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광호 씨에 대해 말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따금 사로잡히곤 한다. 이를테면 해질 녘의 버스 차창 안으로 불그스름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지친 사람들의 얼굴을 비출 때, 혹은 서늘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곤 다른 쪽으로 서서히 불어 갈 때 길을 걷다 어디 좋은 데라도 가는지 한껏 멋을 부린 사람과 스칠 때나, 다가오는 일행에게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람이 보일 때도 그렇다.
광호 씨는 딱히 옷을 잘 입는 사람도 아니었고 동작이 큰 사람도 아니었지만 나는 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광호씨를 떠올린다. - P87
나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던 광호 씨의 말을 자주 곱씹는다. 어쩌면 그 말은 나를 향한 충고나 조언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향한 기대와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바람을 안고서.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든 거기엔 아무런 차별이 없어서 특별한 용기도 자긍심도 필요 없는 세상. 우리가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끌림을 느끼든 그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어서 누군가의 인정도 응원도 필요 없는 세상. 그날의 광호 씨는 시간이 흐르면 그런 세상이 반드시 도래할 거라는 자신의 믿음에 내기를 걸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은 틀림없이 앞당겨질 거라는 신념을 내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 P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