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얼굴. 해사하고 웃음기 띤 얼굴. 어쩌면 그 표정을 본 순간 영은은 그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몰랐다. 커피 쿠폰에 첫 도장을 꾹 찍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던 마음에 뭔가가 남았다. - P163
마음이 엇나가면 이렇게 굳게 되는구나. 영은은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살면서 뭔가를 어기거나 어깃장을 놔 본 기억은 거의 없었다. 대체로 착실한 모범생으로 살았다. 그렇게 살았는데 ....당신은 나에게 좀처럼 마음이 없는 게 서운하고, 이십대 후반인데 아직 변변한 직업도 갖지 못한 채 병만 얻은 자신에게 자신은 없고, 그래 이런 사람을 누가 좋아할 리 없지 하는 바닥의 바닥 같은 마음이 되어 털어놓고 말았다. 실은 꾹꾹 참으려고 했는데 동정 섞인 배려라도 받고 싶어져버린 것이다. 주문 한 맥주가 나오자마자 벌컥 들이켜는 영은을 보고 주현이 웃으며 천천히 드세요. 저 못 데려다드려요. 하고 말한 순간. - P166
그렇게 말하고 웃는 주현을 보자 정반대의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아픈 게 네가 아니라 나라서 다행이라는 마음과 아무런 나쁜 일 없이 말끔한 너를 괴롭히고 싶다는 마음. 좋아하나? 아니면 미워하나? 마음이 혼종이었다. 그러나 다행이라는 쪽이 근본적으로 더 컸다. 영은이 선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아픈 사람들을 잘 대하지 못하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쁘지만, 더 나빠지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가까웠다. 귀가 닫히자 마음들이 살아 움직였다. 그 궤도가 보였다. - P173
왜 먼저 마음을 열어 보여주지 않아? 내가 좋다면서 왜 내 쪽으로 더 넘어오지 않아? 그러나 지금 영은은 그렇게 물으면서도 처음으로 당당했다. 목적이 달라졌으니까. 이제 그 물음표들은 상대를 향해 이쪽으로 넘어오라고 거는 갈고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을 거둬들이는, 닫히는 쪽의 문고리에 가까웠다. 다른 사람의 세계에 구명을 크게 뚫는 일이, 그래서 내 쪽으로 넘치게 하는 일이 뭐가 그렇게 좋겠어. 거기엔 이미……내 고름 같은 것들이 꽉 차 있는데. - P174
누군가가 자신의 연약한 면을 고백해주는 일은 생각보다 기쁘고, 흥미롭고, 짜릿했다. 나는 이제 너에게 그런 사람이구나.….. 그건 황홀감에 가깝기도 했다. 기쁨에 찬 감정들은 순식간에 고조되고, 차례로 떨어졌다. 그런 말을 들어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우리 사이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나는 그 말을 잘 몰라요. 그 말 아래의 실체를. 심지어 정말로...... 잘 듣지를 못해요. 당신이 당신의 아픔을 말해도 나는 내 아픔에만 놀라요. 안 들려요? 라고 잘못 들었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던 느낌이 선명했다. - P177
우리는 서로 아플 때 해줄 수 있는 게 없네요.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뭘 줄 수 있는 사람은. - P180
자기 슬픔은 자기가 알아서 하고 갈게요. 수술대 위에 누워 영은은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나를 지켰어. 최선을 다해 그렇게 믿고 싶었고 그것이 최선이라고도 믿었다. 너라는 총체적인 세계보다 내 오른 귀의 편협한 청력의 세계가 중요해. 아픈 게 지나가고, 그 아픔의 무늬를 지닌 어떤 사람이 되었을 때 다른 아픔의 무늬를 알아보는 일에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아픔의 한복판에서 발을 구르는 채로 다른 사람 곁에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너무 가까이 가면 머리채를 잡혀 함께 가라앉을 것이고 너무 멀찍이 서서 그의 이름만 반복해 외치는 건 그에게나 나에게나 무력하다, 그렇게. 그러니까 우리, 나중에 만나요. 나중에 못 만날지도 모르지만 나중에 만나요. 영은은 처음으로 결정짓지 않는 관계를 결정지었다. - P181
고통은 절대적인 동시에 상대적이었다. - P187
몇 초가 흐른 뒤 누군가가 그 불안을 애인에게 말해본 적이 있나요? 하고 물었고 은주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불안을 설명하고,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그 모든 말들을 내가 듣잖아요. 그렇게 불안을 구체화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말하는 은주는 약해 보였다. - P189
안도하는 표정. 나는 늘 상대방의 얼굴에서 그런 표정을 찾으면 마음이 놓이곤 했다. 상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는 성취감은 내 안의 유능감을 고취시키고 상대방에 대한 호감도를 상승시켰다. 상대가 내 맘에 들든 맘에 들지 않든 그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상대의 마음에 드는 일. 그게 중요했다. - P190
머리 위의 조명이 깜빡거렸다. 아주 살짝 조도가 낮아졌던 순간 봤던 은주의 얼굴은 그전까지의 얼굴과 어딘가가 달라 보였다. 신비한 느낌을 주는 건 빛일까. 은주의 얼굴일까. 문득 이 시공간이 낯설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심으로 애인을 이해하려는 은주가 여기에 있다. 이 도시 어딘가에 있을 은주의 애인은 한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고, 누군가가 자기를 이토록 이해하려고 애쓰는 마음을 지녔다는 걸 까맣게 모르고, 오늘 낮까지는 두 사람의 존재 자체도 몰랐던 내가 그 모든 이야기를 안다. 그 어마어마한 시간이 빛이 깜빡이던 찰나에 응축된 것 같았다. 그 순간이 마법 같았다. - P198
내 앞에 이렇게 있는데 이게 다 껍데기인가. 아주 껍데기는 아니라고 해도 나는 여기엔 없는 오래전의 누군가와 영지의 마음을 나눠 쓰고 있고. 그게 싫으면서도 어쩔 수가 없고. 그렇게 산산이 조각난 마음에 목소리를 입혀 영지에게 들려줄 수는 또 없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이 오래된 무덤들의 도시에서 보내는 시간이 좋고 해서 그저 조금 울었어요. 영지가 힘들었지, 알아, 하고 제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줬어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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