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광호 씨에 대해 말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따금 사로잡히곤 한다. 이를테면 해질 녘의 버스 차창 안으로 불그스름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지친 사람들의 얼굴을 비출 때, 혹은 서늘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곤 다른 쪽으로 서서히 불어 갈 때 길을 걷다 어디 좋은 데라도 가는지 한껏 멋을 부린 사람과 스칠 때나, 다가오는 일행에게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람이 보일 때도 그렇다.
광호 씨는 딱히 옷을 잘 입는 사람도 아니었고 동작이 큰 사람도 아니었지만 나는 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광호씨를 떠올린다. - P87

나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던 광호 씨의 말을 자주 곱씹는다. 어쩌면 그 말은 나를 향한 충고나 조언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향한 기대와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바람을 안고서.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든 거기엔 아무런 차별이 없어서 특별한 용기도 자긍심도 필요 없는 세상. 우리가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끌림을 느끼든 그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어서 누군가의 인정도 응원도 필요 없는 세상. 그날의 광호 씨는 시간이 흐르면 그런 세상이 반드시 도래할 거라는 자신의 믿음에 내기를 걸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은 틀림없이 앞당겨질 거라는 신념을 내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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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동안 의문에 잠겼어요. 그 사람이 왜 그러는 건지, 왜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만난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새벽에 무슨 나쁜 꿈이라도 꾼 건지 제 팔을 꼭 끌어안은 채로 잠들어 있는 주호 씨를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이 사람은 윤범 씨를 만난게 아닐까. 그날 이 사람이 만난 건 언제라도 연락해 만날 수 있는 윤범 씨가 아니라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는 윤범 씨가 아닐까. 이 사람은 윤범 씨에 대한 마음을 처분하거나 무효화하지 않고 끝내 간직해 보려는 게 아닐까. - P73

나는 요즘도 보일러실 한쪽에 놓여 있는 그 그릴을 볼 때마다 우리를 떠올린다. 인주 씨와 내가 함께 주호를 기다렸던 그 해 질 녘의 베란다와 점점 줄어드는 와인을 앞에 두고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우리를 어떻게든 재현해 보려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하고야마는 내 소설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날에 대해 써 보려고 했다. 뭔가를 써야 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날이 다가와 나를 건드렸을 뿐 아니라, 그날에 대해 쓰지 못하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로부터 얼마만큼 멀어졌는지 나 자신에게조차 증명할 길이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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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수희 감독이 또 한 번 성소수자 얘기에 천착한다는 사실이 못내 불편했고, 정확히 그 부분에 시비를 걸고 싶었다. 내가 당사자성에 집착하는 게 내 몫의 자리를 빼앗긴 것만 같은 박탈감 때문이라는것도 알고, 그토록 바라 왔으면서도 정작 너도 나도 퀴어 퀴어 하는 꼴을 보니 배알이 꼴려서라는 것도 알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오르는 질문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째서 당신이 우리의 스피커가 되어야 하는가. 잘 알지도 못하고 잘 알 수도 없으면서 당신이 게이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다음에는 트렌스젠더인가. 다다음에는 퀘스처닝에 인터섹스, 무성애자이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만 하면, 선의와 정치적 신념을 담보하기만 하면 당신의 발언은 정당해지는가. 당신이 성소수자를 도구화해서 재생산한 편견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 - P19

글쎄, 무엇이 나를 침묵하게 한 건지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 안부현 씨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한편 같아 보이는 어떤 공고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래서 너는 어느 편이냐고 따져 묻는 듯한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이 사람들한테는 어차피 무슨 말을 하더라도 소용없으리라는 체념 때문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나는 안부현 씨가 내게 도움을 청한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도와주려 했기 때문에 고개를 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나를 진작 간파한게 아닐까 싶어서, 그 순간 내가 당연히 상처받았으리라 짐작하고는 기꺼이 내 편이 되어 주려 했던 게아닐까 싶어서. 나는 어떻게든 보이길 원하는 사람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숨어 버리는 사람이니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때 나는 없는 존재가 되기를 선택했고 그건 나에게도 어떤 상흔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견디듯 앉아 있다 결국 인사도 없이 강의실을 떠나 버린 안부현 씨의 뒷모습을 곱씹었고, 커리큘럼에 굳이 오스카 와일드를 끼워 넣거나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에 보란 듯이 색색의 인덱스를 붙여 놓는 짓 따위로 뭔가를 해냈다고 착각했던 나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 P29

그런데요. 살다 보니 알겠어요. 그때 내가 그렇게 결혼한 건, 가난 때문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냥 겁이 났던 거예요. 이러다 우리가 뭐라도 될까 봐, 나를 향한 순영이의 마음이 진실하다는 걸 아니까, 내가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원한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그런 건 잘못됐고 비참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도망친 거예요. 그 애는 마지막까지 용기를 냈는데…… 나는 참 바보 같죠? - P38

하지만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내가 줄담배에 통화까지 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어느덧 무대 위에 새로운 장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가르는 어떤 선 앞에서 발이 묶인 것처럼 멈춰 섰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새로운 인물을, 잿빛이 감도는 짧은 머리에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내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중년의 여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볼록한 이마를 자꾸 만지작거리는 손짓에서는 염려와 긴장이 역력했고,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무는 듯한 미소에서는 뭔가를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때 안부현 씨는 테이블에 앞이마를 맞댄 채 깜빡 잠들어 있었는데, 보기보다 많이 취한 모양인지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이 왔고, 그 사람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제는 도리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나는 정지된 화면처럼 오래도록 미동도 하지 않는두 사람을 눈에 담다가 만났으나 아직 만난 게 아닌 두 사람 때문에 괜히 마음 졸이다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불필요한 시선이 남아 있는 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결코 시작되지 않으리라는 어떤 확신 때문이었다. 앞으로의 시간은 오로지 두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했고, 고로 오늘 내게 주어진 유일한 지문은 퇴장이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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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작에서 그녀는 공항의 무빙워크를 타고 등장한다. 당당하게서 있다가 유유히 걷고, 황급히 뛰어온 끝에 활짝 웃는 그 롱테이크는 드라마와는 아무 상관도 없이 단지 그녀가 스튜어디스라는 정보만 전달하는 장면이지만 바로 그 (글자 그대로의)‘행보‘에 영화 전체의 리듬과 플롯이 다 들어 있다. 정말 재키는 당당하게 입국해서 유유히 문제를 해결해나가다가 곤란에빠지는 시늉만 좀 해주고는 끝으로 돈을 다 차지하고 빙긋 웃어버리는것이 아닌가. - P308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생명의 존엄성 따위가 인정받을 리 없다. 살아남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돈을 차지하려면 끝까지 살아남아야한다. 상대를 쏘면서 "삶이 무가치한 곳에선 때때로 죽음이 가치를 지닐 수 있지"라고 태연스레 말할 수 있는 곳, 여기에 도덕이 끼어들 틈이란 없다. 말로야 ‘선인The Good, 악당The Bad, 비열한The Ugly‘ 이지만 사실 이 인간들에 그런 구별은 무의미하다. 선한 자는 하나도 없는 대신 모두가 악하고 비열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정했던 제목도 그래서 ‘두 위대한 사기꾼Two Magnificent Rogues‘이었다지 않은가. 나머지 둘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블론디 역시 보물찾기 말고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다. 서로가 가진 정보를 털어놓기로 했을때 정작 거짓말을 하는 건 블론디 쪽이고, 투코의 총에서 탄환을 몰래 빼어놓는 자도 그다. 묘비명을 적어놓겠다던 돌멩이에 아무것도 안 씌어져 있음은 물론이다. 최후의 3각 결투 때, 엔젤 아이즈는 투코와블론디 둘을 상대해야 하지만 블론디는 안심하고 엔젤 아이즈만 쏘면 된다. 운이 나빠 자기가 죽는다고 해도 금화는 누구의 차지도 되지 않는다. 블론디는 가장 영리한 사나이. - P334

그 자리를 파고든 악령의 실체는 역설적으로 ‘무無‘ 이다. 테이프를 거꾸로 돌려 들은 악마의 음성은 "난 아무도 아니야"가 아니었던가. <엑소시스트>가 진정한 공포영화일 수 있는 건, 마음속의 공허 그 자체가 악마, 즉 공포라는 사실 때문이다. - P359

도입부에서 가이는 두 명의 응급환자를 동시에 받는다. 하나는 경관, 하나는 흉악범이다. 수술실 문제로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의사는 법집행자의 생명을 먼저 구한다는 결단을 내린다. 바로 그 행동 때문에 마이릭 박사는 가이가 근본적으로 자기와 생각을 같이한다고 믿어버린다. 인간에게 등급이 있다는 것, ‘더’ 중요한 생명이 존재한다는 믿음. 요컨대 가이는 마이릭을 비난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른다. 경관이 목에 입은 총상은 그래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게다가 가이에게는 의사 자격을 박탈당한 영국인 아버지가 있다. 말기 암 환자인 절친한 친구의 안락사를 도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주위의 눈총 때문에 미국에 와서 의사 노릇을 하는 것으로 짐작되는 아들은, 아버지의 그런 행동에 대해 어떤 도덕적 판단도 내릴 수 없다고 토로한다. - P366

여기서 롤러볼은 가장 효과적인 상징으로 기능한다. 중역의 말을 빌리면, ‘개인적 노력의 한계성을 대중에게 자각시키기 위해 창조된 가장 중요한 장치‘인 롤러볼의 선수가 지켜야할 최고의 가치는 ‘게임 그 자체보다 강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개인 능력이 무한하다는 사실의 확인은 기업 조직의 권능에 대한 대중의경시를 유발하고, 급기야는 대규모 저항에 연결될 수 있기 때문. 영웅적 개인은 그래서 불온하다.



그러나 조나단이 은퇴를 거부하므로 기업은 다른 방법을 강구한다. 뉴욕과의 결승전에는 아예 모든 규칙이 철폐된다. 어떤 반칙이든 허용되고, 선수 교체도 불가능, 시간 제한조차 없다.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일 건 뻔하지만 조나단은 끝내 이 ‘죽음의 경기‘에 출전한다. 양팀 멤버 전원이 부상으로 실려 나가는 처절하기 짝이 없는 혈투를 승리로 이끄는 조나단. 그를 죽이려고 의도했던 행사는 오히려 그가 진정한 영웅으로 등극하는 대관식으로 변한다. 마지막 남은 적을 살려주는 그의 행동은 폭력에의 중독을 극복한 자의 승리, 개인성을 말살하려는 집단에 대한 저항을 뜻한다. 더 이상 ‘안정은 자유’가 아니고, 역사는 ‘빈곤과 필요 사이의 전쟁 기록’이 아니다. - P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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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캅을 다시 만났을 때, 동료 경관은 "당신 이름이 뭐죠?"라고 묻고, 갱스터는 "넌 죽었더랬어!"라고 외친다. 두 문장을 결합하여, 그는 의심한다. ‘내가 죽었다면 죽기 전의 나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여기서 현재는 과거에 의해 규정된다. 마찬가지로 현재는 미래를 규정한다. 그리고 <로보캅〉의 미래는 악몽이다. 로보캅에게 머피로서의 과거 회상이 고통인 것처럼, 우리에게 테크노피아로서의 미래 예상 역시 고통이다. 신도시 델타 시티로 상징되는 ‘미래의 미래‘는 더한 고통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 P247

바로 이 지점에서 감독은 묻는다. 초자아에 의해 억압받는 이성애의 사랑과, 자유롭고 헌신적인 동성애의 사랑 중 과연 어느 쪽이 변태적인 것인가. - P282

할리우드 유일의 동양계 색스 심벌이었던 안나 메이 윙이 표지로 실린 잡지를 보면서 자신의 입장과 동일시하곤 했던 릴링은 서서히 진심의 게이로 변모해가고, 마지막 만남에서 남자로서 갈리마르에게 구애하지만 차갑게 거절당하고 만다. 이때 갈리마르는 철창 속으로 달아나 스스로를 감금한다. 자기의식 속에 엄존하는 양성성의 인정을 거부하고 편협한 이성애주의자의 울타리 안에 숨고 싶어 한 그는 자신이 여성이 아니라 여성의 이미지를 사랑했었음을 고백해야 한다.
<나비부인> 아리아의 대사인 "불명예스럽게 살기보단 명예롭게 죽음을 택한다"를 중얼거리며 자살하는 그를 보라. 이때의 여장은 그마저 게이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이 철저한 이성애주의자는 자신의 불명예를 스스로 조롱하는 것이다. 나비 부인이 아들의 손에 성조기를 쥐여주고 죽는 것처럼. 이 얼마나 깊은 골이냐! 영화는 릴링이 탄 비행기의 문짝이 우리의 눈앞에서 탕 하고 굳게 닫히는 데서 끝난다.
아무래도 크로넨버그가 보기에 우리와 타자 사이의 소통은 불가능한것 같다. 나비가 아닌 이상 고치를 벗고 변태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 P287

이에 비해 주윤발은 작은아파트에 살며 제니에게 각막이식 수술을 시켜줄 돈도 없다. 최고의 살인 청부업자는 이미 기업화된 폭력 조직의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다. 해상 범행 당시의 노인 변장은 그 낙후성의 인정이고, 공항에서의 일본인 사업가 변장은 자본주의 부적응성에의 자조인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는 최고의 강력계 형사도 마찬가지.
승진과 보신에 무관심한 이수현은 경찰이라는 조직과 사사건건 충돌만 일으킨다. "세상은 변해가는데 나만 낙오자가 되는 느낌이야"라는 주윤발의 고백은 그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된다. 주윤발이 범죄조직의 두목에게 살해당하듯, 이수현은 놈을 죽이고 동료 경관들이 일제히 총을 겨눈 가운데에서 오열한다. 둘은 또 우정을 생명보다 중시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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