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넌 좀 존재감이 있네. 선배와의 면담은 떨리고 미안할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당황스러운 면이 있었다. 나는 선배가 선배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그리고 선배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 전혀 몰랐다. 그건 이번 여름에 내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었다. 나는 땀이 나서 축축해진 손바닥을 반바지에 닦으며 뜨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여름의 기온 때문은 아니었다. - P44
선배의 입꼬리가 씰룩이다가 자리를 잡고, 입술 끝 야윈 볼에 보조개가 생길 때를 기다리고, 왼뺨에 빛이 번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셔터를 눌렀다. 한 번, 또 한 번. 그 시간 동안 변하는 선배의 모습을 본다. 동그랗게 떴다가 가늘게 웃는 눈을, 경직되었다가 풀어지는 입매를 오래오래. 익숙하고 낯선 얼굴.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고 작은 것에 집중하던 선배의 모습은 내가 가장 많이 봤고 좋아하던 모습. 매일 보던 선배를 가장 낯설게 선배답게 담고 싶어 애쓴다. 그러면서 다시 느낀다. 가장 좋아하는 걸 담고 싶었어. 그대로 또 다르게. - P45
린드그렌이 어느 책에 썼다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린이는 세상에서 혼자 살 수 없어요.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나는 선배가 내게 준 게 뭐였든 그 말만은 나의 말로 바꿔 읽기로 했다. 어른도 세상에서 혼자 살 수 없어요. 누군가와 함께 살아야 합니다. 저는 어쩔 수 없어요. 린드그렌에게 말하는지, 민아에게 혹은 해든에게 말하는지 모르게 그런 말을 속으로 중얼거리고, 그리고 일어 섰다. - P55
나뭇잎 사이로 오후의 빛이 흩어져 올려다보니 단풍나무 아래였다. 아직 단풍이 들지 않은 단풍나무. 연한 초록색의 뾰족하고 작은 잎들 사이로 하늘과 구름이 조금씩 보였다. 단풍은 아직이지만 가을은 오려는지 조각난 하늘의 파란빛이 선명했다. 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하늘도 썩 괜찮았다. 인형을 그리면서는 모든 색을 물감으로 이해했다. 무슨 색에 무슨 색을 더하면 저 하늘빛에 가깝겠군, 하는 식으로. 이제는 셔터를 누르듯 신중하게 눈을 한 번 깜빡여보았다. 캄캄해진 눈 안에서도 아직 사라지지 않은 빛이 맴돌았다. 다시 눈을 뜨자 선명히 보이는 것들. 이것을 기억해야지, 생각했다. - P55
엄마는 내가 잘할 때만 좋아하지. 그래서 나는 언제나 잘하고 싶었어. 그 오래된 마음, 이제는 원망하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떠올리게 되어서 싫었고 이제는 엄마가 좋아하는 내가 되었네, 그런 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되었어, 하는 마음에 좋기도 했다. 나는 나를 제법 효율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현실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그랬다. 한 가지 일로 여러 감정을 느끼면 그건 효율적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면에서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는 일은 효율적이었다. 회사에 도움이 되는 동시에 내 마음을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만들었으니까. - P64
아무래도 슬픔은 고체다. 내가 제일 많이 떠올리는 형태는 어릴 적 봤던 바이올린 활에 바르는 송진덩어리다. 슬픔은 마음 한구석에 송진 같은 고체 형태로 존재하다가 어떤 녹는점에서 녹아 흐른다. 액체가 되어 온몸으로 퍼지기도 하고 자칫하면 눈물이 되어 쏟아지기도 한다. 슬픔의 녹는점은 누군가의 한마디나 체온, 혹은 해질녘의 버스 정류장이나 혼자 멍하니 보내는 주말의 긴긴 낮일 수도 있다. - P66
사람을 못 믿은 사람은 누구일까. 누군가가 나에게 좋아 보인다고, 나의 어떤 면을 좋아한다고 진심으로 말해줘도 강아지처럼 꼬리 흔들지 않을 거야 하고 조용히 으르렁거린 사람은. 그건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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