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여름의 많은 것들이 좋았다. 무거운 머리카락을 한 번에 묶어 올리는 순간 시원해지는 목덜미, 갈증을 단번에 해소해주는 차가운 아메리카노, 물기를 가득 머금은 것이 한눈에 보일만큼 기세 좋게 푸른 통통한 나뭇잎들, 초여름의 장미 덤불, 식당 유리문에 붙은 ‘콩국수 개시‘, 나는 못 입는 짧은 크롭티를 입은 멋있는 사람들, 끝없이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여름 휴일의 산책, 그렇게 오래 걷다 마시는 달고 시원한 냉매실차. 그런 것들 때문에 돌아오는 여름을 매번 기쁘게 맞을 수 있었다. - P9

스스로를 잘 알고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사람들. 그런 둘과 달리 나만 가운데서 갈팡질팡인 사람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나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지 스스로에게 실망하며 돌아왔던 밤을 기억한다. - P20

아름다운 삼각형을 원하는 건 나만의 꿈일까. 언제나 삼각형을 상상하며 살아온 것 같았다. 둘은 너무 적고 넷은 너무 많으니까. 나에게 둘이 의미하는 것은 애인이었고 넷이 의미하는 것은 가족이었다. 셋은 친구였다. 나는 둘이나 넷보다 언제나 셋만을 바라왔다. - P23

나는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 때문에 친구들이 있는 놀이터로 갈 수 없음에 서러워져 엉엉 울면서 남은 포도알 세 개를 붙였다. 그날 엄마가 차려준 저녁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먹었겠지. 그러나 이렇게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나는 그날의 낙심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가락은 피아노에, 고개는 창 밖 놀이터 쪽에 두고 뭐가 그렇게 서러워서 엉엉 울던 내 마음을. 나중에 그 슬픈 기억을 우스갯소리와 버무려 엄마에게 얘기했을 때 엄마는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면서 나를 놀렸다.
너 참 요령 없다. 나중에 혼나고 그냥 나가 놀지, 그게 뭐라고. 울긴 왜 울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미 다 커버렸는데도) 그걸 그때 말해주지 않은 엄마가 너무 밉고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한편으론 놀라웠다. 아니 그럼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래도 된다는 걸 알고 있었던 말이야? 그런데 나는 그걸 왜 몰랐을까. - P28

몇 년의 시간이 타원을 그리며 흘러 비슷하지만 다른 장면으로 도착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면 그립고도 낯선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나는 카메라를 만지는 해든 옆에서, 해든이 알지 못하는 생각을 했다. 하마터면 듣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해든의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 것만으로 사진 찍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면 나는 너무 속이 없는 사람인 걸까. 해든은 무슨 생각으로 다시 나에게 뭔가를 함께 하자고 했을까. - P31

내 마음에 드는 내가 되는 일은 도대체 어떤 걸까. 나는 이쪽저쪽으로 온통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스스로에 대한 짜증스러움, 불만 투성이의 속마음. 그런 걸 동료들에게 들킬까봐 불안했다. 노력했지만, 당연히 그런 것들은 티가 나기 마련이다. 나도 모르게 아주 깊은 곳에 품은 어떤 마음이, 아주 오래전부터 쌓아온 어떤 태도가 지금의 우리를 만들듯이. - P34

그런 걸로 미움받을까 두려워하지 마. 사람들은 생각보다 널 그렇게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아.
나는 그 문장을 통해 내가 원했던 것이 완벽한 오류였다는 걸 알았다. 나는 누구에게도 그렇게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으며, 누군가만은 나를 그렇게 좋아해줬으면 하고 바랐다. 선배의 말은 나에게 큰 힘이 되었으나 언제나 그랬듯, 나는 그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반만 믿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기대하고 실망하며 미워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 그랬으니까. 나는 선배가 한 말처럼, 선배처럼 되고 싶었다. 미움받을까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해달라고 보채지 않는 사람이.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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