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약에도 체해. 그럴 때 있잖아. 선의에도 걸려 넘어지잖아. 그런 걸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어. 우린 겨우 서른 언저리잖아. - P74
아름에게는 아름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고, 해든에게는 해든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었다. 우뇌와 좌뇌처럼, 언제부터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뉘었나 생각해보면······ 나는 과거 이야기에 취한 사람이 싫어, 아름이 그렇게 말했던 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 전에도 후에도 아름에게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일은 적었지만. 아름이 말하는 과거가 나 대학생 때, 나 고등학생 때, 나 어렸을 때, 하며 시작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과거에 사로잡혀 아직 축축한 사람들의 이야기. 또 거기에 내내 취해 있는 사람들의 자기 연민, 자기 변명, 자기 서사. 그런 걸 싫다고 한 거겠지. 그쯤은 뉘앙스로 맥락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것쯤은 충분히 공유하고 공감하는 사이였으니까. - P76
선배 생각보다 사랑 좋아하네. 사랑 좋아하지. 없으니까 노래로 부르지. 그럼 선배······ 연예인도 제법 좋아하는 거 아니야? 없으니까 인형으로 만드는 거 아니야? 그렇게 물었다. 그 사람의 한 조각이라도 가지고 싶은 마음,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일이 좋은 거라고 진지하게 대답하려는 찰나 아름이 먼저 말했다. 나는 선배가 말랑말랑할 때가 좋아. - P79
숨을 참았다기보다 숨을 내쉴 때 나도 모르게 무서워, 하고 말하게 될까봐 그 말을 참았다. 소리 없이 혀끝에서 말을 굴렸다. 무섭다고 말해도 될까. 안 되겠지. 수술을 앞둔 당사자한테 사실 나 너무 무섭다고 말하는 것.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사실은 하나하나 꼽아볼 때마다 전부 잃을까봐 무섭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우리가 헤어지는 일을 엄마만 무서워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실은 나도 엄마와 헤어지는 일을 내내 무서워했다는 것을, 무서워서 외면하고 도망치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떨어지는 일이 두려워 애초에 붙어 있지 않으려고 애썼다는 것을. 아주 오랜만에 걸려온 엄마의 전화로 알게 되었다. 아플 때 엄마는 너그럽고, 담대했다. 내가 언제나 원하던 엄마 같았다. - P81
나는 내가 엄마보다 용감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끊고 모든 헤어짐을 생각하며, 나로부터 떠나갈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눈물보다 콧물이 많이 나온 것 같다. 옷소매와 머리카락에 묻히며 정신없이 울었다. 괴상한 소리와 함께. 그것이 나다운 것 같았다. 언제나 하고 싶었던 것. 혼자이거나 누군가의 앞에서이거나. 평펑 울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승맞게 울다가 가을은 왜 이렇게 을씨년스럽냐, 하고 애꿎은 가을을 탓했다. 그냥 다 싫었다. 슬슬 건조해지는 공기, 물들어 말라가는 나뭇잎, 앙상해지는 나무, 추워지는 날씨, 지겨운 일교차, 갑자기 바뀌는 온도만큼이나 갑자기 떠나가는 사람들. 아직 떠나지 않았지만 언제든 떠날 것만 같은 사람들, 매번 나만 혼자 남는 감각. 지겹다. 그 말이 절로 나왔다. 지겨웠다. - P81
나보다 타인을 더 걱정하는 마음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 마음이 아파지는 것을 못 견뎌 하는 마음? 네가 아프면 내가 괴로우니 아프지 말아달라는 이기적인 마음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큰 불행은 타인에게 가는 것이고 나에게는 그보다 작은 불행만 올 것이라 자만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마음이 사랑인 건지, 잠깐 생각해 봤으나 알 수 없었다. 너무 어려웠다. 그런 건. 함부로 할 수 있다고 말하기엔 너무 커다래서 잡히지 않았다. 열광과 몰입 외에 무엇이 사랑일까. 질투와 소유욕 외에. 조급함과 뜨거움 외에 사랑이 뭘까. 그 외의 사랑이 나에게 있을까? 나는 자주 의심했다. - P84
걱정이 사랑이라면, 걱정도 사랑이라면 나는 왜 이 사실을 당장 엄마에게 알리지 못하는 걸까. 누군가가 나를 걱정한다면 나는 오히려 불안해지고 두려워질 것만 같다. 그건 또 어째서일까. - P85
샌드위치는 이름을 보고 고르면 이름대 로 정확한 맛을 나에게 주었다. 가볍고 든든할 수 있다니. 식사인데 부담스럽지 않고 식사인 만큼 제 몫을 해낼 수 있다니. 샌드위치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거의 먹을 때마다.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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