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 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바리데기> 황석영,286p
황석영이 바라보는 생명수는 사랑이었을까,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건, 타인이 잘 되기를 바라고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아닌가. 사랑한다는 건 살아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랑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감사히 받아들인다. 사랑하기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러 나선다. 사랑이 사람을 살리는 힘이라면, 바리공주가 찾던 생명수이기도 한 것 같다. 그것은 “우리가 늘 밥해 먹구 빨래허구 하던 그 물”이고, 그 물이 생명수라는 것을 알아보게 되는 과정이 바리공주가 겪은 고행이라는 맥락으로 <바리데기>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황석영의 바리데기는 그 자신이 초래한 고통이 아니라 국가차원에서 주어진 고통을 당한다. 바리공주도 그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 버림받는 게 아니라 일곱째 공주로 태어났기 때문에 버림받는다. 그때 자신을 탓하면서 자신을 수정한다고 해서 그 고통이 덜어지는 게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당연하지 않은 듯 매번 고민할 수밖에 없다. 개체는 종족 및 집단의 삶에 영향을 받는다. 게다가 개체가 모여서 종족이 되기 때문에 종족의 삶은 개체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종족의 삶을 판단할 때도, 개체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방법 이외에 뾰족한 수를 찾기 어려웠다. 개인이 왜 고통받았는지 질문하고, 그 고통이 왜 종족이나 집단 차원에서 주어졌는지 고민하고, 개인이 더 고통받지 않기 위해서 집단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방식으로, 그게 아직 누군가를 제외하는 방식이 될지라도 그런 식으로 고민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왜 바리와 바리공주는 고통받아야 했는가? 왜 바리의 국가는, 바리공주의 부모는 그들을 제외해야만 하는 상황에 몰렸는가? 왜 한사람과 사회는 어떤 것들을 제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가? 제외하지 않고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왜일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리지 않고서는 왜 아무 일도 진행할 수 없게 되는 걸까. 80년대, 사람들은 독재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감정들을 소외시켰다. 2000년대, 사람들은 소외를 소외시키기 위해 혼자가 되어 SNS로 사람들과 정치적 의견을 공유한다. 과격한 선언은 세세한 내용을 소외시킨다. 더 잘 살아남기 위해서, 일을 효율적으로 해내기 위해서, 인류는 진화의 과정을 거쳤고, 그 가운데 많은 것들이 소외되었다.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인간은 자연을 소외시켰고, 자연은 파괴되었다. 자연이 파괴되면서 인간은 다시 자연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소외시켰다. 한 집단은 그중 소수를 소외시켰고, 집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유지된 집단은 소외된 자들이 일으킨 전복에 의해 전복당하고. 생으로서 죽음을 소외시키려는 자는 죽음에 의해 소외당하고. 이런 지경에서 누군가가 이 버티기 어려운 생을 뚫고 나도, 세상도 사랑해준다면, 그래 죽은듯이 숨을 쉬다가도, 온 몸으로 살아있으려 할 힘이 생기겠다. 이 사랑은 생명수와 같겠다. 버림받은 이가 다시 회귀하여 우리를 구원하러 돌아온다. 복수가 아니라 구원이라면, 더더욱 그게 더 진실이 되기를 바라면서 염치없게도 그만이 구원이 가능하단 생각을 하며 간절하게 믿겠다. 다른 게 아니라 그런 이가 가장 순도 높은 사랑을, 순도높은 생명수를 가슴에 품고 있을 테니까. 자기보존의 법칙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세상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다고,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테니까. 그걸 믿고 싶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바리데기를 전했으리라 상상할 수 있다. 무당을 불러 그것을 수없이 말해달라 청할 수 있겠다. 죽음의 신이 무당에게 깃들어 죽음으로서 생을 감싸주겠다 말해주는데, 한치앞을 모르는 삶이라도 다시금 잘못되었다 여기는 것에는 맞서싸우면서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기겠다. 사랑하며 살겠다. 생은 제외하고서야 생일 수 있는데, 죽음은 누구도 제외하지 않고 그러니 누구라도 구원할 수 있다. 사랑이 제외하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죽음만 할 수 있는 일 처럼 보이는 일조차 능히 해내는 데, 어찌 사랑이 생명수가 아닐 수 있을까. 생명수를 전한 사람이 신이 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일까. 죽음의 신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 죽는 설화에서의 바리데기도, 구원을 행한 자로서의 면모가 있을 것이다. 다만 예수처럼 ‘인간’으로서 죽는 자, 우리와 같은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런 식으로 구성된 설화일까.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의 신이 되지 않고 인간으로 죽는 것도 친근하다. 그런 죽음이라면 바리데기에게 요구되는 사랑이 크기 때문에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불평등하기에, 여성 혹은 인간이 우상시될 우려도 있겠다. 예수가 그렇게 신이 되었던 것처럼. 이를 신화적 비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바리데기에서의 바리의 역할이 미소지니(misogyny)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걸까. 인간에게 이상이 필요하지만 이상때문에 인간을 혹사시키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경우를 막기 위해서 “misogyny”, “philogyny”등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모든 이상은 이상이 되지 못한 모든 것을 배제하기 때문에 이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 이상향을 만들지만 이상향은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서 더는 이상향이 되지 못하기도 한다. 제노사이드도 자국민의 경제적 어려움을 자국민을 이상화함으로서 해결하고 나머지를 배척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다.
황석영의 <바리데기>도 몇몇 무가처럼 바리를 신으로 승격시키지 않고 시대적인 상황을 고스란히 겪는 인물로 그린다. 만약 바리가 신이 되었다면, 그가 겪었던 고통들이 더는 ‘문제시’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그렸다고 해서 그 문제가 더는 문제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소설을 쓰는 사람들은 보통 문제상황을 신화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끝내서 문제를 문제로 둔다. 문제 상황을 똑바로 바라볼 힘이 생겼기 때문일까. 많은 것들이 인간의 통제하에 있으니 이 역시도 인간의 통제하에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이 담겨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상이 주된 사상이기에 가능해진 일이기도 하다. 이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사생아’소설과 닮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머니는 나를 낳은 존재라 믿을 수 있으니, 아버지를 의심하는 서사가 사생아 소설이지만, 세계 내에 믿을 구석이 있는 존재를 두고, 믿을 수 없는 존재를 규명해나가는 일, 혹은 믿을 수 없는 것을 제거해가는 일, 그것이 큰 틀에서 사생아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렇기에 더 현실적으로 그릴 수 있는 거라면, 소설이 미처 말하지 않은 것을 걸러 보는 훈련도 필요하겠다. 소설가 역시 시대의 사람이고, 시대가 말하지 않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거나, 현실이 그러하기에 그렇게 서술된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황석영의 바리데기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로서의 바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드물게 나타나는데, 신분이 분명하지 않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다. 이민자 남성도 마찬가지겠지만, 이민자 성인 남성이 할 수 있는 일이 성매매밖에 없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밀입국한 성인 여성은 전부 성매매업소에 가게 되는 것처럼 그려진다. 이것이 사실과 정확히 일치한다면, 이민자들에 대한 규칙이 바뀌어야 할 것이고, 이민자를 만들어내는 국가에 외부적 압력과 내부적 노력이 필요하다 판단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이었다면, 바리데기 무가에서 바리공주가 겪었던 고통을 따라가기 위해서일까. 사실 소설 바리데기에서는 초반부를 지나면 여성으로서 부모로부터 차별받는 게 아니라, 인간 개인으로서 세계사의 흐름에 휩쓸려서 고통받는다. 소설에서는 가족으로부터 고통받는 것과 사회에서 고통받는 것이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할머니와 아끼는 강아지가 죽는 동시에 바리는 생명수를 찾는 과정을 함께 겪는다. 작가는 이를 ‘생명수를 찾는 바리의 여정’으로 엮고자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황석영은 소설 바리데기에서, 씽이 아이를 돌보지 않고 돈을 훔쳐 달아나기 때문에 아이가 죽는다는 식의 인과관계를 설정하고, 바리가 은혜를 입고서 씽을 돌보지 않은 까닭에 바리의 아이를 잃은 것이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하는데, 사실 이 사건들 간에는 확실한 인과관계가 없다. 그게 바리의 책임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인과관계를 불어넣는 것은 사랑하는 인간일 뿐이다. 자신의 책임이 아닌 일조차도 자신의 책임으로 불러들이는 것. 그런 맥락에서 작가가 소설에 너무 개입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캐릭터 스스로 납득하기 이전에 작가가 그 결말을 주입하려는 것 같았다. 씽의 죽음이 필연적인지도 솔직히 잘 납득이 되지도 않았다. 바리의 남편이 이슬람전쟁과 연결된 것도 잘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매끄러움과는 별개로, 그런 일이 실재로 일어나기 때문에 소설가로서 그려낼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다.
역사적 상황에서는 바리가 ‘버림받는’ 정황을 납득할 수 있으나, 왜 신화에서는 바리가 버림받는가? 바리데기가 태어나고 일곱째 여자아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도, 신화적 비방이라 본다면, 이때부터 여성에 대한 두려움 공포 등의 미소지니가 실행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미소지니의 세상이 병들었을때, 다시 바리의 힘으로 병을 치유한다는 건, 지나치게 바리에게 많은 것을 걸고 유지하는 게 아닌가? 어쩌면 미소지니의 극복이기보다는 필로지니가 되면서 다시 미소지니가 된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래도 버리는 자보다, 버림받은 자의 힘이 더 강하다는 걸까. 일반적으로는 반대로 생각하기 쉬운데, 버리는 자는 사실 자신이 약자임을 인정할 수 없기에 힘을 휘두르는 측면도 있다. 무조신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바리공주 무가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퍼져 있던 것이라 그런 이야기로서 일상의 고통을 이겨내려는 의미였을지 분명하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세부적인 내용이 전국적으로 다르더라도 전체적인 골격이 비슷한 건 그만큼 변화된 서사보다 계속 유지되는 서사가 중요하다는 의미이라는 것은 알 수 있다. 하지만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채록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무조신화에 가까운 서사일수록 더 오래된 무가라고 짐작했어도, 어떤 것이 진실에 가까울지는 모른다.
신화나 소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무언가 역할이 있었고, 그래서 살아남은 거라면, 이 작품들은 어디까지 해냈어야 했을까? 실재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신화나 소설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면서도 왜 이것들을 지속할까. 모든 사람이 궁극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내면화하여 가르치기 위함일까.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문구를 읽지만, 우리는 모두 다르다는 것부터 배워나간다. 다르기 때문에 같게 대해서는 안되는데 평등이라는 건 어떤 방식으로 지켜지는건가? 나는 과연 타인을 평등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것을 세부적으로 따지고 들어가면 내가 사는 방식에도 의문이 들고, 어떻게 포장해도 스스로의 삶은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빠지게 된다. 왜 살아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제외하는가. 어떤 사건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어떤 사람을 제외하기 때문이라면, 왜 그 사람과 사회는 어떤 사람을 제외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는가?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확인한다. 눈이 먼 사람, 자기 몸을 자기 뜻대로 다루지 못하는 사람, 말을 더듬는 사람. 등 신체적 조건이 다른 사람과 다를 경우, 많은 경우 사회적 조건이 다르게 된다. 인종에 따라 차별받는 지역에서 태어난 유색인종은, 피부색 때문에 차별받는다. 하지만 신체적 조건과 무관하게 차별받는 경우도 있다. 화폐가 없는 집에서 태어난 사람, 화폐가 많은 집에서 태어난 사람, 일곱째 공주로 태어난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다. 바리공주는 고귀한 집안의 일곱째 딸로 태어난다. 바리는 북한에서 태어난다.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떤 조건을 가졌는지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크게 영향을 주는 세상에서 살면 사람들이 정의로워지고 배려가 넘쳐날까.
힘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지만, 개인은 ‘모든 것’을 고려한 객관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인지 일단 의문이 든다. 게다가 그 개인은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공부하여, 그것을 토대로 파급효과를 예측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더라도 더는 무고하게 죽는 사람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기에 그 예측이 가능하기를 바라는 강력한 소원을 마주하게 되면, 가능해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소원할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어떤 세상을 꿈꾸어야 하고 어떤 소설이 가능할지 고민하는 것을 멈추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지금은 모르겠다. 한치 앞을 살아갈 뿐이 아닌가. 어떻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은 오늘날 읽어도 사람을 그렇게 치졸하게 만들고 부끄럽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지금 인간이 읽어도 적용되니, 인간이 변할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도 하게 되는데. 이 탐구와 공부가 바르게 사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
2016.12.16.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