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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의 영성 - 토미 테니가 제안하는 거룩한 균형잡기, 토미 테니 시리즈 4
토미 테니 지음, 이상준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전에 토미 테니의 책을 몇 권 읽었지만 크게 관심을 갖지는 못했다. 전체적으로 ‘쉽게’ 이야기한다는 것만 특징적으로 발견했을 뿐, 내용을 통해서 크게 도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균형의 영성]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는 다른 책들에 비해 조금은 ‘철저히’ 읽어 보았지만 ‘비판적’으로 읽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어나가면서 몇몇 부분들에 대해서는 공감을, 그리고 몇몇 부분들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견해를 표명하게 되었다. 그 내용들을 몇 부분으로 나누어서 적어본다.
1. 주제에 대해서
1) - 마르다의 영성 vs 마리아의 영성
① 이 책은 기본적으로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마르다의 영성과 마리아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실상 이 주제는 기독교 영성에서 매우 오래 된 내용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 그린 신부가 쓴 [세상에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성바오로)은 이 주제를 전통에 근거하여 다루고 있다. 몇 년 전에 발간된 조안나 위버의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마음 갖기](좋은씨앗)는 이 주제를 보다 현대적으로 다루면서 적용하는 책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리아와 마르다의 대조가 전통적인 것임을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르다와 마리아 본인들만 놓고 본다면, 이러한 도식은 두 사람을 지나치게 양극화(兩極化)시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서의 경우에도 그러한데, ‘균형’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들의 차이를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마르다와 마리아 본인도 그것을 인정할까? 저자의 지적처럼 모든 사람 안에는 두 성향이 다 ‘놓여’ 있다(122p). 그리고 그것은 마르다나 마리아 자신의 경우에도 예외로 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즉, 마르다에게도 마리아적 성향이 있고 마리아에게도 마르다적 성향이 있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을 상대방의 성향은 전혀 가지지 않은 극단적인 존재로 몰아붙이는 것은 정당하지 않아 보인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편재’와 한 장소에 ‘집중’하는 원리(190p)가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둘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집중’)이 편하기는 하지만, 한 사람 안에 두 가지 성향이 다 들어있음(=‘편재’)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② 각 사람 안에 넣어 두신 마리아와 마르다(122p)적인 성향은 정도와 비율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마르다에 아주 가까운 자리에 위치하고 다른 이는 마리아에 아주 가까우며, 어떤 이들은 그들의 중간 또는 1/3 되는 지점에 위치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a. 주어진 성향 그대로 행할 것인지, b. 아니면 ‘균형’을 위해서 중심을 향해 가야 하는지 하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간간히 전자의 견해도 언급하는데, 이는 서로 반대되는 입장이어서 둘을 함께 언급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이 부분은 마지막의 ‘5. 저자의 결론에 대하여’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2) 균형에 대해서
① [균형의 영성]이 제시하는 ‘균형’이라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일까? 물론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갖추신(균형!) 분이시기는 하다. 하지만 이 ‘균형’이라는 주제를 제시하기 위해 저자가 예로 들고 있는 대상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두 가지 영성을 함께 가진 한 사람’이 아니라 ‘두 가지 영성을 각각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저자는 중간에 수넴 여자를 마르다의 영성과 마리아의 영성을 모두 가진 존재로 소개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본적으로는 이 두 사람을 놓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왜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가 있기는 하겠지만, 굳이 두 사람을 ‘대립’시키고 그런 후에 ‘균형’의 명목으로 ‘통합’시킬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냥 그대로 인정한다면 좋지 않을까?
② 마리아의 영성과 마르다의 영성은 간단히 예배와 섬김으로 표현된다. 저자는 이 둘의 연합과 양쪽을 다 끌어안을 것을 제안한다(52p). 이 부분에서 나는 “빵과 복음”이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하지만 로잔 대회 이후로 ‘빵이냐 복음이냐’하는 논쟁은 많이 해소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 교회 안에서 더 이상 복음 전도와 사회 정의를 놓고 진보와 보수 간에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을 발견되지 않는다. 어쩌면 해묵은 논쟁거리를 다시 꺼내는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취하는 입장은 ‘연합 지상주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저자가 주장하는 ‘균형’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사실,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나처럼 만들지 않는 것이다. 나처럼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처사이다! 상대를 나처럼 만들지 않으면서도 균형을 이루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2. 저자의 선입견에 대하여 - 지나친 도식화, 양극화
① 책 전체에서 발견되는 것은 ‘지나친 도식화와 양극화’이다! 저자가 본문 가운데서 말하는 것들이 두 사람의 추천인의 글에 다시 언급된다. 강준민 목사는 ‘마리아의 영성=십자가의 수직, 마르다의 영성=십자가의 수평’이라는 도식을 이야기하고, 고형원 씨는 ‘열정=수직, 긍휼=수평’(본문 144p), ‘하나님은 균형을 가장 기뻐하신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섬기고 마르다는 사람을 섬긴다’는 등의 내용을 소개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저자의 선입견에서 나오는 지나친 도식화와 양극화, 그리고 근거 없는 전제에 불과하다. 어디에,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단언’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마리아는 하나님을 섬기고 마르다는 사람을 섬긴다’고 했는데, 성경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한다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차이가 과연 ‘대상’의 차이인가? 동일한 대상인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가 아니었던가? 성경의 마르다는 ‘예수님’의 필요에 집중했다(109p)! 하지만 일반화 되고 도식화 된 마르다는 ‘사람들’의 필요에 집중하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러한 ‘대상의 변화’는, 일반화와 도식화가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보다 보편적으로 상황과 대상을 깨우쳐주지만(장점), 본문과는 좀 동떨어진 해석과 적용으로 연결되는 것(단점)이다.
② 또 하나 발견하게 되는 선입견은 ‘마리아에 대한 편애’이다. 마르다의 약점을 언급하는 내용(135p)을 보면 논리적인 모순과 함께 저자의 ‘편애’가 나타난다. 마르다에게 ‘행동하는 것’이 강점이요 ‘마음의 열정이 없는 것’이 약점이라고 한다면, 마리아에게는 ‘마음의 열정’이 강점이요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약점이라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마르다의 약점만을 ‘약점’으로 인정하고, 마리아의 약점은 약점으로 여기지 않는 듯이 말한다. 물론 책의 곳곳에서 자신이 공평한 위치에서 마르다를 인정하고 그녀를 더 온전하게 하고자 한다고 말하기는 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마르다에 대한 언급은 저자의 ‘마리아에 대한 편애’를 보여준다. 그의 태도에서 나는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혀준 야곱의 모습을 발견한다. 게다가 저자는 이런 부분을 이야기할 때에, 그리고 많은 경우에 ‘단정적’인 표현(“~이다.”)을 사용한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과 내용이라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도 그렇게 한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는 부분에서는 ‘유보적’ 표현(“~으로 보인다”, “~인 것 같다”)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③ 세 번째 선입견은 저자의 이분법적인 시각과 태도이다. 스데반과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149p)를 보면서 저자가 지나치게 양극화 된 시각을 독자들에게 ‘주입’하고자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인격 안에 자연스레 들어가 있는 두 성향을 ‘의도적’으로 ‘분리’하고 ‘대립’시킨 후에, 다시금 ‘균형’이 필요하다며 그 둘을 ‘봉합’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둘을 묶어서 하나로 보는 전일(全一)적인 관점을 취한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커져도 사람을 향한 긍휼이 커지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한 것이다!”(232p)라는 말에서도 발견된다. 저자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마리아)과 ‘사람을 향한 긍휼’(마르다)을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 이분법적이다! 바로 뒷 페이지에 나오는 “확실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문제만 지적해서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233p)라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문제만 지적’, ‘사람을 향한 긍휼=확실한 해법을 제시’라는 공식을 보여준다. 왜, 무엇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문제 지적에 그친다고 말하는 것일까? 저자의 선입견은 매우 뿌리 깊어 보인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열정은 사람을 향한 긍휼을 가져오고, 문제의 지적과 함께 확실한 해법도 제시하게 한다.
3. 저자의 주관적 해석에 대하여
저자의 성경 해석에는 상당 부분 저자의 묵상 또는 상상에 의한 주관적인 부분이 들어가 있다. 작가적 상상력이 유익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김성일 장로의 [제국과 천국](홍성사)에서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상에서 요한에게 어머니인 마리아를 맡기셨는가를 다루는 부분은 성경을 보는 시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순전히 상상에 의한, 주관적인 해석은 곤란하다.
1) 긍정적인 부분
①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청년의 관에 가까이 갔을 때 사람들이 보였을 법한 반응에 대한 묘사(112p)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내용이었다.
② 저자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129p)에서 피가 있고 없고를 기준으로 삼는 일반적인 시각과는 달리, 다윗의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피 없는 ‘감사와 구원 요청’(시 50) 또는 ‘상한 심령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시 51)을 더 선호하심을 보여준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라 해도, 이전에는 서로 연결시키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 새로운 깨달음이다.
③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놓은 이유에 대한 그럴듯한 상상(177p)은 유쾌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하나님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신다!
2) 부정적인 부분
① 이 책의 ‘전제’와도 같은 부분인데,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머물기를 좋아하셨던 것이 그분의 신성과 인성 모두 대접 받으실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과 관련하여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했던 전혀 새로운 해석과 적용이다! 이것은 분명 저자의 ‘묵상’이나 ‘상상력’에 근거한 해석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어렵다. 성경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② 예수님이 그들의 집에 방문하셨을 때에, ‘마리아는 직감으로 마르다가 힘들게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68p)는 해석은 신빙성이 없다.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해석하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인가?
③ 손 마른 자에 대한 해석(134p) 역시 지나치게 극(comedy)화 되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쳐 주고자 하신다는 것은 이미 그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고, 예수님도 그들의 그런 생각을 아셨다. 손 마른 자가 저능아가 아니라면 어느 손을 내밀라는 것인지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4. 좋았던 내용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동의하고 감동했던 내용 몇 가지를 적어 본다.
① “교회가 소금을 잃어갈수록 세상은 갈증을 잊어버리게 된다”(87p)는 말은 참으로 멋드러진 문장이다! ‘교회’라는 ‘소금’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갈증’을 느끼게 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그 ‘갈증’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 아닌가!
② 영적 감수성 지키기(110p)에 대한 부분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에게 정말로 필요한 부분이다! 나쁜 영화만이 아니라 감상적인 것도 피한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김남준 목사의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김남준 목사는 ‘포르노를 보는 것은 물론 나쁘지만 할 일 없이 쇼핑 목록을 보는 것은 더 나쁘다’고 주장하며,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같이 ‘불륜’을 ‘사랑’으로 미화하는 종류의 책이나 영화를 보는 것은 지독히 위험스러운 일이라고 경고한다. 그러한 경고와 저자의 이야기는 일맥상통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적 민감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결국 우리를 범죄로 밀어 넣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버리기(114p) 때문에, 강조되고 또 강조되어야 하는 내용이다!
③ 예배와 관련된 문구들... “열정은 논리적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도록 만든다.”(167p) “대부분의 교회는 예배드리는 그 자체보다 예배를 위한 마르다의 ‘사전 준비’를 더 편하게 생각한다. 물론 둘 다 중요하다. 하지만 예배는 예배 준비와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다.”(168p) “우리의 실수는 마르다의 그것처럼 주님의 분명한 임재가 나타났을 때도 그분의 발 앞에 앉지 않고 여전히 준비에 몰두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나타나시면 준비를 멈추고 주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168p) 또한 성령님의 임재를 간구하면서도 정작 그분이 오시면 오래 머물지 말아 주기를 요구하는 우리의 ‘말도 안 되는 이분법’적인 태도에 대한 저자의 지적(174p)은 정곡을 찌른다!
5. 저자의 결론에 대하여 - 상반되는 두 가지 결론
① 처음 ‘1. 주제에 대해서’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이다. a. 하나는 둘 다를 각자 인정하라는 것이요, b. 다른 하나는 서로를 배워가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결론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건덕지는 없다. 그럼에도 시비를 걸고 싶은 건 왜일까? 너무도 ‘매끄러운’ ‘균형’이라는 개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까? ‘어떤 면에서’ 성경은 균형을 깨버리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에 모여서 기도하던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들이 술에 취했다고 단정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술에 취한 것으로 보이는 모습이 과연 ‘균형’잡힌 모습일까? 성령에 강력하게 사로잡힌 수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모두 ‘균형’잡힌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까? ‘균형’에 대한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균형’ 쪽으로만 몰고 가는 것도 개운하지는 않게 여겨진다.
② 처음 예상했던 것처럼 저자는 두 가지 결론을 함께 사용한다. 저자는 먼저,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마르다는 마르다대로 놔둬야 한다고 주장한다(83p). 나는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각각의 특성에 맞추어 각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해야 하고, 그 다음에 서로 돕도록 해야 한다는 것(88p)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267페이지에서도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마르다는 마르다대로 놔두라. 양자간의 자연적인 상호작용으로, 환대함으로 만들어내는 집안에 균형을 만들어내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267p)라고 다시금 결론짓는다.
③ 그러면서도 그는 두 번째 결론도 제시한다. 어쩌면 저자는 이것을 가장 결정적인 결론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저자의 결론은 처음 예상 했던 두 번째 결론과는 차이가 있다. 저자는 “마르다며, 이제는 행주를 내려놓고 음식 준비하는 것도 멈추라. 마리아여, 이제 마르다를 격려하여 주님 발 앞에 함께 앉으라”(275p)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서로에게서 배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다를 이끌어 마리아의 자리에 앉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마리아에 대한 편애’가 결론이 이런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④ 하지만 저자는 이 두 주장 사이의 부조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간과하는 것인지 그냥 넘어가 버린다. 사실 이 책의 주제를 감안한다면 이 부분을 정리해주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결국 이 책은 ‘마르다의 영성과 마리아의 영성’ 사이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마리아의 영성’에 손을 들어주면서 끝나는 듯 보인다.
오래된 주제는 그만큼 이야기꺼리도 많고 생각할 꺼리도 많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가는 쉬운 방법은 없다. 그동안 되어왔던 논의들을 숙고하고 그 위에 서서 한 걸음 더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이 전혀 새로운, 나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도 과거에 이야기 되었던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로 그치고 만다.
물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질서’가 꼭 ‘균형’과 동일한 것도 아니며, 우리 인간이 ‘균형’을 잡겠다고 나서면 오히려 균형이 깨지기가 십상이다. 그렇다고 균형을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