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동안 의문에 잠겼어요. 그 사람이 왜 그러는 건지, 왜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만난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새벽에 무슨 나쁜 꿈이라도 꾼 건지 제 팔을 꼭 끌어안은 채로 잠들어 있는 주호 씨를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이 사람은 윤범 씨를 만난게 아닐까. 그날 이 사람이 만난 건 언제라도 연락해 만날 수 있는 윤범 씨가 아니라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는 윤범 씨가 아닐까. 이 사람은 윤범 씨에 대한 마음을 처분하거나 무효화하지 않고 끝내 간직해 보려는 게 아닐까. - P73
나는 요즘도 보일러실 한쪽에 놓여 있는 그 그릴을 볼 때마다 우리를 떠올린다. 인주 씨와 내가 함께 주호를 기다렸던 그 해 질 녘의 베란다와 점점 줄어드는 와인을 앞에 두고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우리를 어떻게든 재현해 보려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하고야마는 내 소설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날에 대해 써 보려고 했다. 뭔가를 써야 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날이 다가와 나를 건드렸을 뿐 아니라, 그날에 대해 쓰지 못하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로부터 얼마만큼 멀어졌는지 나 자신에게조차 증명할 길이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 P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