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 근심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그 감정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혼란스럽게 남아 있었다. 로즈 씨는 절대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나 그러듯, 그도 희생의 불가피성을 일깨우고, 그것의 고귀함을 찬양했다. 시민들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여겼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무만 떠넘기고, 자신은 권리만 취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태도였으며, 거의 본능이었다. 그가 보고 듣고 읽는 모든 것은 무의식 중에 결국 그 자신과 연관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해를 통해 세상을 보았다. 자신의 이해가 세상의 운명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 운명은 그에게도 아주 중요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보신을 합리화했다. 유럽의 운명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렇게 마음의 평화 를 버림으로써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았다고 손쉽게 확신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로즈씨는 이제 젊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게다가 각종 세금으로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 P96

로즈 씨는 노르망디에 가서도 마음의 평온을 되찾지 못했다. 우스꽝스럽다는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서 어떤 위험이 그를 노리겠는가? 게다가 그가 느끼는 것은 불안이 아니라 슬픔 같은 것이 었다. 그는 자신이 늙었다고, 나이보다 훨씬 늙었다고 느꼈다. 이곳에는 이제 그의 자리가 없었다. 그는 일종의 생존자, 옛 시대의 습관, 취향, 요구들과 더불어 서서히 사라지고 있는 하나의 종이었다. 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그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했다. 아마도 젊음? 하지만 그는 이제 젊지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젊었던 적이 없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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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뜬금없는 말보다는 깡똥한 환자복 아래 드러난 앙상한 맨발이 오히려 짠하다. 그 맨발을 보는 순간 그의 가슴에서 팔로 이어 지던 흉터가 떠올랐다. 꾹 감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잘못을 저질러놓고는 지레 눈을 감아버리는 아이처럼. 섭생을 게을리한 중년처럼 얼굴은 푸석한데 입술은 소년의 그것처럼 여릿하다. 현실 의 국경과 생의 국경을 연속장애물처럼 겁도 없이 훌쩍훌쩍 뛰어 넘게 한 동력은 오히려 이 유난한 연약함인지도 모르지. - P81

탈북이라는 단어는 그를 단숨에 파악하게 해주는 동시에, 그 단어 뒤에 가려진 것들은 모조리 지워버리기도 하는 것이어서, 이후로도 K를 볼 때마다 그를 보는 두개의 시선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엇갈리는 혼란을 겪어야 했다. - P97

전화기 너머에서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어깨에서 팔의 안쪽으로 이어지던 흉터의 모양새가 또렷이 떠올랐다. 무엇보다도 그 불성실하기 짝이 없던 인터뷰이를 한번은 더 만나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있었다. 진화생물학자가 자신이 인식표를 부착해놓은 야생동물을 일정기간 후 추적하여 그동안의 변화를 관 찰하는 심정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극단의 자본주의의 전시장인 이 도시에서 그사이 얼마나 적응했을까 하는 궁금함 같은 것. 기왕 새긴 흉터라면, 필요할 때마다 그걸 비표처럼 드러내어 자신이 찾아온 이 멋진 신세계를 우아하게 유영할 수 있는 오리발로 사용할 만 큼은 진화했을까. 가벼운 거짓말쯤은 스스로도 믿어버리며 뱉을 줄 아는, 자신을 포장하는 기술이 내용물의 진정성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가는 그의 변모를 확인하게 된다면, 나는 실망보다 안도를 느낄 것 같았다. - P97

누나,라고 불린 순간부터일까. 나는 K의 관계의 가난에 마음이 쓰였다. 그의 옆으로 목욕바구니를 든 여자가 겨우 따박따박 걷는 딸의 손을 잡고 지나갔다. 점퍼 차림의 중년 남자 하나도 그의 곁을 지나친다. 그건, 서로 다른 영화의 영상을 겹쳐놓은 것 같았다. 차 꽁무니를 바라보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그들과는 다른 시공간에 머물고 있었다. 차가 길 끝에 이를 때까지 그는 백미러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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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만두는 생김새부터가 유머러스하거든요. 얄팍하고 쫄깃하게 잘 주무른 만두 꺼풀을 동그랗게 밀어서 참기름 냄새가 몰칵 나는 맛난 만두소를 볼록하도록 넣어서 반달 모양으로 아무린 것을 다시 양끝을 뒤로 당겨 맞붙이면 꼭 배불뚝이가 뒷짐 진 형상이 돼요.

어머니의 첫 소설 『나목』 속에 나오는 구절이 다. 소설 속의 태수가 맛도 없는 것을 하도 맛나게 먹길래 개성 음식 이야기를 자랑처럼 늘어놓는 장면이다. 음식 이야기가 리드미컬하고 생생하다. 그러나 실제 주인공의 상황은 삶의 생기를 잃은 어머니가 겨우 내놓은 시큼한 김칫국에 질려 그 "울적함이 쉽사리 달래지지 않은 채 목구멍 근처에 묵직하게 걸려 있"는 상태이다. - P47

엄마는 겨울이 되면 석유 난로 위에다 동그란 알루미늄 찬합을 올려 카스텔라를 구워주셨다. 오븐이 없었지만 엄마는 한쪽이 익을 때쯤 뒤집어서 오븐에 구운 것 같은 효과를 냈다. 당시 공부를 열심히 하면 엄마의 카스텔라를 떳떳하게 먹을 수 있었다. 베이킹파우더도 구하기 어려웠던 시절, 미지근한 물에 녹인 이스트를 넣은 밀가루 반죽을 따뜻한 이불 속에 파묻어두었다가 부푼 반죽으로 카스텔라를 굽던 엄마의 손길을 잊지 못한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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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때였나. 집 앞으로 조금만 걸어나가면 지천으로 들을 수 있는 파도 소리를 녹음하고 싶어 녹음기를 샀었지. 일년 넘게 용돈을 모았는데. 불을 끈 방 창가에 서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검푸른 밤바다 위에 혼령처럼 떠 있는 집어등 불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모든 것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고 몸이 둥실 떠오르기라도 할 듯 벅찬 기쁨이 몸을 가득 채웠지. 싸구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조잡한 파도 소리에도 차가운 물보라와 발바닥 아래로 썰물이 질 때의 어지럼증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는데. 여기 돌아와 근무한 지 일년. 부러 바닷가에 나간 적도, 파도 소리를 듣고 싶어한 적도 없었다. 이 사람들과 어울려 바닷가 횟집에서 술을 마실 때도 바다는 늘 같은 자리에서 파도 소리를 배음으로 들려주었겠지만 강의 귀는 이제 그 주파수를 잡지 못했다. 이곳에서의 날들은 처음엔 휴가 같았으나 언제부턴가 이곳을 떠나면 빈 괄호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파도 소리도 괄호 속에 남아 더이상 자신을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그 예감은 아프지도 허전하지도 않다. 상 위에서 눈을 번히 뜨고 아가미를 벌떡거리며 칼질된 제 살점을 허리에 업고 있는 생선을 한점 연민없이 내려다볼 수 있게 된 것처럼. - P67

옳지 않은 판결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은 지속되지 않았다. 켜켜이 쌓이는 공소장 안에서 인생들은 납작해지고 핏물 빠진 육포가 되어 있었다. 그 살점이 얼마나 따스했는지, 아팠는지, 괴로웠을지 마지막으로 헤아려본 게 언제였더라. - P73

한때는 법전처럼 명징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 페이지마다 세상을 정화하는 시의 세계가 펼쳐졌는데. 인간이라는 기이한 생물을 가두기엔 법이라는 망의 구멍은 너무 성글고 단순했다. 가령 형법 제246조의 그물은 어떠한가. 상습으로 도박을 한 자는 삼년 이하의 징역, 또는 이천만원 이하의 벌금. 누군가는 그 그물을 스스로 들추고 들어간다. 어떤 판결을 내리든 완전한 판결은 없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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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머니는, 결혼할 생각은 안 해봤어요?" 질베르트가 묻는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어." 마들렌이 부드럽게 대답한다.
질베르트가 입을 다문다. 그러고는 따스한 눈길로 가게 를 둘러본다. 빈 마룻바닥과 계산대, 보잘것없고 허름한 상품들로 가득한 상자들이 나름대로 잘 분류되어 놓여 있는 서글픈 선반들을 바라본다. 고양이와 함께 난롯가에서 보내는 외로운 나날들. 아마 늘 똑같은 꿈이 되풀이되는 불면의 밤들도 있을 것이다. 영광이나 사랑, 그리고 피의 추억이. 얼굴이 상한 그 자그마한 여자는 한때 영웅이었다. 질베르트는 지난 전쟁 동안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을 여러 차례 들었다. 아마 이번 전쟁이 치러지는 동안에도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다. 마들렌 아주머니를 가엾게 여겨야 할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고 질베르트는 생각한다. 그녀는 보통 사람들이 평생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단 나흘만에 전부 써버린 것이다. - P84

그는 그 근심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다. 그 감정은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혼란스럽게 남아 있었다. 로즈 씨는 절대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나 그러듯, 그도 희생의 불가피성을 일깨우고, 그것의 고귀함을 찬양했다. 시민들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열변을 토하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여겼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무만 떠넘기고, 자신은 권리만 취했다. 그것이 그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태도였으며, 거의 본능이었다. 그가 보고 듣고 읽는 모든 것은 무의식 중에 결국 그 자신과 연관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해를 통해 세상을 보았다. 자신의 이해가 세상의 운명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 운명은 그에게도 아주 중요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보신을 합리화했다. 유럽의 운명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그렇게 마음의 평화를 버림으로써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놓았다고 손쉽게 확신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로즈 씨는 이제 젊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게다가 각종 세금으로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그만하면 충분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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