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사도행전
진 에드워즈 지음 / 미션월드라이브러리 / 2005년 3월
평점 :
품절


1. ‘이야기 사도행전’이라고는 하지만 사도행전 전체를 다루는 것은 아니고 사도행전 13:3까지만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사도행전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그것의 현대적 의미 그리고 적용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단순히 사도행전만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2. 저자의 작가적 상상력은... 때론 놀라운 통찰력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조금은 무리/억지인 듯 느껴지기도 한다. 심지어는 저자의 ‘지식의 부족’이 느껴지는 부분도 꽤 되었다.

* 지적하고 싶은 몇 가지를 항목별로 나누어 보았다. (괄호 안의 숫자는 페이지.)

1. 좋았던 내용들

1) ‘나사렛 예수의 처형’과 ‘유월절 어린양 준비’와의 대조(18)나, ‘오순절 성령 강림’과 ‘초실절’의 대조는 신선했다.

2) “하나님의 능력은 빈호주머니에서 나온다”(90)는 말은 멋드러진 표현이었다.

3) 목회자의 사도적 역할의 강조(109, 110)는 꽤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4) 초대 교회에 직분이 세워지기까지의 과정과 세월에 대한 지적(105)도 좋았다. 우리는 직분을 세우는 데 있어서 너무 성급하다! 저자는 스데반의 예를 들고 있는데(126) ‘지금 당장’하도록 요구하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본문 중에서... : 그러나 현재 우리는 선교 사역에 나서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은 오직 성령님이야!’라고 주문을 외우기만 한다. 물론 이 말은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그러나 성령을 경험한 사람이 곧 모든 권능을 얻었다는 것은 아니다.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 모두가 목회자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현대 교회에서 성령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목회를 하고 교회의 리더가 된다는 것도 큰 문제지만, 반대로 성령을 체험했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와 인내함이 없이 섣부르게 덤비는 것도 매우 큰 문제다.

5) 자격을 살피기 위해 ‘은사’에만 집중하면 위험하다는 지적! 은사만이 아니라 그의 일상적인 교회 생활도 보아야 한다(118)!

6) “교회는 그들이 다니는 곳이 아니라 그들 자신”!(156) 오늘날과 같은 선교의 개념은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실제로 선교에 앞장섰던 사람들(198)

7) 고넬료의 개종과 관련하여 그가 할례를 받았을 것이라는 지적(215)은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럴듯한 지적!

8) 예루살렘 교회는 왜 안디옥 교회에 바나바 한 사람만 파견했을까?(223) 일반적으로 둘씩 짝을 지어 파송하는 것의 예외 상황에 대한 지적. 아마도 이는 사울 등장을 위한 배경이 되는 듯...

9) 안디옥의 교사들... 그들은 ‘즐김, 재미’가 아니라 ‘삶의 감동, 구원의 메시지’를 보여주었다!!!(256) 현대 사회와 교회는 사람들에게 ‘즐김’과 ‘재미’를 주고자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2. 좋지 않았던 내용들

1) 12제자들이 오순절 이후에 비로소 ‘사도’라 불렸다는 내용(34)은 틀렸다. 오순절 이전에 이들이 사도로 불렸던 경우는 많다.(마 10:2; 막 6:30; 눅 6:13; 9:10, 12; 11:49; 17:5; 22:14; 24:9, 10, 11, 33).

2) 베드로의 무식함에 대한 강조(35) 역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기는 하지만 불분명하다. 예를 들어, 주석가들은 베드로가 쓴 두 개의 편지(베드로 전후서)는 매우 유창한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고 말한다.

3) 이것은 사도들은 헬라어를 몰랐다는 주장(230)과 연결된다. 하지만 성경이 기록된 코이네 헬라어는 당시 시장에서 사용된 매우 일상적인 언어였고, 당시에 헬라어는 공용어였기 때문에 많은 경우 헬라어를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옳고, 사도들이 헬라어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 같은 경우는 그의 이름도 헬라식 이름이고,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에도 빌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것으로 보아(요 12:20 이하), 적어도 빌립은 헬라어를 할 수 있었다. 저자는 왜 자꾸 사도들이 헬라어에 무뢰한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4) 예루살렘 교회의 성장 방식과 유대 지역 교회들의 성장 방식에 대한 대조(185) 또는 안디옥 교회의 성장과 관련된 지적(258)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간단히 말해서, 저자는 예루살렘 교회는 기적/이적을 통해 성장했고, 그 외의 교회는 ‘공동체 생활’이나 ‘말씀’을 통해 성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단정은 아쉽다.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에도 기적/이적은 여전히 행해졌다. 유대 전도에 있어서 기적/이적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빠져있다고 해서 더 이상 기적/이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것이 보편적으로 행해졌기에 굳이 기록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적/이적’과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은 함께 가는 것이며,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안디옥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의 사역에서 여전히 기적/이적은 행해졌으며, 그의 선교 여행은 헬라 지역에서도 행해졌지 않은가!

5) 바나바가 예루살렘 교회에 ‘반역’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는 지적(231)은 지나치게 보인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이 보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까? 또한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꼭 그렇게 해석하기는 어렵다. 정말 편지를 통한 보고조차도 하지 않았을까? 사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의 안디옥 사역과 관련해서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6) 저자는 바울의 고향인 다소가 ‘이방 신전으로 가득 찼다’고 소개한다(234). 물론 이방 도시들에 이방 신전들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가득 찼다’는 표현은 아덴의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행 17:16 우상이 가득). 하지만 이처럼 도시에 우상과 이방 신적을 가득찬 것을 본 바울의 반응은 무척 강렬한 것이었다. 바울이 정말 아덴과 별다를 것이 없는 상황(다소)에서 자랐다면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 아닐까?

7) 인물과 관련하여 생소하게 들리는 주장들이 몇 가지 있다.

① 바나바가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이다. 이는 바울과 아굴라가 업이 같다는 말씀(행 18:2-3)과 혼동한 것은 아닌가?

② 저자는 안디옥 교회의 교사 가운데 하나였던 ‘시므온 니게르’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었던 ‘구레네 시몬’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분명치 않다.

③ 마가 요한의 어머니가 ‘마리’(251)가 아니라 ‘마리아’(행 12:12)이다. 번역이나 오타의 문제일 수도... 하지만 구레네를 ‘시린’이라고 번역한 것(255)은 좀... 키레네나 사이린까지라면 몰라도 ‘시린’이라는 음역은 전혀...

8) 직분과 관련해서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① 저자는 초대 교회의 직분이 ‘사도 - 전도자 - 예언자 - 장로’의 순서로 세워졌다고 말한다(250). 하지만 사도행전이 그런 순서로 직분이 나온다고 해서 꼭 그런 순서로, 점차적으로 세워졌다고 주장하는 것은 조금 무리일 듯...

② 장로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현대적인 장로에 대한 설명으로 들린다. 예를 들어 ‘직접 목회를 하지 않는다, 예언을 하고 말씀을 전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단지 사도들이 없을 때 교회의 행정을 대리로 처리해 주는 사람들이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초대 교회의 장로는 사도들을 가리키는 데도 사용되었으며(베드로나 요한은 자신을 ‘장로’라 부른다. 벧전 5:1; 요이 1; 요삼 1), 장로와 가르침을 연결시키는 본문(딤전 5:17)도 있기 때문이다.

③ 장로의 선택 방법은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다는 지적(251) 역시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신약 교회가 장로를 어떻게 선택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이나 집사의 기준이 제시되고 있는 본문이 있는 것을 보면(목회 서신), 장로 역시 선택의 기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④ 사도직 임명에 대한 이야기(264)도 조금 납득하기 어렵다. 저자는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세운 것과 관련하여 “하나님은 두 사람을 사도로 임명하셨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쉽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물론 사도행전 14:14은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곳 한 곳 뿐이다. 이것은 아마 단순히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도’의 의미를 그대로 적용시킨 것일 수 있다(오늘날 선교사를 가리키는 missionary는 보낸다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missio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선교사도 ‘사도’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사를 ‘사도’로 부르지 않는다.)

하지만 성경은 12사도와 바울 이외의 사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바울은 고전 12:29에서 “다 사도겠느냐”라고 말한다). 오늘날 ‘사도’로 불리는 바울의 경우, 당시에도 그의 ‘사도권’은 계속해서 도전받았다. 하지만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사도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이미 부름을 받았기에 바나바의 경우와는 다르다.

저자가 ‘사도직’을 ‘보편화’시켜 말하는 것은 곧바로 오늘날의 교회에 ‘진정한 사도들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지적으로 연결된다(265). 초대 교회 이후에 과연 사도가 존재하는가? 오늘날 교회 안에 ‘사도’가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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