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듯하게 살고 싶구나. 막 걸쳐서 몸에 설은 것이 솔지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점에서, 지향하지만 익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허세로 보였다.
그렇다면 나는? 솔지를 생각할 때마다 스스로를 돌아보았는데 그때마다 수언은 조금 당황했다. 나도 어쩐지 꼭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것 같은데 생각해보면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 잘 모르겠고 오로지 지키고 싶다는 태도만이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의 굴레에 빠질 때 그랬다. 자신을 돌아보면 그저 망하지 않는 것. 망하지 않음을 위해 전력을 다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 P99

은영이 상사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주변의 모두 가 만류했다. 어딜 가도 똑같아. 월급 많이 주는데 더러워도. 그냥 좀 참아, 욕하면서 다니는 재미도 있잖아. 앞에선 무시하고 뒤에서 욕하면서 다녀. 그 말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내 그 조언에 따르면서도 은영은 매번 가슴속이 기분 나쁘게 간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 조언에 대해서라면 할말이 많았다. 나는 무시할 수가 없어. 편한 대로 생각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가 않아. 그 사람은 살아서 움직이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자기 모양을 바꿀 때마다 내 마음의 모양도 바뀌어. 따라서 싫었다. 좋았다 하게 돼. 그게 너무 힘들어. 다른 사람이 내 모양을 바꾸는 걸 더 보고 있을 힘이 이제 나에게는 없어.
어떤 공간에, 집단에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공간을 벗어나서도 계속 그 사람이 만들어낸 압력에 눌려 있었다. 퇴근을 하고도 계속 상사의 표정과 말투과 화법을 반복 재생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그만 생각하자는 생각을 수백 번 읊조려도 그만둘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뒤부터 은영은 물리적으로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을 느꼈다. - P132

재인은 내 마음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무책임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놀랐다. 동시에 반발심이 들었다. 내가 열심히 들여다본 내 마음을 왜 당신에게 말해줘야 해? 나는 내 마음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했어, 사랑했던 마음, 사랑하지 않는 마음. 그게 왜 당신에게 사과해야 할 일이지? - P138

나는 그러니까 어디에 있건 존중을 받고 싶었던 것이라고, 직업을 바꾼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다른 사람이 귀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고...... 그건 직업을 바꾼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받아들이는 데 삼 년이 걸렸다. 은영은 자신이 언제나 느린 편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은 훌쩍훌쩍 넘어가는 시기에 혼자 찐득하게 머물러 있다고. 불량 액체괴물 같다고. 손에 묻지 않고 모양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게 액체괴물의 특징인데, 나는 자꾸 손에 묻는 거지. 모양도 제대로 만들지 못하고. - P139

스스로가 싫어지면 연쇄적으로 다른 사람도 싫어졌다. 다른 사람이 싫어지면 스스로가 싫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알쏭달쏭했지 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재인은 더이상 누군가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내린 판단들은 냉정하고 박정했다. 어느 누가 다가와도 결국엔 내 마음이 거기에 잘 붙어 있지 못 할 거야. 마음이 포스트잇이야. 나는 관계를 지속하는 데 목적이 없는 사람이야. 한번 그렇게 생각하자 자꾸만 자신이 내린 스스로에 대한 생각을 점점 믿게 되었다. 자신에게는 애초에 그 기능이 없다고. - P143

아픈 것은 그런 일인 것 같았다. 평소의 나와 아주 많이 달라지 는 일, 혼자가 되는 일. 평소에도 영은은 그렇게 생각해왔다. 다르다는 건 외로운 일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서로 모두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외로운 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도 생각했다. 다만 달라도 괜찮다는 말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해도 외로운걸. - P157

서로 아픈 부분을 보여줘야만 친구가 된다는 것? 내가 너무 건 강한 사람처럼 보일 때는 오히려 나를 조금 배척한다는 것? 아픈 사람들이 자기 말고 다른 사람들은 아파본 적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을 때? - P162

영은은 그런 희재를 두고 저렇게 자기 말을 자기가 반박하고 의심하고 수정하는 것도 희재의 세계에선 흔한 일일까, 하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그마한 자기의 세계 안에서 살고 서로 다른 분위기와 풍습과 규칙을 지녔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친구를 표본 삼아 그런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 사회문화 과목 선생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어서 재밌었다. - P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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