의 눈까지 씀벅거리게 할 만큼 그의 눈은 지나치게 붉었다. - P15

머릿속에 어릴 때 시골 외가에서 보았던, 갈라 놓은 암탉의 배 속이 갑자기 떠올랐다. 한 점 그늘도 없던 우물가. 목이 잘린 채 깨끗하게 씻긴 배를 열고 있던 닭. 크고 작은 노른자들이 조랑조랑 엉겨 있던 배 속. 어린 나이에도 너무 잔혹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고춧가루를 듬뿍 넣어 맵고 달콤하게 끓인 닭국 냄비 속에 서 외할머니는 유선의 그릇에 특별히 크기도 다양하던 그 노른자 덩어리를 담아 주었는데 유선은 그걸 삼킬 수가 없었다. 기어이 안 먹고 있으면 외할머니는 유선의 가는 손목을 쥐며, 쯔쯔…… 이렇게 입이 짧으니, 혀를 차곤 했었다. 그의 머릿속에 미성숙한 난황처럼 엉겨 있던 생각들을, 단단함도 껍데기도 만들어지지 않은 그것들을 꺼내 놓자고? 그의 배를 쪼개서? - P16

그가 앉은 쪽의 뒤편 벽에 커다란 액자가 하나 걸려 있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클림트의 프린트였다. 황금빛 광채 속에서 목이 부러지도록 격렬하게 포옹하고 있는 두 남녀. 한없이 뜨거운 사랑의 느낌을 어쩌면 저토록 황홀한 색채로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일까. 황금조차 녹아 흐르게 만들어 버리는 그 열정의 온도를, 아버지가 금 세공사였다는 클림트는 고온에 녹아 흐물거리는 액체 상태의 황금을 보며 자란 게 틀림없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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