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약에도 체해. 그럴 때 있잖아. 선의에도 걸려 넘어지잖아. 그런 걸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어. 우린 겨우 서른 언저리잖아. - P74

아름에게는 아름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고, 해든에게는 해든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우뇌와 좌뇌처럼, 언제부터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뉘었나 생각해보면······ 나는 과거 이야기에 취한 사람이 싫어, 아름이 그렇게 말했던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 전에도 후에도 아름에게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일은 적었지만. 아름이 말하는 과거가 나 대학생 때, 나 고등학생 때, 나 어렸을 때, 하며 시작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과거에 사로잡혀 아직 축축한 사람들의 이야기. 또 거기에 내내 취해 있는 사람들의 자기 연민, 자기 변명, 자기 서사. 그런 걸 싫다고 한 거겠지. 그쯤은 뉘앙스로 맥락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것쯤은 충분히 공유하고 공감하는 사이였으니까. - P76

선배 생각보다 사랑 좋아하네.
사랑 좋아하지. 없으니까 노래로 부르지.
그럼 선배······ 연예인도 제법 좋아하는 거 아니야? 없으니까 인형으로 만드는 거 아니야?
그렇게 물었다. 그 사람의 한 조각이라도 가지고 싶은 마음,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일이 좋은 거라고 진지하게 대답하려는 찰나 아름이 먼저 말했다.
나는 선배가 말랑말랑할 때가 좋아. - P79

숨을 참았다기보다 숨을 내쉴 때 나도 모르게 무서워, 하고 말하게 될까봐 그 말을 참았다. 소리 없이 혀끝에서 말을 굴렸다. 무섭다고 말해도 될까. 안 되겠지. 수술을 앞둔 당사자한테 사실 나 너무 무섭다고 말하는 것.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하나하나 꼽아볼 때마다 전부 잃을까봐 무섭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우리가 헤어지는 일을 엄마만 무서워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실은 나도 엄마와 헤어지는 일을 내내 무서워했다는 것을, 무서워서 외면하고 도망치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떨어지는 일이 두려워 애초에 붙어 있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것을. 아주 오랜만에 걸려온 엄마의 전화로 알게 되었다. 아플 때 엄마는 너그럽고, 담대했다. 내가 언제나 원하던 엄마 같았다. - P81

나는 내가 엄마보다 용감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모든 헤어짐을 생각하며, 나로부터 떠나갈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눈물보다 콧물이 많이 나온 것 같다. 옷소매와 머리카락에 묻히며 정신없이 울었다. 괴상한 소리와 함께. 그것이 나다운 것 같았다. 언제나 하고 싶었던 것. 혼자이거나 누군가의 앞에서이거나. 평펑 울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승맞게 울다가 가을은 왜 이렇게 을씨년스럽냐, 하고 애꿎은 가을을 탓했다. 그냥 다 싫었다. 슬슬 건조해지는 공기, 물들어 말라가는 나뭇잎, 앙상해지는 나무, 추워지는 날씨, 지겨운 일교차, 갑자기 바뀌는 온도만큼이나 갑자기 떠나가는 사람들.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언제든 떠날 것만 같은 사람들, 매번 나만 혼자 남는 감각. 지겹다. 그 말이 절로 나왔다. 지겨웠다. - P81

나보다 타인을 더 걱정하는 마음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 마음이 아파지는 것을 못 견뎌 하는 마음? 네가 아프면 내가 괴로우니 아프지 말아달라는 이기적인 마음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큰 불행은 타인에게 가는 것이고 나에게는 그보다 작은 불행만 올 것이라 자만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이 사랑인 건지, 잠깐 생각해 봤으나 알 수 없었다. 너무 어려웠다. 그런 건. 함부로 할 수 있다고 말하기엔 너무 커다래서 잡히지 않았다. 열광과 몰입 외에 무엇이 사랑일까. 질투와 소유욕 외에. 조급함과 뜨거움 외에 사랑이 뭘까. 그 외의 사랑이 나에게 있을까? 나는 자주 의심했다. - P84

걱정이 사랑이라면, 걱정도 사랑이라면 나는 왜 이 사실을 당장 엄마에게 알리지 못하는 걸까. 누군가가 나를 걱정한다면 나는 오히려 불안해지고 두려워질 것만 같다. 그건 또 어째서일까. - P85

샌드위치는 이름을 보고 고르면 이름대 로 정확한 맛을 나에게 주었다. 가볍고 든든할 수 있다니. 식사인데 부담스럽지 않고 식사인 만큼 제 몫을 해낼 수 있다니. 샌드위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거의 먹을 때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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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질 때 나는 그에게 감사했다.
나는 말했다.
"설명해줘서 고맙습니다."
"무슨 말씀을! 당신에게 고맙지요!" 그가 말했다.
"뭐가 고마운가요?" 나는 놀랐다.
"관심을 가져준 것이 고맙지요!" 바로 이것이 그날 밤 있었던 일 가운데 가장 놀랍고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밤하늘의 별에 관심을 보여서 고맙다고 했다. 마치 하늘이 그의 것인 듯 말이다! 그가 모든 광경의 책임자인 것처럼 말이다! 밤하늘이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서 만족스럽다는 듯 말이다!
그는 땅과 하늘의 주인이었다.
[…]
"관심을 가져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는 이 땅과 별들을 상속받았다. 그는 지식을 물려받았다. - P202

어떤 앵무새들은 정말로 에나멜로 뒤덮인 것 같았고, 또 어떤 앵무새들은 라일락처럼 깃털이 풍성했고, 또 다른 놈들은··· 비교할 것을 찾지 못하겠다. 맞아, 나무랑 비슷했다. 그 새는 이 곳에서 저곳으로 자리를 바꾸었다. 날아다녔고 갑자기 반짝 빛났고 사라졌다.
이 기적의 존재는 호주작은앵무새라고 불린다. 앵무새가 아니라 작은 앵무새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아주 작은 새이기 때문이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미니어처의 걸작이라 할 만하다. 여기 한 마리가 작은 그물 고리 위에 앉았다. 앵무새들이 하듯이 자기 이마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그물 위로 걸어간다. 우리 눈높이 정도에서 멈춰 섰다. 새의 목에 있는 무늬가 보인다. […]
사실 저런 무늬를 만들기는 정말 어렵다! 그렇다면 모든 색채를 발명하기는? 이 색채 계열과 풍부한 뉘앙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천재적인 장인은 대체 누구인가?
자연이다. - P212

또다시 우리는 도시에 있다. 우리는 기계들 가운데 있다. 기계를 만드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리. 비행기. 또는 작은 공구들. 현미경의 마법 같은 눈.
우리는 환상적인 기술세계 속에 있다. 여기서 인간은 자연과 동일한 힘의 거장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자연보다 강력하다. 인간은 자연의 비밀을 벗겨내고 자연이 봉사하도록 강제한다. 인간은 자연을 길들이고 자연은 갈수록 덜 울부짖으며, 동물원의 새끼 동물 마당에 있는 잘 따르는 새끼 눈표범처럼 인간의 손안에서 갈수록 더 가르릉거린다. - P214

형제간의 관계는 보통 거칠며 상냥함은 대개 숨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형제는 형제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어도 한마디 말만으로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과 눈짓을 하며,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 당신과 그만이 알고 있는 우습고 은밀한 것에 대해 묻는 사람은 바로 형제인 것이다. 당신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 형제는 말없이 당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당신은, 그가 당신의 언행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혹시나 자기가 이해 하지 못하는 길을 당신이 가더라도 그는 당신이 스스로를 망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들과 대화를 마친 당신은 불현듯 형제가 만 족스럽게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형제는 당신의 명예를 걱정한다. 이것은 다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형제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가 갑자기 밤에 찾아오면 그에게 식사를 주고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그가 함께 있는 것이 결코 방해가 되지 않는다. 당신은 일을 계속할 수도 있고 어쩌면 램프 불빛 너머로 그를 잠시 바라본 다음 물어 볼 수도 있다. - P217

두 번째 노래를 마치자 메레드는 자신의 발견을 떠올렸고 친구들에게 거울을 보여주었다. 집주인이 소리쳤다.
"메레드! 너는 커다란 노래를 불렀는데 인생은 그동안 작은 걸 지어냈구나···. 들어봐. 그 거울은 방금 흙담 옆에 서 있던 아가씨 거야. 그녀가 그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았거든. 난 그녀가 자기 얼굴에 빠졌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그 아가씨 말이 ‘아니에요, 내 얼굴에 감탄해서가 아니에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어서예요. 작별할 때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았거든요. 저는 거울을 바라봅니다. 오랫동안요.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거울 속에 나타나요‘ 하는 거야. 그녀가 나한테 한 말이야. 메레드, 아가씨한테 연인의 얼굴을 돌려줘!"
아가씨는 수로 옆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무릎 위에 별들이 흩뿌려진 작은 거울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거울을 들고 들여다보았다. 약혼자의 얼굴이 전투모 아래에서 그녀에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아가씨는 꿈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니라 인생이었다. - P232

"엄마가 저기 있어요!" 소녀가 소리를 지르고는 쏜살같이 군중 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 즉시 군중 속에서 하나의 밝은 형태가 분리되어 나왔는데 일 초 후 그 형태는 두 팔 벌려 포옹하는 여성의 모습이 되었다.
그런 뒤 엄마는 딸을 두 팔에 안고 내 옆을 지나갔다. 그녀는 딸의 종아리 위로 두 팔을 교차시킨 채 딸의 얼굴을 자기 얼굴에 밀착시키고 있었다. 딸의 무게 때문에 그녀는 약간 몸을 뒤로 젖히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덕분에 나는 가려진 곳 없이 그녀의 얼굴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쓰고 있는 머릿수건에 그려진 춤추는 장미들 사이로 빛나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승리의 반사광이 이처럼 매혹적이라면 승리 자체는 얼마나 멋진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 - P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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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은 「로빈슨 크루소」를 언급하면서, 로빈슨이 모래밭에서 인간의 발자국을 갑자기 발견하는 장면에 이르면 언제나 전율이 일어난다고 말했다.
어렸을 때 우리는 「걸리버 여행기」가 풍자문학이라는 것을 몰랐다. 또한 대니얼 디포가 「로빈슨 크루소」에서 식민주의자들의 담대함과 진취성을 일반화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시대 전체의 철학을 반영한 위대한 책들은 어린이들에게 모험과 기적을 다룬 책으로 받아들여진다. 바로 이 점에 이 책들의 감동적이고 다중적인 생명이 스며 있다. - P175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에 시인들이 존재했다는 걸 우리는 몰랐다. 그렇지만 이 작은 그림들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세상에 예술이 존재한다는 걸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우리가 보았던 그림들은 우리를 놀라게 했고 감탄하게 했으며 중요한 점은 우리에게 이해하려는 열망을, 즉 흥미를 갖게 만들었다. 이게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왜 그런 걸까? 왜 이 작은 사람이 돌로 된 사자 등에 올라타고 있을까? 우리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 그려져 있음을 분명히 이해했다. 격랑을 일으키는 물 위에서 돌로 만든 사자에 앉아 있는 사람은 두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그림을 보고 이해하면서 우리는 처음으로 드라마의 감각을 접했다. 당시 그 감각은 몹시 강렬한 것이었다. 드라마의 내용은 결국 우리에게 미지의 것으로 남았다. 우리는 원인도 결과도 몰랐다. 전체 사건의 논리도 몰랐고 결론을 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림에서 수수께끼가 생겨났다. 그리고 이 신비로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그림에 부여했다. - P178

봄이면 이제 막 꽃을 피운 나무들과 풀로 뒤덮인 대지가 자연의 모습 전체에 수공예품의 성격을 부여하는 며칠의 기간이 있다. 구름까지도 만들어진 느낌을 준다. 자연이 불가항력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반대로, 만물에서 예술의 드높은 기교가 감지되는 것만 같다. 만일 갑자기 비가 한줄기 퍼붓고 지나간다면 그것은 한순간 모든 수공예품을 은빛으로 빛나게 하려고 미리 계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P181

오늘 오데사에서는 노동절을 기념한다.
아침부터 사위가 고요하다.
퍼레이드 직전의 고요함이다. 마치 도시가 텅 빈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어딘가에 꼼짝도 하지 않고 잔뜩 긴장한 어마어마한 군중이 서 있음을 알고 있다. 너무나 조용해서 누군가의 한마디 말이나, 아니면 말이 머리를 흔드는 바람에 마구가 갑자기 빚어내는 금속성의 소리가 온 거리를 날아가 꽤 먼 거리에서도 들을 수 있을 정도다. - P181

나는 우리 조국의 이 위대한 의미를 인정한 사람의 빈소를 지켰다. 이 사람 자신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아연으로 만든 관의 여러 면들, 나뭇잎과 꽃들의 실루엣만을 보았다. 나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젊은 여성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그를 기억했고, 그녀의 기억 속에는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그를 내게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고, 나는 그녀의 기억의 눈으로 그 살아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녀의 눈물이 내게는 그의 삶을 알려주는 유일한 묘사였다. - P191

나는 만족감과 기쁨, 장엄함을 맛보았다.
나는 우리가 그 위로 날아가고 있는 지형이 이동하는 것을 창을 통해 보았다. 그 움직임은 선회하는 형태인 것 같다. 거대한 공간들이 어떤 회전을 시작하지만 끝마치지는 않는 것 같다. 그 느낌이란 비행기가 공중에 움직이지 않고 매달려 있는 듯하다. 햇빛을 받아 선명히 빛나고 있는 노란 들판의 표면 위로 비행기 그림자가 달려가고 있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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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넌 좀 존재감이 있네.
선배와의 면담은 떨리고 미안할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다. 나는 선배가 선배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그리고 선배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전혀 몰랐다. 그건 이번 여름에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었다. 나는 땀이 나서 축축해진 손바닥을 반바지에 닦으며 뜨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름의 기온 때문은 아니었다. - P44

선배의 입꼬리가 씰룩이다가 자리를 잡고, 입술 끝 야윈 볼에 보조개가 생길 때를 기다리고, 왼뺨에 빛이 번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셔터를 눌렀다. 한 번, 또 한 번. 그 시간 동안 변하는 선배의 모습을 본다. 동그랗게 떴다가 가늘게 웃는 눈을, 경직되었다가 풀어지는 입매를 오래오래. 익숙하고 낯선 얼굴.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고 작은 것에 집중하던 선배의 모습은 내가 가장 많이 봤고 좋아하던 모습. 매일 보던 선배를 가장 낯설게 선배답게 담고 싶어 애쓴다. 그러면서 다시 느낀다. 가장 좋아하는 걸 담고 싶었어. 그대로 또 다르게. - P45

린드그렌이 어느 책에 썼다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이는 세상에서 혼자 살 수 없어요.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나는 선배가 내게 준 게 뭐였든 그 말만은 나의 말로 바꿔 읽기로 했다. 어른도 세상에서 혼자 살 수 없어요.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저는 어쩔 수 없어요. 린드그렌에게 말하는지, 민아에게 혹은 해든에게 말하는지 모르게 그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고, 그리고 일어 섰다. - P55

나뭇잎 사이로 오후의 빛이 흩어져 올려다보니 단풍나무 아래였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은 단풍나무. 연한 초록색의 뾰족하고 작은 잎들 사이로 하늘과 구름이 조금씩 보였다. 단풍은 아직이지만 가을은 오려는지 조각난 하늘의 파란빛이 선명했다. 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하늘도 썩 괜찮았다. 인형을 그리면서는 모든 색을 물감으로 이해했다. 무슨 색에 무슨 색을 더하면 저 하늘빛에 가깝겠군, 하는 식으로. 이제는 셔터를 누르듯 신중하게 눈을 한 번 깜빡여보았다. 캄캄해진 눈 안에서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빛이 맴돌았다. 다시 눈을 뜨자 선명히 보이는 것들. 이것을 기억해야지, 생각했다. - P55

엄마는 내가 잘할 때만 좋아하지. 그래서 나는 언제나 잘하고 싶었어. 그 오래된 마음, 이제는 원망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되어서 싫었고 이제는 엄마가 좋아하는 내가 되었네, 그런 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되었어, 하는 마음에 좋기도 했다. 나는 나를 제법 효율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현실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그랬다. 한 가지 일로 여러 감정을 느끼면 그건 효율적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는 일은 효율적이었다. 회사에 도움이 되는 동시에 내 마음을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만들었으니까. - P64

아무래도 슬픔은 고체다. 내가 제일 많이 떠올리는 형태는 어릴 적 봤던 바이올린 활에 바르는 송진덩어리다. 슬픔은 마음 한구석에 송진 같은 고체 형태로 존재하다가 어떤 녹는점에서 녹아 흐른다. 액체가 되어 온몸으로 퍼지기도 하고 자칫하면 눈물이 되어 쏟아지기도 한다. 슬픔의 녹는점은 누군가의 한마디나 체온, 혹은 해질녘의 버스 정류장이나 혼자 멍하니 보내는 주말의 긴긴 낮일 수도 있다. - P66

사람을 못 믿은 사람은 누구일까. 누군가가 나에게 좋아 보인다고, 나의 어떤 면을 좋아한다고 진심으로 말해줘도 강아지처럼 꼬리 흔들지 않을 거야 하고 조용히 으르렁거린 사람은. 그건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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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여름의 많은 것들이 좋았다. 무거운 머리카락을 한 번에 묶어 올리는 순간 시원해지는 목덜미, 갈증을 단번에 해소해주는 차가운 아메리카노, 물기를 가득 머금은 것이 한눈에 보일만큼 기세 좋게 푸른 통통한 나뭇잎들, 초여름의 장미 덤불, 식당 유리문에 붙은 ‘콩국수 개시‘, 나는 못 입는 짧은 크롭티를 입은 멋있는 사람들, 끝없이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여름 휴일의 산책, 그렇게 오래 걷다 마시는 달고 시원한 냉매실차. 그런 것들 때문에 돌아오는 여름을 매번 기쁘게 맞을 수 있었다. - P9

스스로를 잘 알고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들. 그런 둘과 달리 나만 가운데서 갈팡질팡인 사람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지 스스로에게 실망하며 돌아왔던 밤을 기억한다. - P20

아름다운 삼각형을 원하는 건 나만의 꿈일까. 언제나 삼각형을 상상하며 살아온 것 같았다. 둘은 너무 적고 넷은 너무 많으니까. 나에게 둘이 의미하는 것은 애인이었고 넷이 의미하는 것은 가족이었다. 셋은 친구였다. 나는 둘이나 넷보다 언제나 셋만을 바라왔다. - P23

나는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 때문에 친구들이 있는 놀이터로 갈 수 없음에 서러워져 엉엉 울면서 남은 포도알 세 개를 붙였다. 그날 엄마가 차려준 저녁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먹었겠지. 그러나 이렇게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나는 그날의 낙심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가락은 피아노에, 고개는 창 밖 놀이터 쪽에 두고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엉엉 울던 내 마음을. 나중에 그 슬픈 기억을 우스갯소리와 버무려 엄마에게 얘기했을 때 엄마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면서 나를 놀렸다.
너 참 요령 없다. 나중에 혼나고 그냥 나가 놀지, 그게 뭐라고. 울긴 왜 울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미 다 커버렸는데도) 그걸 그때 말해주지 않은 엄마가 너무 밉고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론 놀라웠다. 아니 그럼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래도 된다는 걸 알고 있었던 말이야? 그런데 나는 그걸 왜 몰랐을까. - P28

몇 년의 시간이 타원을 그리며 흘러 비슷하지만 다른 장면으로 도착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면 그립고도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나는 카메라를 만지는 해든 옆에서, 해든이 알지 못하는 생각을 했다. 하마터면 듣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해든의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것만으로 사진 찍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는 너무 속이 없는 사람인 걸까. 해든은 무슨 생각으로 다시 나에게 뭔가를 함께 하자고 했을까. - P31

내 마음에 드는 내가 되는 일은 도대체 어떤 걸까. 나는 이쪽저쪽으로 온통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스스로에 대한 짜증스러움, 불만 투성이의 속마음. 그런 걸 동료들에게 들킬까봐 불안했다. 노력했지만, 당연히 그런 것들은 티가 나기 마련이다. 나도 모르게 아주 깊은 곳에 품은 어떤 마음이, 아주 오래전부터 쌓아온 어떤 태도가 지금의 우리를 만들듯이. - P34

그런 걸로 미움받을까 두려워하지 마. 사람들은 생각보다 널 그렇게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아.
나는 그 문장을 통해 내가 원했던 것이 완벽한 오류였다는 걸 알았다. 나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으며, 누군가만은 나를 그렇게 좋아해줬으면 하고 바랐다. 선배의 말은 나에게 큰 힘이 되었으나 언제나 그랬듯, 나는 그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반만 믿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하고 실망하며 미워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그랬으니까. 나는 선배가 한 말처럼, 선배처럼 되고 싶었다. 미움받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해달라고 보채지 않는 사람이.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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