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끈한다는 것은 인생에 어떤 일이 벌어지든 그것에 반발한다는 뜻이다.
"나는 이 상황을 원치 않아. 일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게 싫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아이나 배우자, 친구들의 삶의 방식에 반감을 갖는 것은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이유는 우리가 집착하는 우리의 이상적인 모습, 즉 우리의 에고가 흔들리는게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재치 있게, 창의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그냥 무시하고 발끈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런 반응이 나타나는 방식은 각자의 고유한 인생대본과 역할, 정서적 유산에 따라 다르다.
깨어있는 상태라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진짜로 자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을 바로 그 순간, 있는 그대로 대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때 현실은 우리가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 P99

감정을 가만히 지켜보는 법을 배우면 더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다. 모든 감정을 받아들인다는 건 단순히 체념해버리는 것과 전혀 다르다. 고통을 그저 고통으로 여길 뿐 더 보태거나 빼지 않는다. 물론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 당연하다. 그러나 고통을 부정하거나 발끈함으로써 더 키우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면, 고통은 어느 순간 지혜로 승화된다. 당신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포용할 수 있게 되면 당신의 지혜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지혜가 커지면 연민도 함께 늘어난다. - P103

‘지금껏 내가 주지 못한 것 중에 아이가 내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 P110

우리는 모두 예측할 수 없고, 때로 잔인해 보이기까지 하는 삶의 이치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희생자로 살지 말지는 어디까지나우리의 선택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내가 더 성장할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거부하고 있는 걸까? 내가 발전하려면 무엇을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혼란은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어떤 목적을 수행하는 것일까?‘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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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나‘라고 알고 있는 것이 전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니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의 정체성을 위협한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면서 우리와 인생을 함께하는 다른 누군가가 달라져야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헛된 희망을 품는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에고는 우리가 어떤 사고방식이나 신념체계에 집착할 때 어김없이 작동한다. 우리는 감정적으로 폭발하기 전까지는 대개 자신이 집착하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분노나 통제, 지배, 슬픔이나 불안, 심지어 행복 같은 긍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내가 옳다"는 인식이 팽배해진다면, 그건 우리가 에고에 빠졌다는 뜻이다. 이렇듯 "내가 옳다"는 경직된 사고로 움직이면 우리는 고정관념이나 이상, 판단을 근거로 현실을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어떤 상황이나 상대가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그 상황이나 상대를 지배하고 통제하려 든다. - P68

인생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을 때, 우리가 거부 반응을 보이면서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이유는 자신이 위협받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생은 이래야 한다"는 환상이 무너지면 우리의 에고가 상황을 통제하려는 욕구를 드러낸다. 사랑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인생 자체가 원래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모습으로 보이길 바라는 병적인 욕구를 모두에게 강요한다. 인생이 동화 같은 결말을 얻게 되리라는 환상에 매달리면 사랑하는 이들을 희생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놓치게 된다. - P74

부모가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괜찮다고 여기는 것이 괜찮다는 분위기를 풍기면, 부모 자신에게는 물론 아이에게도 좋은 일이다. 부모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아이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용기가 생기고, 스스로에게서 유머와 가벼움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지독한 에고의 엄격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 P76

분노는 우리가 여전히 강하고 통제력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강력한 자극제다. 역설적이지만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를 전혀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때 우리는 그저 에고의 포로일 뿐이다. - P85

부모는 어떤 자극을 받더라도 자신의 감정 상태를 아이에게 전이시켜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에고에 쉽게 휘둘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감정적으로 무너지기 쉽고 판단력이 흐려질 수 있다는 것도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는 오직 중립적인 상태일 때만 아이의 행동에 정당한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아이를 대할 때마다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아이는 처음에 마치 흡수하듯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한다. 그래서 우리는 미처 깨닫지 못하지만 우리가 아이에게 반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순간에 실은 아이가 흡수한 우리의 단면들에 반응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가 아이는 물론이고, 아이의 감정 그리고 아이가 겪는 문제까지도 지나치게 부모 자신과 동일시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감정과 아이의 감정을 분리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한 채 우리가 과거에 겪은 어떤 일과 동일시한다. - P87

아이들은 단지 우리가 어렸을 때 풀지 않은 채 묻어둔 감정적인 문제들을 일깨우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이들이 약하고 힘이 없다는 이유로 아이들 탓으로돌린다. 이때 ‘진짜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무의식‘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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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아이에게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해주고자 한다. 하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각자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할 권리, 자기만의 고유한 기질에 따라 삶을 살아갈 권리라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 P19

부모가 아이와 순수한 교감을 하고 싶다면 먼저 모든 우월감을 내려놓아야 한다. 에고에 충실한 이미지 뒤로 숨지 않는다면 아이를 당신과 똑같은 온전한 사람으로 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에서 이 단어들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우리가 ‘에고‘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진짜‘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각자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 ‘자아상‘에 더 가깝다는 인식이다. 다시 말하면 각자 자신의 모습이라 여기며 움켜쥐고 있지만, 본모습과는 거리가 먼 형상이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만들어진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품고 자란다. 그런데 자신에 대한 이미지는 우리가 어릴 때 주로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진다.


우리는 보통 스스로에 대해 좁고 제한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본모습, 즉 존재의 핵심이나 본질은 무한하다. 타인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죄책감 없이 완전한 자유 속에 존재한다. 이렇게 산다는 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상태에서야말로 진정한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들과 진실로 의미 있는 교감을 나눌 수있다.


진정성은 진정성을 부르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 P23

부모가 아이를 통제하려는 수직적 접근방식을 버리고 서로의 정신적 발전을 도모하는 순환적 관계를 시작하려고 용기를 낸다면 갈등과 힘겨루기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면 부모와 아이의 역학관계는 영혼이 담긴 교류로 충만한, 특별한 경험으로 바뀐다. 이것은 영혼의 동반자를 발견하는 기쁨을 아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깨어있는 부모가 되어 아이와의 일체감에 자신을 맡기면, 이전에는 순전히 물리적 영역이었던 양육이 성스러운 영역으로 올라서게 된다. - P31

아이가 부모에게 오는 이유는 부모로 하여금 마음속 상처를 깨닫고, 그 상처로 인한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용기를 끌어모으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아차림 없이 어떻게 끌려다녔는지 알게 되면 깨어있는 양육도 서서히 가능해진다. - P35

•나는 아이와의 관계를 통해 더 큰 정신적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가?

•아이가 내게 진실로 원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리고, 아이에게 걸맞은 부모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아이의 영혼이 요구하는 대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과연 나는 용기 있게 시류를 거슬러 겉모습보다 내면을 더 소중히 여기는 자세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가?

•나는 양육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더 높은 수준의 자기 발전의 기회로 여기는가?

•나는 아이와의 관계를 성스러운 관계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 P36

따라서 부모와 분리된 독립된 존재로 아이를 보는 것, 정말로 그렇게 보는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반대로 아이가 가야 할 길이 나타나도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부모로서 가장 큰 문제점이다. - P45

갓난아이든 10대 아이든, 아이들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부모를 기쁘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부모의 관심을 온전히 받기 위해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이들은 세상에 태어난 것만으로 사랑받을 권리를 얻었다고 느낄 자격이 있다.
내면에 이런 당당함을 품고 자라는 아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내적 교감이 각인되어 있어서 정서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이런 사람은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의 진심임을 일찌감치 배워, 어른으로 살아갈 때도 이것을 경혐의 지표로 삼는다. 이처럼 자신의 내면과 연결되어 있으면 외부의 인정을 갈구할 필요가 없고, 칭찬에 목말라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내면의 당당함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자랑스럽게 여긴다. - P51

부모가 아이의 고유한 여정이 펼쳐지는 순간을 존중할 수 있다면, 아이는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이를 통해 아이들은 건강한 방식으로 서로 의존하며 관계맺는 능력을 기르게 된다.


부모가 일단 아이의 기본 성향을 받아들이면 아이의 기질에 맞춰 양육방식을 정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어떤 유형의 부모라는 환상을 내려놓고 눈앞에 있는 바로 그 아이에게 필요한 부모로 진화해가는 것이다. - P57

우리가 아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우리 내면의 상처를 들추며, 여태 우리가 붙들고 있던 에고에 대한 집착을 위협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부모로서 언제까지나 아이를 자기 틀에 넣어 통제하고 지배하려 들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반대로 아이에게 휘둘리게 될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과거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모는 자기 아이 또한 결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부모가 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부모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맞물려있다. 부모는 딱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만큼만 아이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 P62

"나는 내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알고 있는가? 내 안에 아이에 대해 매일같이 새롭게 알아갈 공간을 만들 수 있는가?"
이를 위해서는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되도록 입을 다물어야 한다. 한눈팔지말고, 호기심과 즐거움이 가득한 상태로 아이에게 온전히 주파수를 맞춰야한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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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물속에는 못된 버릇이 있고, 흐린 물속에는 어리석음이 있다. - P374

그런데 웃음이 기쁨의 동의어일까? - P392

고대 건축가들은 옛 그리스의 극장 정면 박공(博棋)에, 청동으로 즐거워하는 얼굴 하나를 만들어 붙였다. 그리고 얼굴을 가리켜 코모디아라 했다. 그 청동 조각은 웃는 듯해 사람들을 웃겼지만, 또한 그 속에는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도 곁들여 있었다. 발광 상태로 귀결되는 모든 우스꽝스러운 모방과 지혜로 귀결되는 모든 빈정거림이 그 청동 얼굴에 혼융, 응축되어 있었다. 근심과 환멸과 혐오감과 슬픔이 그 흔들림없는 이마 위에서 합산되어, 명랑함이라는 음산한 총계를 제시하고 있었다. 입의 양쪽 귀퉁이가 위쪽으로 치켜 올라가 있었는데, 한 귀퉁이는 인간을 향한 것으로 조롱하기 위해 올린 것이고, 다른 귀퉁이는 신들을 향한 것으로 모독하기 위해서였다. -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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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생명 영역 밖의 어두운 접경지대를 가지고있다. 그리하여 잠든 사람들의 분해된 사유(思惟)는 그들 위에서 둥둥 떠다니는데, 그것은 살아 있으며 동시에 죽은 연무(煙霧)이며, 허공에서 역시 사유하고 있을지도 모를 개연성과 결합된다. 그로 인해 복잡한 뒤얽힘이 비롯된다. 꿈이라는 구름이 자신의 짙은 농도와 투명성을 오성이라는 별 위에 쌓아 놓는다. 그러면 명료한 시각을 환영이 대신하게 되고, 닫힌 눈꺼풀 위에서는, 무덤 속에서 파괴 작용 일어나듯, 실루엣들과 모습들이, 촉지할 수 없는 것 속에서, 풍화되기 시작한다. 그다음에는 신비한 존재들이 분산되어, 잠이라는 죽음의 변두리에서 우리의 생명과 혼합된다. 유충과 영혼의 그러한 교착(交錯)이 허공에서 이루어진다. 잠들지 않은 사람조차도, 음산한 생명으로 가득한 공간이 자신을 짓누르고 있음을 느낀다. 주위의 환영이, 짐작되는 그러한 실체가, 그를 거북하게 한다. 다른 이들의 잠에서 발산된 유령들 사이로 지나가는 깨어 있는 사람은, 곁으로 지나가는 형체들로부터 얼떨결에 물러서고, 보이지 않는 존재와의 적대적인 접촉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거나 느낀다고 믿으며, 매 순간 곧 사라져 버릴 형언할 수 없는 만남이, 갑작스럽고 모호하게 이루어진다고 느낀다. 꿈들의 야간 분산이 한창 이루어지는 곳 한가운데를 걸어가노라면, 숲 한가운데에 서 있는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 P226

예민함은 육감적인 데서 발원한다. 게걸스러움은 까다로움을 내세운다. 진저리치는 찡그림은 욕심에 어울린다. - P298

혼인의 포악성은, 영영 다시 움직일 수 없는 결정적인 처지를 만들어 내고, 개인의 의지를 몰수하며, 선택을 죽인다. 문법처럼 문장 구성법을 가지고 있으며, 영감을 철자법으로 대체하고, 사랑을 받아쓰기로 변질시킨다. 삶의 신비를 궤주(走)시키고, 주기적이며 숙명적인 기능에 투명성을 강제로 부과하고, 구름에서 슈미즈 입은 여인의 모습을 지워 버리고, 권리의 행사자나 수혜자 모두에게 한정된 권리만 주고, 저울을 한쪽으로만 잔뜩 기울여 굳건한 성(性)과 강력한 성 간의, 혹은 힘과 아름다움 간의 매력적인 균형을 무너뜨리고, 결국 여기에는 상전 하나 저기에는 하녀 하나를 만들어 낸다. 반면, 혼인의 굴레 밖에는 남자 노예 하나와 여왕 하나가 있다. 침대가 점잖은 물건으로 간주될 만큼 그것을 산문적으로 변질시키다니, 그보다 더 상스러운 일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이제 더 이상 잘못이 아니라니, 상당히 멍청한 말이다! - P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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