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용실을 바꾼 게 무슨 대수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황당해하는 내게 흙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내 마음 편한 게 최고라며 웃음을 지었고, 그런 흙을 보고 있자니 나도 나지만 너도 참 너구나 싶어 나중에는 그냥 항복하는 마음이 되었다.
하지만 요즘 나는 흙이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계속 만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흙이 나로부터 비롯된 갖은 감정적 악취를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한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애써 멀리 에둘러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흙은 대체로 그런 사람이니 내게도 예외는 아닐 거라는 생각.
참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다. - P183

그래, 그럴 수 있지. 이렇게 스치는 것조차 곤란하고 불편할 수 있지. - P185

한동안 나는 그날의 선택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그저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뿐이었다고 되뇌곤 했다. 그즈음의 나는 완전히 소진된 상태여서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 주고 공감해 줄 여력이 없었던 거라고, 그러므로 그날 밤 나를 찾은 사람이 꼭 물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응답하지 않았을 거라고 자꾸 내 입장을 정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하고도 반이 지난 지금, 나는그게 완전한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코 거짓은 아니지만 내게는 그 모든 것들을 선행하는 진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나를 한껏 위축시키고 주저하게 만들었던 그날의 불편에는 분명한 실체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P188

길을 걷다가 어느 집 대문 앞에 놓인 화분을 보고 멈춰 섰다. 거뭇하게 시들고 말라 버린 이름 모를 화분에 큼지막한 메모가 붙어 있었다.
[살리고 있는 중. 가져가지 마세요.]
"나는 카메라 앱을 열고 메모가 잘 보이도록 구도를 잡다가, 오늘은 이거에 대해 쓰면 되겠다고 확신하며 버튼을 누르려다가 불현듯 스치는 어떤 생각에 다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고 결심했으면서, 섣불리 연민하거나 동정하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 나는 어느새 그걸 또 잊고 있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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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확실한 건 그날 거기에 있던 십수 명의 사람들 가운데 그분은 확실히 뭔가 다른 존재였고, 나는 그 다름이 나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으며 그것이 내 인생을 결코 수월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리라는 것을 일찌감치 감지했다는 것이다. 어떤 기억이 거듭 재조합되며 수명을 연장하는 건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 P143

하지만 그렇게 좋은 사람인 척, 아니, 보통 사람인 척 노력한 날에는 어김없이 거대한 뭔가가 나를 물속에 처박아 놓고는 네 자리는 거기라고, 너는 평생 거기서 쥐죽은듯이 땅 위의 사람들을 쳐다만 보라고 강제하는 듯한 기분에 시달렸는데, 그럴 때 나는 고장났고 고로 폐기 처분되어 마땅하다는 결론까지 도달하는 건 아주 금방이었다. 언젠가 어느 결혼식에 갔던 날에는 그냥 저기 저 창밖으로 뛰어내릴까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해 내가 내 마음을 해치면서까지 괜찮은 척하는 건 이제 그만하자는 결심을 하게 되기도 했고. - P151

다음 알람이 울렸을 때 나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았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도 나는 내가 나를 흉내 내고 있다는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으니까. 누나가 얘기해서 살 것 같은 사람은 진짜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내가 아니고 그저 기대되는 말이나 어울리는 말, 필요한 말만 할 수 있는 나였으니까. 잠시라도 내가 누구인지 까맣게 잊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아쉽게도 나는 내가 여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계속 움켜쥐고 있었다. - P159

나는 그 순간에는 조금 멋쩍었으나 금세 한갓진 기분이 되어서는 따라 웃었다. 얘는 열여섯인데 이게 되는구나 싶어서, 중심도 기준도 모두 자기한테 둘 수 있구나 싶어서 좀 신기하면서도 기꺼운 질투심 같은게 일었다. 그건 신경말단이 툭툭 살아나는 느낌이기도 했고, 그제야 내가 서 있는 곳이 물속이 아니라 땅 위라는 걸 자각한 것처럼 숨이 확 트이는 느낌이기도 했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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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광호 씨에 대해 말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따금 사로잡히곤 한다. 이를테면 해질 녘의 버스 차창 안으로 불그스름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지친 사람들의 얼굴을 비출 때, 혹은 서늘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곤 다른 쪽으로 서서히 불어 갈 때 길을 걷다 어디 좋은 데라도 가는지 한껏 멋을 부린 사람과 스칠 때나, 다가오는 일행에게 반갑게 손을 흔드는 사람이 보일 때도 그렇다.
광호 씨는 딱히 옷을 잘 입는 사람도 아니었고 동작이 큰 사람도 아니었지만 나는 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마다 광호씨를 떠올린다. - P87

나는 그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던 광호 씨의 말을 자주 곱씹는다. 어쩌면 그 말은 나를 향한 충고나 조언이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향한 기대와 희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바람을 안고서. 우리의 정체성이 어떻든 거기엔 아무런 차별이 없어서 특별한 용기도 자긍심도 필요 없는 세상. 우리가 누구에게 어떤 종류의 끌림을 느끼든 그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어서 누군가의 인정도 응원도 필요 없는 세상. 그날의 광호 씨는 시간이 흐르면 그런 세상이 반드시 도래할 거라는 자신의 믿음에 내기를 걸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우리가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그런 세상은 틀림없이 앞당겨질 거라는 신념을 내게 보여 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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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동안 의문에 잠겼어요. 그 사람이 왜 그러는 건지, 왜 만나지도 않은 사람을 만난 척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새벽에 무슨 나쁜 꿈이라도 꾼 건지 제 팔을 꼭 끌어안은 채로 잠들어 있는 주호 씨를 보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이 사람은 윤범 씨를 만난게 아닐까. 그날 이 사람이 만난 건 언제라도 연락해 만날 수 있는 윤범 씨가 아니라 이제 더는 만날 수 없는 윤범 씨가 아닐까. 이 사람은 윤범 씨에 대한 마음을 처분하거나 무효화하지 않고 끝내 간직해 보려는 게 아닐까. - P73

나는 요즘도 보일러실 한쪽에 놓여 있는 그 그릴을 볼 때마다 우리를 떠올린다. 인주 씨와 내가 함께 주호를 기다렸던 그 해 질 녘의 베란다와 점점 줄어드는 와인을 앞에 두고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우리를 어떻게든 재현해 보려할 때마다 번번이 실패하고야마는 내 소설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날에 대해 써 보려고 했다. 뭔가를 써야 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날이 다가와 나를 건드렸을 뿐 아니라, 그날에 대해 쓰지 못하면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로부터 얼마만큼 멀어졌는지 나 자신에게조차 증명할 길이 없을 것만 같았으니까.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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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윤수희 감독이 또 한 번 성소수자 얘기에 천착한다는 사실이 못내 불편했고, 정확히 그 부분에 시비를 걸고 싶었다. 내가 당사자성에 집착하는 게 내 몫의 자리를 빼앗긴 것만 같은 박탈감 때문이라는것도 알고, 그토록 바라 왔으면서도 정작 너도 나도 퀴어 퀴어 하는 꼴을 보니 배알이 꼴려서라는 것도 알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머릿속에 두서없이 떠오르는 질문들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어째서 당신이 우리의 스피커가 되어야 하는가. 잘 알지도 못하고 잘 알 수도 없으면서 당신이 게이에 대해 말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설마 다음에는 트렌스젠더인가. 다다음에는 퀘스처닝에 인터섹스, 무성애자이고?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기만 하면, 선의와 정치적 신념을 담보하기만 하면 당신의 발언은 정당해지는가. 당신이 성소수자를 도구화해서 재생산한 편견에 대해서는 누가 책임지는가. - P19

글쎄, 무엇이 나를 침묵하게 한 건지는 지금도 확실하지 않다. 안부현 씨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한편 같아 보이는 어떤 공고한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래서 너는 어느 편이냐고 따져 묻는 듯한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이 사람들한테는 어차피 무슨 말을 하더라도 소용없으리라는 체념 때문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나는 안부현 씨가 내게 도움을 청한 게 아니라 오히려 나를 도와주려 했기 때문에 고개를 돌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나를 진작 간파한게 아닐까 싶어서, 그 순간 내가 당연히 상처받았으리라 짐작하고는 기꺼이 내 편이 되어 주려 했던 게아닐까 싶어서. 나는 어떻게든 보이길 원하는 사람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숨어 버리는 사람이니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때 나는 없는 존재가 되기를 선택했고 그건 나에게도 어떤 상흔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견디듯 앉아 있다 결국 인사도 없이 강의실을 떠나 버린 안부현 씨의 뒷모습을 곱씹었고, 커리큘럼에 굳이 오스카 와일드를 끼워 넣거나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에 보란 듯이 색색의 인덱스를 붙여 놓는 짓 따위로 뭔가를 해냈다고 착각했던 나 자신에게 환멸을 느꼈다. - P29

그런데요. 살다 보니 알겠어요. 그때 내가 그렇게 결혼한 건, 가난 때문이 아니었어요. 나는 그냥 겁이 났던 거예요. 이러다 우리가 뭐라도 될까 봐, 나를 향한 순영이의 마음이 진실하다는 걸 아니까, 내가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절실히 원한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그런 건 잘못됐고 비참한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도망친 거예요. 그 애는 마지막까지 용기를 냈는데…… 나는 참 바보 같죠? - P38

하지만 나는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내가 줄담배에 통화까지 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어느덧 무대 위에 새로운 장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가르는 어떤 선 앞에서 발이 묶인 것처럼 멈춰 섰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새로운 인물을, 잿빛이 감도는 짧은 머리에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채 내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중년의 여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볼록한 이마를 자꾸 만지작거리는 손짓에서는 염려와 긴장이 역력했고,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무는 듯한 미소에서는 뭔가를 애써 억누르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흘렀다. 그때 안부현 씨는 테이블에 앞이마를 맞댄 채 깜빡 잠들어 있었는데, 보기보다 많이 취한 모양인지 그토록 기다렸던 사람이 왔고, 그 사람이 당신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제는 도리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나는 정지된 화면처럼 오래도록 미동도 하지 않는두 사람을 눈에 담다가 만났으나 아직 만난 게 아닌 두 사람 때문에 괜히 마음 졸이다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 불필요한 시선이 남아 있는 한, 두 사람의 이야기는 결코 시작되지 않으리라는 어떤 확신 때문이었다. 앞으로의 시간은 오로지 두 사람을 위한 것이어야 했고, 고로 오늘 내게 주어진 유일한 지문은 퇴장이었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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