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때였나. 집 앞으로 조금만 걸어나가면 지천으로 들을 수 있는 파도 소리를 녹음하고 싶어 녹음기를 샀었지. 일년 넘게 용돈을 모았는데. 불을 끈 방 창가에 서서 거기서 흘러나오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검푸른 밤바다 위에 혼령처럼 떠 있는 집어등 불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모든 것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고 몸이 둥실 떠오르기라도 할 듯 벅찬 기쁨이 몸을 가득 채웠지. 싸구려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조잡한 파도 소리에도 차가운 물보라와 발바닥 아래로 썰물이 질 때의 어지럼증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는데. 여기 돌아와 근무한 지 일년. 부러 바닷가에 나간 적도, 파도 소리를 듣고 싶어한 적도 없었다. 이 사람들과 어울려 바닷가 횟집에서 술을 마실 때도 바다는 늘 같은 자리에서 파도 소리를 배음으로 들려주었겠지만 강의 귀는 이제 그 주파수를 잡지 못했다. 이곳에서의 날들은 처음엔 휴가 같았으나 언제부턴가 이곳을 떠나면 빈 괄호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파도 소리도 괄호 속에 남아 더이상 자신을 따라오지 않을 것이다. 그 예감은 아프지도 허전하지도 않다. 상 위에서 눈을 번히 뜨고 아가미를 벌떡거리며 칼질된 제 살점을 허리에 업고 있는 생선을 한점 연민없이 내려다볼 수 있게 된 것처럼. - P67

옳지 않은 판결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자책은 지속되지 않았다. 켜켜이 쌓이는 공소장 안에서 인생들은 납작해지고 핏물 빠진 육포가 되어 있었다. 그 살점이 얼마나 따스했는지, 아팠는지, 괴로웠을지 마지막으로 헤아려본 게 언제였더라. - P73

한때는 법전처럼 명징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 페이지마다 세상을 정화하는 시의 세계가 펼쳐졌는데. 인간이라는 기이한 생물을 가두기엔 법이라는 망의 구멍은 너무 성글고 단순했다. 가령 형법 제246조의 그물은 어떠한가. 상습으로 도박을 한 자는 삼년 이하의 징역, 또는 이천만원 이하의 벌금. 누군가는 그 그물을 스스로 들추고 들어간다. 어떤 판결을 내리든 완전한 판결은 없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 P7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