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누구나 잘 할 수 있다
소재찬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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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체적으로 글과 책의 구성은 상당히 괜찮다. chapter에서 chapter로 넘어가는 부분이 상당히 매끄럽고, 알아듣기 쉽게 썼다. 하지만 내용이 지나치게 많이 반복된다.


2. 저자의 전제를 파악하는 것이 책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의 전제는 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설교자로) 세우셨다는 것과 ② 능력 주시기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12p)이다. 그런데 이 전제가 ‘일반적’으로는 수긍할 수 있으나, ‘설교’의 문제와 연결되면 무리가 생긴다. 책 제목에 ‘설교’ 대신 ‘찬양, 행정, 상담’ 등을 넣어도 무리가 없을까?

저자는 몇 차례에 걸쳐(5, 13, 52p) 사역자들에 대한 부르심, 소명, 사역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했다. 모든 목사가 목회자로 부름 받았을까? 모든 목회자가 설교자로서의 소명/사역을 받은 것일까? 목사라면 무조건 설교를 잘해야 하는 것일까? 잘 할 수 있고, 잘해야만 하는 것일까? 설교를 못하는 목사는 회개해야(16p) 하는 것일까?


3. 저자가 말하는 ‘잘하는 설교’와 ‘위대한 설교자’는 ‘대형 교회의 성공한 목회자’와 ‘그들의 설교’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쉽게 이해되는 설교, 성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설교, 사람들이 교회에 몰려오게 하는 설교를 하도록 돕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목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기준, 그러한 모범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4. 포인트 워드에 대한 지나친 신뢰가 엿보인다. 하지만 포인트 워드는 만능일 수 없다!


5. ABC 이론은 ‘쓰기’와 관련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도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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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사도행전
진 에드워즈 지음 / 미션월드라이브러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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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야기 사도행전’이라고는 하지만 사도행전 전체를 다루는 것은 아니고 사도행전 13:3까지만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사도행전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그것의 현대적 의미 그리고 적용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단순히 사도행전만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2. 저자의 작가적 상상력은... 때론 놀라운 통찰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조금은 무리/억지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심지어는 저자의 ‘지식의 부족’이 느껴지는 부분도 꽤 되었다.

* 지적하고 싶은 몇 가지를 항목별로 나누어 보았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좋았던 내용들

1) ‘나사렛 예수의 처형’과 ‘유월절 어린양 준비’와의 대조(18)나, ‘오순절 성령 강림’과 ‘초실절’의 대조는 신선했다.

2) “하나님의 능력은 빈호주머니에서 나온다”(90)는 말은 멋드러진 표현이었다.

3) 목회자의 사도적 역할의 강조(109, 110)는 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4) 초대 교회에 직분이 세워지기까지의 과정과 세월에 대한 지적(105)도 좋았다. 우리는 직분을 세우는 데 있어서 너무 성급하다! 저자는 스데반의 예를 들고 있는데(126) ‘지금 당장’하도록 요구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본문 중에서... : 그러나 현재 우리는 선교 사역에 나서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오직 성령님이야!’라고 주문을 외우기만 한다. 물론 이 말은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성령을 경험한 사람이 곧 모든 권능을 얻었다는 것은 아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 모두가 목회자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현대 교회에서 성령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목회를 하고 교회의 리더가 된다는 것도 큰 문제지만, 반대로 성령을 체험했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와 인내함이 없이 섣부르게 덤비는 것도 매우 큰 문제다.

5) 자격을 살피기 위해 ‘은사’에만 집중하면 위험하다는 지적! 은사만이 아니라 그의 일상적인 교회 생활도 보아야 한다(118)!

6) “교회는 그들이 다니는 곳이 아니라 그들 자신”!(156) 오늘날과 같은 선교의 개념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실제로 선교에 앞장섰던 사람들(198)

7) 고넬료의 개종과 관련하여 그가 할례를 받았을 것이라는 지적(215)은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럴듯한 지적!

8) 예루살렘 교회는 왜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 한 사람만 파견했을까?(223) 일반적으로 둘씩 짝을 지어 파송하는 것의 예외 상황에 대한 지적. 아마도 이는 사울 등장을 위한 배경이 되는 듯...

9) 안디옥의 교사들... 그들은 ‘즐김, 재미’가 아니라 ‘삶의 감동, 구원의 메시지’를 보여주었다!!!(256) 현대 사회와 교회는 사람들에게 ‘즐김’과 ‘재미’를 주고자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2. 좋지 않았던 내용들

1) 12제자들이 오순절 이후에 비로소 ‘사도’라 불렸다는 내용(34)은 틀렸다. 오순절 이전에 이들이 사도로 불렸던 경우는 많다.(마 10:2; 막 6:30; 눅 6:13; 9:10, 12; 11:49; 17:5; 22:14; 24:9, 10, 11, 33).

2) 베드로의 무식함에 대한 강조(35) 역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기는 하지만 불분명하다. 예를 들어, 주석가들은 베드로가 쓴 두 개의 편지(베드로 전후서)는 매우 유창한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3) 이것은 사도들은 헬라어를 몰랐다는 주장(230)과 연결된다. 하지만 성경이 기록된 코이네 헬라어는 당시 시장에서 사용된 매우 일상적인 언어였고, 당시에 헬라어는 공용어였기 때문에 많은 경우 헬라어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고, 사도들이 헬라어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 같은 경우는 그의 이름도 헬라식 이름이고,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도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보아(요 12:20 이하), 적어도 빌립은 헬라어를 할 수 있었다. 저자는 왜 자꾸 사도들이 헬라어에 무뢰한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4)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 방식과 유대 지역 교회들의 성장 방식에 대한 대조(185) 또는 안디옥 교회의 성장과 관련된 지적(258)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간단히 말해서, 저자는 예루살렘 교회는 기적/이적을 통해 성장했고, 그 외의 교회는 ‘공동체 생활’이나 ‘말씀’을 통해 성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단정은 아쉽다.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에도 기적/이적은 여전히 행해졌다. 유대 전도에 있어서 기적/이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빠져있다고 해서 더 이상 기적/이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것이 보편적으로 행해졌기에 굳이 기록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적/이적’과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은 함께 가는 것이며,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안디옥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의 사역에서 여전히 기적/이적은 행해졌으며, 그의 선교 여행은 헬라 지역에서도 행해졌지 않은가!

5)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에 ‘반역’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는 지적(231)은 지나치게 보인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보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까? 또한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꼭 그렇게 해석하기는 어렵다. 정말 편지를 통한 보고조차도 하지 않았을까? 사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의 안디옥 사역과 관련해서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6) 저자는 바울의 고향인 다소가 ‘이방 신전으로 가득 찼다’고 소개한다(234). 물론 이방 도시들에 이방 신전들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가득 찼다’는 표현은 아덴의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행 17:16 우상이 가득). 하지만 이처럼 도시에 우상과 이방 신적을 가득찬 것을 본 바울의 반응은 무척 강렬한 것이었다. 바울이 정말 아덴과 별다를 것이 없는 상황(다소)에서 자랐다면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 아닐까?

7) 인물과 관련하여 생소하게 들리는 주장들이 몇 가지 있다.

① 바나바가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이는 바울과 아굴라가 업이 같다는 말씀(행 18:2-3)과 혼동한 것은 아닌가?

② 저자는 안디옥 교회의 교사 가운데 하나였던 ‘시므온 니게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던 ‘구레네 시몬’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분명치 않다.

③ 마가 요한의 어머니가 ‘마리’(251)가 아니라 ‘마리아’(행 12:12)이다. 번역이나 오타의 문제일 수도... 하지만 구레네를 ‘시린’이라고 번역한 것(255)은 좀... 키레네나 사이린까지라면 몰라도 ‘시린’이라는 음역은 전혀...

8) 직분과 관련해서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① 저자는 초대 교회의 직분이 ‘사도 - 전도자 - 예언자 - 장로’의 순서로 세워졌다고 말한다(250). 하지만 사도행전이 그런 순서로 직분이 나온다고 해서 꼭 그런 순서로, 점차적으로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무리일 듯...

② 장로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현대적인 장로에 대한 설명으로 들린다. 예를 들어 ‘직접 목회를 하지 않는다, 예언을 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단지 사도들이 없을 때 교회의 행정을 대리로 처리해 주는 사람들이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초대 교회의 장로는 사도들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되었으며(베드로나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 부른다. 벧전 5:1; 요이 1; 요삼 1), 장로와 가르침을 연결시키는 본문(딤전 5:17)도 있기 때문이다.

③ 장로의 선택 방법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다는 지적(251) 역시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신약 교회가 장로를 어떻게 선택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나 집사의 기준이 제시되고 있는 본문이 있는 것을 보면(목회 서신), 장로 역시 선택의 기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④ 사도직 임명에 대한 이야기(264)도 조금 납득하기 어렵다. 저자는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세운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두 사람을 사도로 임명하셨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쉽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물론 사도행전 14:14은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곳 한 곳 뿐이다. 이것은 아마 단순히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도’의 의미를 그대로 적용시킨 것일 수 있다(오늘날 선교사를 가리키는 missionary는 보낸다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missio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선교사도 ‘사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사를 ‘사도’로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12사도와 바울 이외의 사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바울은 고전 12:29에서 “다 사도겠느냐”라고 말한다). 오늘날 ‘사도’로 불리는 바울의 경우, 당시에도 그의 ‘사도권’은 계속해서 도전받았다. 하지만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이미 부름을 받았기에 바나바의 경우와는 다르다.

저자가 ‘사도직’을 ‘보편화’시켜 말하는 것은 곧바로 오늘날의 교회에 ‘진정한 사도들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으로 연결된다(265). 초대 교회 이후에 과연 사도가 존재하는가? 오늘날 교회 안에 ‘사도’가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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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빛
토마스 머튼 / 성서와함께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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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성경에 대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하지만, 신학적인 지식을 주는 책은 아니다(비록 신학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실존적인 지적에 가깝다. 그러나 그의 글을 읽다보면, 성경을 읽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한 내적 충동을 경험한다.

2. 성경의 ‘일방적인 성격’에 대한 지적. “어떤 것도 배타하지 않고 긍정한다”(21p)라... 정말 그런가? 진리는 그 자체로 ‘배타성’을 가진다. 모든 것을 포용하고 긍정하는 것이 과연 ‘진리’일 수 있을까? 물론 진리는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진리의 보편성은 배타성과 배치되지 않는다. 그 둘은 함께 가는 것이다.

3. 인용하고 있는 칼 바르트의 말은 생각해봄직 하다. “성서는 어떤 책인가?”라고 묻는 이들을 향해 성서는 “성서를 읽는 당신은 누구인가?”라고 되묻는다고(43p)...

4. 본회퍼의 말도 인용하고 있다. 성서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할 신부/목사들의 성서에 대해 갖는 반감에 대하여(44p)... 이것은 생각지 못했던 주제다! 그러나 일리가 있다! 그러고 보니 머튼은 가톨릭 신부인데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인물들을 자연스럽게 인용하고 있다. 상당한 정도의 지식!

5. 우리의 ‘사변적인 물음’에 대한 성서의 ‘지독하게 실제적인 물음’(49p)! 만일 우리가 성서에게 삶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요청한다면, 성서는 우리에게 언제 삶을 시작하겠느냐는 물음으로 답한다. 다시 칼 바르트의 말. “우리가 묻는 물음은 우리를 묻는 물음이 된다! 그 물음 앞에서 우리는 ‘예’와 '아니오‘ 사이의 참으로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57P).

6. 전문학술의 광야(58p)!! 정말 그렇다! 구약학 책을 읽으면서... 학자들 누가 뭐라고 했고 누가 뭐라고 했는지를 나열한 것들을 보는 것은 고역이다. 문서설, 종교사학파... 정말 ‘전문 학술의 광야’다! & 메마르고 초점 잃은 탐구(59p).

7. 성서 읽는 습관이 든 사람들은 자기의 설정 때문에 성서를 깊이 읽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성서는 지금까지 ‘신앙’으로 여겨진 것들을 위협할 수 있다(61p)!!! 아... 절묘한 문장들!!

8. 불신자가 성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65p)! 이태리 마르크스주의자인 파솔리니가 마태복음을 읽고 만든 영화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습은, 기성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에서는 놀라웠으나 마태복음에는 더 가까웠다는 이야기...

9. 성서를 진지하게 읽는다는 것! = 성서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성서를 진지하게 읽지 않는다)! 나단 앞에 선 다윗의 모습을 보라! 스스로를 정죄하게 된 다윗(75p)! 성서는 정직하지 못한 복종보다 솔직한 항변을 더 좋아한다.

10. 들려지던 책으로서의 성서(92p)!!! 딜시의 이야기...

11. 성서와 다른 고전의 차이점. 성서가 더 잘 보여주는 것이 있는 반면에 다른 고전이 더 잘 보여주는 부분도 있다!!! 그러므로 다른 고전이 더 잘 보여주는 것을 성서에서 찾으려 하지 말라(103p)!

12.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인용들... 본회퍼의 말(109-110pp)... “하나님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부족한 지식을 채우는 분도 아니요, 개인저인 문제와 인간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의 원천인 분도 아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에야 만나게 되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A) “오히려 반대로 그분은 우리 실존의 바탕이고 중심이시며, 비록 우리 자신이 그분을 향해서 가고 있고 일상생활의 울타리를 넘어 그분께 이른다고 여기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출발하고 우리의 실존과 현실의 근본 바탕인 그분 안에서 여전히 머물러 있는 것이다.”(B)

A와 B는 내가 편의상 나눈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 A의 부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회퍼가, 그리고 머튼이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는 A의 부분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근본적인 B 부분을 강조함으로서 A가 찾아야 할 바른 자리를 찾아주고자 함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한계점에 도달해서‘도’(도달해서‘야’가 아니라!)만나야 하는 분이 분명하다. 문제는 우리가 한계선상에 있을 때만 하나님을 의식하고 인정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본회퍼도 머튼도 그런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보다 근본적인 부분(B)에서부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해결책, 해결사, 열쇠로만 보는 시각을 경계하라! 존 포웰의 말처럼 하나님은 아스피린이 아니시다!!! 이것이 본회퍼의 긍정적인 “하나님 없이(A) 하나님 앞에(B)”의 배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13. 성서에서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를 분명히 하라(115p)!! 형이상학, 윤리학, 황홀경, 명상, 신학, 철학... No! 성서를 어떻게 읽을까? 성서를 성서로 읽어라!!! 성서를 우리의 선입견과 틀로 제한하지 말라(116p)!! ‘축소론자들의 기준’ = 일반화의 위험성!

14. 두 차원의 성서 이해(이번엔 루돌프 불트만이다. 121P). a) 미리 이해(vorverständnis)는 공부를 통해서 얻는 지식으로 역사 비평적 방법은 이 ‘예비 지식’을 위한 것이요 준비단계에 불과하다! 최종 목적이 아니다(122p). b) 생동하는 통찰력(Lebenverhältnis)는 인격적 참여와 관계 맺음을 통한 성서의 실제를 파악하는 것이다.

15. 신약의 단호한 주장! 종교 자체가 깨끗이 사라질 날이 올 것이라는 예언(147p).

16. 성서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여러 역동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개방적인 마음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한다(153p).

17. 하나님을 도구화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화 하는 것의 위험성(153p)!!! 분별력 잃음 -> “하나님 죽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처하게 되는 상황이 아닌가!(155p)

18. 머튼의 결론... “믿으라! 그러면 이해하게 되리라?”(157p). 터툴리안의 말이었던 것 같은데... 믿음! 이해/이성/지성의 근거로서의 믿음! 머튼은 신앙심 없는 자들의 성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했었다(61, 65p). 그럼에도 그는 결론적으로 다시 ‘믿음’으로 돌아온다! 성서는 믿음 없이 읽는 자에게도 구원의 도리를 알려준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는 성서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믿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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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의 영성 - 토미 테니가 제안하는 거룩한 균형잡기, 토미 테니 시리즈 4
토미 테니 지음, 이상준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전에 토미 테니의 책을 몇 권 읽었지만 크게 관심을 갖지는 못했다. 전체적으로 ‘쉽게’ 이야기한다는 것만 특징적으로 발견했을 뿐, 내용을 통해서 크게 도전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균형의 영성]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는 다른 책들에 비해 조금은 ‘철저히’ 읽어 보았지만 ‘비판적’으로 읽고자 하는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그의 책을 읽어나가면서 몇몇 부분들에 대해서는 공감을, 그리고 몇몇 부분들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견해를 표명하게 되었다. 그 내용들을 몇 부분으로 나누어서 적어본다.


1. 주제에 대해서

1) - 마르다의 영성 vs 마리아의 영성

이 책은 기본적으로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마르다의 영성과 마리아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사실상 이 주제는 기독교 영성에서 매우 오래 된 내용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 그린 신부가 쓴 [세상에서 기도하는 그리스도인들](성바오로)은 이 주제를 전통에 근거하여 다루고 있다. 몇 년 전에 발간된 조안나 위버의 [마르다의 세상에서 마리아의 마음 갖기](좋은씨앗)는 이 주제를 보다 현대적으로 다루면서 적용하는 책이다.

그런데 이러한 마리아와 마르다의 대조가 전통적인 것임을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르다와 마리아 본인들만 놓고 본다면, 이러한 도식은 두 사람을 지나치게 양극화(兩極化)시킨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본서의 경우에도 그러한데, ‘균형’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들의 차이를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마르다와 마리아 본인도 그것을 인정할까? 저자의 지적처럼 모든 사람 안에는 두 성향이 다 ‘놓여’ 있다(122p). 그리고 그것은 마르다나 마리아 자신의 경우에도 예외로 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즉, 마르다에게도 마리아적 성향이 있고 마리아에게도 마르다적 성향이 있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을 상대방의 성향은 전혀 가지지 않은 극단적인 존재로 몰아붙이는 것은 정당하지 않아 보인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편재’와 한 장소에 ‘집중’하는 원리(190p)가 여기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둘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집중’)이 편하기는 하지만, 한 사람 안에 두 가지 성향이 다 들어있음(=‘편재’)도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각 사람 안에 넣어 두신 마리아와 마르다(122p)적인 성향은 정도와 비율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마르다에 아주 가까운 자리에 위치하고 다른 이는 마리아에 아주 가까우며, 어떤 이들은 그들의 중간 또는 1/3 되는 지점에 위치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a. 주어진 성향 그대로 행할 것인지, b. 아니면 ‘균형’을 위해서 중심을 향해 가야 하는지 하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후자의 견해를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간간히 전자의 견해도 언급하는데, 이는 서로 반대되는 입장이어서 둘을 함께 언급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이 부분은 마지막의 ‘5. 저자의 결론에 대하여’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2) 균형에 대해서

[균형의 영성]이 제시하는 ‘균형’이라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일까? 물론 예수님은 모든 것을 갖추신(균형!) 분이시기는 하다. 하지만 이 ‘균형’이라는 주제를 제시하기 위해 저자가 예로 들고 있는 대상인 마르다와 마리아는 ‘두 가지 영성을 함께 가진 한 사람’이 아니라 ‘두 가지 영성을 각각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저자는 중간에 수넴 여자를 마르다의 영성과 마리아의 영성을 모두 가진 존재로 소개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본적으로는 이 두 사람을 놓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왜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어야 하는 것일까? 저자의 의도가 다분히 들어가 있기는 하겠지만, 굳이 두 사람을 ‘대립’시키고 그런 후에 ‘균형’의 명목으로 ‘통합’시킬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냥 그대로 인정한다면 좋지 않을까?

마리아의 영성과 마르다의 영성은 간단히 예배와 섬김으로 표현된다. 저자는 이 둘의 연합과 양쪽을 다 끌어안을 것을 제안한다(52p). 이 부분에서 나는 “빵과 복음”이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하지만 로잔 대회 이후로 ‘빵이냐 복음이냐’하는 논쟁은 많이 해소된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 교회 안에서 더 이상 복음 전도와 사회 정의를 놓고 진보와 보수 간에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을 발견되지 않는다. 어쩌면 해묵은 논쟁거리를 다시 꺼내는 것 같은 느낌...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저자가 취하는 입장은 ‘연합 지상주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저자가 주장하는 ‘균형’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사실, ‘다른 것’을 ‘다른 것’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나처럼 만들지 않는 것이다. 나처럼 만들고자 한다면, 그것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처사이다! 상대를 나처럼 만들지 않으면서도 균형을 이루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2. 저자의 선입견에 대하여 - 지나친 도식화, 양극화

책 전체에서 발견되는 것은 ‘지나친 도식화와 양극화’이다! 저자가 본문 가운데서 말하는 것들이 두 사람의 추천인의 글에 다시 언급된다. 강준민 목사는 ‘마리아의 영성=십자가의 수직, 마르다의 영성=십자가의 수평’이라는 도식을 이야기하고, 고형원 씨는 ‘열정=수직, 긍휼=수평’(본문 144p), ‘하나님은 균형을 가장 기뻐하신다’, ‘마리아는 하나님을 섬기고 마르다는 사람을 섬긴다’는 등의 내용을 소개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저자의 선입견에서 나오는 지나친 도식화와 양극화, 그리고 근거 없는 전제에 불과하다. 어디에,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단언’하는 것일까?

예를 들어 ‘마리아는 하나님을 섬기고 마르다는 사람을 섬긴다’고 했는데, 성경 본문에 나와 있는 대로 한다면 마리아와 마르다의 차이가 과연 ‘대상’의 차이인가? 동일한 대상인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의 차이가 아니었던가? 성경의 마르다는 ‘예수님’의 필요에 집중했다(109p)! 하지만 일반화 되고 도식화 된 마르다는 ‘사람들’의 필요에 집중하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이러한 ‘대상의 변화’는, 일반화와 도식화가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보다 보편적으로 상황과 대상을 깨우쳐주지만(장점), 본문과는 좀 동떨어진 해석과 적용으로 연결되는 것(단점)이다.

또 하나 발견하게 되는 선입견은 ‘마리아에 대한 편애’이다. 마르다의 약점을 언급하는 내용(135p)을 보면 논리적인 모순과 함께 저자의 ‘편애’가 나타난다. 마르다에게 ‘행동하는 것’이 강점이요 ‘마음의 열정이 없는 것’이 약점이라고 한다면, 마리아에게는 ‘마음의 열정’이 강점이요 ‘행동하지 않는 것’이 약점이라고 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마르다의 약점만을 ‘약점’으로 인정하고, 마리아의 약점은 약점으로 여기지 않는 듯이 말한다. 물론 책의 곳곳에서 자신이 공평한 위치에서 마르다를 인정하고 그녀를 더 온전하게 하고자 한다고 말하기는 한다. 하지만 계속되는 마르다에 대한 언급은 저자의 ‘마리아에 대한 편애’를 보여준다. 그의 태도에서 나는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혀준 야곱의 모습을 발견한다. 게다가 저자는 이런 부분을 이야기할 때에, 그리고 많은 경우에 ‘단정적’인 표현(“~이다.”)을 사용한다.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과 내용이라면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에서도 그렇게 한다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는 부분에서는 ‘유보적’ 표현(“~으로 보인다”, “~인 것 같다”)을 사용하는 것이 옳다.

세 번째 선입견은 저자의 이분법적인 시각과 태도이다. 스데반과 베드로에 대한 이야기(149p)를 보면서 저자가 지나치게 양극화 된 시각을 독자들에게 ‘주입’하고자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인격 안에 자연스레 들어가 있는 두 성향을 ‘의도적’으로 ‘분리’하고 ‘대립’시킨 후에, 다시금 ‘균형’이 필요하다며 그 둘을 ‘봉합’시키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둘을 묶어서 하나로 보는 전일(全一)적인 관점을 취한다면 어땠을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커져도 사람을 향한 긍휼이 커지지 않으면 우리는 실패한 것이다!”(232p)라는 말에서도 발견된다. 저자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마리아)과 ‘사람을 향한 긍휼’(마르다)을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 이분법적이다! 바로 뒷 페이지에 나오는 “확실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고 단순히 문제만 지적해서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233p)라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문제만 지적’, ‘사람을 향한 긍휼=확실한 해법을 제시’라는 공식을 보여준다. 왜, 무엇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문제 지적에 그친다고 말하는 것일까? 저자의 선입견은 매우 뿌리 깊어 보인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열정은 사람을 향한 긍휼을 가져오고, 문제의 지적과 함께 확실한 해법도 제시하게 한다.


3. 저자의 주관적 해석에 대하여

저자의 성경 해석에는 상당 부분 저자의 묵상 또는 상상에 의한 주관적인 부분이 들어가 있다. 작가적 상상력이 유익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김성일 장로의 [제국과 천국](홍성사)에서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상에서 요한에게 어머니인 마리아를 맡기셨는가를 다루는 부분은 성경을 보는 시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순전히 상상에 의한, 주관적인 해석은 곤란하다.


1) 긍정적인 부분

① 나인성 과부의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청년의 관에 가까이 갔을 때 사람들이 보였을 법한 반응에 대한 묘사(112p)는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내용이었다.

② 저자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129p)에서 피가 있고 없고를 기준으로 삼는 일반적인 시각과는 달리, 다윗의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피 없는 ‘감사와 구원 요청’(시 50) 또는 ‘상한 심령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시 51)을 더 선호하심을 보여준다. 대단한 내용은 아니라 해도, 이전에는 서로 연결시키지 못했던 새로운 시각, 새로운 깨달음이다.

③ 선악과를 동산 중앙에 놓은 이유에 대한 그럴듯한 상상(177p)은 유쾌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하나님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신다!


2) 부정적인 부분

① 이 책의 ‘전제’와도 같은 부분인데, 예수님께서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머물기를 좋아하셨던 것이 그분의 신성과 인성 모두 대접 받으실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과 관련하여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했던 전혀 새로운 해석과 적용이다! 이것은 분명 저자의 ‘묵상’이나 ‘상상력’에 근거한 해석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어렵다. 성경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② 예수님이 그들의 집에 방문하셨을 때에, ‘마리아는 직감으로 마르다가 힘들게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68p)는 해석은 신빙성이 없다.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해석하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인가?

③ 손 마른 자에 대한 해석(134p) 역시 지나치게 극(comedy)화 되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쳐 주고자 하신다는 것은 이미 그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고, 예수님도 그들의 그런 생각을 아셨다. 손 마른 자가 저능아가 아니라면 어느 손을 내밀라는 것인지 몰랐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기의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


4. 좋았던 내용들

저자의 글을 읽으면서 동의하고 감동했던 내용 몇 가지를 적어 본다.

① “교회가 소금을 잃어갈수록 세상은 갈증을 잊어버리게 된다”(87p)는 말은 참으로 멋드러진 문장이다! ‘교회’라는 ‘소금’은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갈증’을 느끼게 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교회가 그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세상은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 그 ‘갈증’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 아닌가!

② 영적 감수성 지키기(110p)에 대한 부분은 오늘날 교회와 성도에게 정말로 필요한 부분이다! 나쁜 영화만이 아니라 감상적인 것도 피한다는 저자의 이야기는, 김남준 목사의 책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게 한다. 김남준 목사는 ‘포르노를 보는 것은 물론 나쁘지만 할 일 없이 쇼핑 목록을 보는 것은 더 나쁘다’고 주장하며,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와 같이 ‘불륜’을 ‘사랑’으로 미화하는 종류의 책이나 영화를 보는 것은 지독히 위험스러운 일이라고 경고한다. 그러한 경고와 저자의 이야기는 일맥상통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영적 민감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결국 우리를 범죄로 밀어 넣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어버리기(114p) 때문에, 강조되고 또 강조되어야 하는 내용이다!

③ 예배와 관련된 문구들... “열정은 논리적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하도록 만든다.”(167p) “대부분의 교회는 예배드리는 그 자체보다 예배를 위한 마르다의 ‘사전 준비’를 더 편하게 생각한다. 물론 둘 다 중요하다. 하지만 예배는 예배 준비와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다.”(168p) “우리의 실수는 마르다의 그것처럼 주님의 분명한 임재가 나타났을 때도 그분의 발 앞에 앉지 않고 여전히 준비에 몰두해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나타나시면 준비를 멈추고 주님을 찬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168p) 또한 성령님의 임재를 간구하면서도 정작 그분이 오시면 오래 머물지 말아 주기를 요구하는 우리의 ‘말도 안 되는 이분법’적인 태도에 대한 저자의 지적(174p)은 정곡을 찌른다!


5. 저자의 결론에 대하여 - 상반되는 두 가지 결론

① 처음 ‘1. 주제에 대해서’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은 두 가지이다. a. 하나는 둘 다를 각자 인정하라는 것이요, b. 다른 하나는 서로를 배워가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결론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건덕지는 없다. 그럼에도 시비를 걸고 싶은 건 왜일까? 너무도 ‘매끄러운’ ‘균형’이라는 개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까? ‘어떤 면에서’ 성경은 균형을 깨버리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오순절 성령 강림 직후에 모여서 기도하던 사람들은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사람들은 그들이 술에 취했다고 단정했다. 다른 사람의 눈에 술에 취한 것으로 보이는 모습이 과연 ‘균형’잡힌 모습일까? 성령에 강력하게 사로잡힌 수많은 하나님의 일꾼들이 모두 ‘균형’잡힌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까? ‘균형’에 대한 주장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균형’ 쪽으로만 몰고 가는 것도 개운하지는 않게 여겨진다.

② 처음 예상했던 것처럼 저자는 두 가지 결론을 함께 사용한다. 저자는 먼저,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마르다는 마르다대로 놔둬야 한다고 주장한다(83p). 나는 이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각각의 특성에 맞추어 각자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해야 하고, 그 다음에 서로 돕도록 해야 한다는 것(88p) 올바른 순서라고 생각된다. 저자는 267페이지에서도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마르다는 마르다대로 놔두라. 양자간의 자연적인 상호작용으로, 환대함으로 만들어내는 집안에 균형을 만들어내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267p)라고 다시금 결론짓는다.

③ 그러면서도 그는 두 번째 결론도 제시한다. 어쩌면 저자는 이것을 가장 결정적인 결론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저자의 결론은 처음 예상 했던 두 번째 결론과는 차이가 있다. 저자는 “마르다며, 이제는 행주를 내려놓고 음식 준비하는 것도 멈추라. 마리아여, 이제 마르다를 격려하여 주님 발 앞에 함께 앉으라”(275p)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것은 마리아와 마르다가 서로에게서 배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르다를 이끌어 마리아의 자리에 앉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마리아에 대한 편애’가 결론이 이런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닐까?

④ 하지만 저자는 이 두 주장 사이의 부조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간과하는 것인지 그냥 넘어가 버린다. 사실 이 책의 주제를 감안한다면 이 부분을 정리해주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결국 이 책은 ‘마르다의 영성과 마리아의 영성’ 사이의 균형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마리아의 영성’에 손을 들어주면서 끝나는 듯 보인다.


오래된 주제는 그만큼 이야기꺼리도 많고 생각할 꺼리도 많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을 것이다. 그것을 풀어가는 쉬운 방법은 없다. 그동안 되어왔던 논의들을 숙고하고 그 위에 서서 한 걸음 더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이 전혀 새로운, 나만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도 과거에 이야기 되었던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로 그치고 만다.

물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질서’가 꼭 ‘균형’과 동일한 것도 아니며, 우리 인간이 ‘균형’을 잡겠다고 나서면 오히려 균형이 깨지기가 십상이다. 그렇다고 균형을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아니지만, 좀 더 기도하고 좀 더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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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 포인트 - 기독교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12가지 전환점
마크 A. 놀 지음, 이석우 외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1. 처음 책에 대한 광고를 보면서 내용에 대해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방대한 기독교 역사를 12가지 터닝 포인트로 요약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그 12개의 터닝 포인트가 상당히 타당성 있으며 전체 역사 흐름의 맥을 잘 잡아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와 같은 항목에서는 전체를 개괄할 수 있는 좋은 포인트들을 제시해 주어서 상당히 유익했다. 새로운 정보와 시각을 제공해 주는 꽤 괜찮은 책이라 생각된다.

2. 현대를 다루는 13장은 터닝 포인트 5가지를 함께 제시한다. 아직 진행 중이라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그만큼 터닝 포인트를 잡아내는 일이 힘들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터닝 포인드틀은 기독교 역사를 더욱 풍성하고 새롭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왔다. 또한, 이러한 점들과 관련하여 다른 생각도 하게 되었는데, 중요한 터닝 포인트들만이 아니라 말 없이 드러나지 않게 신앙을 지켜온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의 진정한 계승자요 수호자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3. 저자가 '시작하면서'에서 제시하는 기독교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들은 상당히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그들의 사고와 행동에 있어서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일에 미숙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 성경보다는 시대의 흐름과 유행, 그리고 '효과'에 치중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성경을 중시하는 이들은 그것의 실제적인 적용에서 한계에 부딛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성경의 진리를 실제 생활에 적용하는 부분에서 필요한 지혜는 기독교 역사를 배우는 것을 통해 얻을 수 있다!

4. 교회 역사 가운데서 발견하게 되는 수많은 오점과 실수들은 교회를 이끌어온 진정한 원동력은 사람 편의 어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해준다. 데카메론에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처럼...(성지 순례를 다녀온 무신론자가 교회의 타락상을 보고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신하고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교회 역사는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하심을 확인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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