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는 진실을 말하는 외로운 유령이었다. 어쨌거나 완곡하게 진실을 말하는 한, 그 발언은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후대의 인간에게 남겨 줄 유산은 말을 들려주는 것보다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리라. - P43
누구를 위해 이 일기를 쓰는가? 그는 별안간 의아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위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세를 위해? 그는 잠시 일기장에 적힌 날짜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문득 ‘이중사고(doublethink)‘라는 신어가 그의 뇌리에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엄청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절실히 깨달았다. 어떻게 미래와 소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일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미래가 현재와 비슷하다면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다르다면 이 수난의 기록은 무의미한 것이 되리라. - P17
윈스턴은 과연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일기를 쓰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위해서? 아니면 가상의 시대를 위해선가? 그의 앞에는 죽음이 아니라 무(無)가 있을 뿐이다. 일기는 재로 변할것이고, 그 자신은 어디론가 증발되어 버릴 것이다. 사상경찰만이 그의 일기장을 없애기 전에 한번 읽어 볼 것이다. 자신의 흔적도 사라지고 종이에 끼적거린 익명의 글마저 실물로 존재할 수 없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미래에 호소할 수 있단말인가? - P43
어떤 사람이 매일매일 실수한다는 건 매일매일 세상을 배워 간다는 말과도 같죠. 스스로의 사건들로 꿋꿋이 새로워진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 P185
ADHD 비극의 본질은 과한 착장을 요구하는 사회와 맨몸으로 맞닥뜨린 것일 뿐이라고, 나는 미친 게 아니라 지친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어쩌면 우리에게 부족한 건 지능이나 기능보다 위로일지 모르겠어요. 세련된 위로는 내가 계속 나여도 된다는확신을 주잖아요. 세상을 노려보느라 건조해진 눈알에 물기를 핑 돌게 하고요. - P186
나는 이때부터 가망없어진 관계를 회피했다. ‘나를 떠나간 사람의 범주에는 내가 선수 쳐 끊어 버린 인연이 더 많다. 이미 이상함을 감지한 사람에겐 내 의견을 피력할 의지나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구구절절 털어놓은 초라한 진심조차 ‘이상함‘의 증거로만 수렴된다면, 내가 그 실망과 낙담을 견딜 수나 있을지 무서웠다. - P208
그러니까 자꾸 사랑 자체를 혐오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내게 혼자가 아닌 두려움을 가르치면서도, 다시 절대 혼자 있지 말라고 다그쳤다. 내 인생이 늘 명징한 만남과 흐지부지한 이별에 처하게 된 것도 모조리 사랑 또는 사랑이 준 두려움 탓이다. 그래도 혐오하는 걸 원한다는 것엔 쾌감이 있어서 나는 사랑을 인식할 때마다 기뻐졌다. 닫힌 입구는 결국 창문으로 통해서 진퇴양난 같은 우리일지언정 운명일까 오래 고대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도 고대하는 것마다 답을 얻지는 못했다. 그보다 보잘것없고 궁금증만 많은 나는 사랑의 본질도 내 사랑의 끝도 영영 모를 것이다. 그러니 사랑은 한마디로 내게, 대가가 따르는 코미디다. - P159
한번 당연한 것은 영원히 당연할까요?당연했던 현실을 개선하고 싶다 해도, 피해받는 입장이라면 보통 가해자와 권력 차이가 있기에 그 사회를 바꾸는 데엔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먼저 슬픔과 분노를 느껴야 하고,자신에게 입혀졌던 습관을 다듬어야하고,위험을 무릅쓰고 권력자에게 소리 내야 하지요.(이건 부당하다!)하지만 행동의 주도권을 내가 지니고 있다면,폭력을 줄여나가는 게 다소 쉽습니다.폭력을 멈추면 되는 거예요. - P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