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윤수희 감독이 또 한 번 성소수자 얘기에 천착한다는 사실이 못내 불편했고, 정확히 그 부분에 시비를 걸고 싶었다. 내가 당사자성에 집착하는 게 내 몫의 자리를 빼앗긴 것만 같은 박탈감 때문이라는것도 알고, 그토록 바라 왔으면서도 정작 너도 나도 퀴어 퀴어 하는 꼴을 보니 배알이 꼴려서라는 것도 알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오르는 질문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째서 당신이 우리의 스피커가 되어야 하는가. 잘 알지도 못하고 잘 알 수도 없으면서 당신이 게이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다음에는 트렌스젠더인가. 다다음에는 퀘스처닝에 인터섹스, 무성애자이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만 하면, 선의와 정치적 신념을 담보하기만 하면 당신의 발언은 정당해지는가. 당신이 성소수자를 도구화해서 재생산한 편견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 - P19
글쎄, 무엇이 나를 침묵하게 한 건지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 안부현 씨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한편 같아 보이는 어떤 공고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래서 너는 어느 편이냐고 따져 묻는 듯한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이 사람들한테는 어차피 무슨 말을 하더라도 소용없으리라는 체념 때문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나는 안부현 씨가 내게 도움을 청한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도와주려 했기 때문에 고개를 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나를 진작 간파한게 아닐까 싶어서, 그 순간 내가 당연히 상처받았으리라 짐작하고는 기꺼이 내 편이 되어 주려 했던 게아닐까 싶어서. 나는 어떻게든 보이길 원하는 사람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숨어 버리는 사람이니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때 나는 없는 존재가 되기를 선택했고 그건 나에게도 어떤 상흔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견디듯 앉아 있다 결국 인사도 없이 강의실을 떠나 버린 안부현 씨의 뒷모습을 곱씹었고, 커리큘럼에 굳이 오스카 와일드를 끼워 넣거나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에 보란 듯이 색색의 인덱스를 붙여 놓는 짓 따위로 뭔가를 해냈다고 착각했던 나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 P29
그런데요. 살다 보니 알겠어요. 그때 내가 그렇게 결혼한 건, 가난 때문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냥 겁이 났던 거예요. 이러다 우리가 뭐라도 될까 봐, 나를 향한 순영이의 마음이 진실하다는 걸 아니까, 내가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원한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그런 건 잘못됐고 비참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도망친 거예요. 그 애는 마지막까지 용기를 냈는데…… 나는 참 바보 같죠? - P38
하지만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내가 줄담배에 통화까지 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어느덧 무대 위에 새로운 장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가르는 어떤 선 앞에서 발이 묶인 것처럼 멈춰 섰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새로운 인물을, 잿빛이 감도는 짧은 머리에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내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중년의 여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볼록한 이마를 자꾸 만지작거리는 손짓에서는 염려와 긴장이 역력했고,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무는 듯한 미소에서는 뭔가를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때 안부현 씨는 테이블에 앞이마를 맞댄 채 깜빡 잠들어 있었는데, 보기보다 많이 취한 모양인지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이 왔고, 그 사람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제는 도리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나는 정지된 화면처럼 오래도록 미동도 하지 않는두 사람을 눈에 담다가 만났으나 아직 만난 게 아닌 두 사람 때문에 괜히 마음 졸이다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불필요한 시선이 남아 있는 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결코 시작되지 않으리라는 어떤 확신 때문이었다. 앞으로의 시간은 오로지 두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했고, 고로 오늘 내게 주어진 유일한 지문은 퇴장이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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