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김엄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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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무의미, 무의미의 세계.


김엄지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어디를 가는 지 모르게 어디를 가고, 아무런 목표의식도 없이 부유하다가 결말이 다가올 때까지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끝난다. 이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을 명확히 알 수 있는, 기존의 서사방식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소설이든, 인물의 욕망을 파헤쳐 지난하게 풀어내든, 볶아먹든, 좌절시키든, 기승전결이 있는데, 김엄지의 소설에서는, 뭔가 기승전결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소설을 끝까지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뭔가 모를 재미와 긴장감이 있다. 인물들이 아무것도 제대로 원하지 않고, 뒤엉켜도 뒤엉키는가보다 하고 자신들의 삶을 방관하는데도, 이야기가 진행되고 이루어진다. 누구나 ‘목표’를 말하지만, 정작 그 자신들을 그게 왜 목표인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달려가고 있는 그 상황이, 맛깔나는 문체와 결합하여 이야기가 되었다. 그토록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와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사실이 놀랍다. 이 시대를 표현하기 위하여 불려내진 새로운 소설형식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 중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돼지우리」, 「영철이」,「어느 겨울날」 에는, 인물들에게 목표같지 않은 목표가 있다. 하지만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목표가 이루어진 이후, 그 목표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는 것을 보여주면서 소설이 끝난다.

인간이 목표 없이 무의미한 건, 단지 신이 없다 믿는 세상에 살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가, 그런 무의미를 조장하는가? 아니면 인간이 본디, 목표가 없는 존재인데 그것을 사회 안에서 함께 감당하지 않기에 혼자 감당해야 하기 때문일까. 김엄지가 보여준 무의미한 세계가, 지금 이 시점을 살아가는 나에게는 굉장히 중요하게 들린다.


표제작은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이다.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라는 제목은, 미래가 없어보여서 ‘헬조선’이라 불리는 곳에 산다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상당히 도발적인 이름이다. ‘소설’로 어울리는 제목 같으면서도 그렇지 않은 느낌이 든다. 무수히 돌아다니는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미래를 꿈꾸는 행동은, 그 자신의 가치를 높히고, 사람답게 어울려 살기 위하여 하는 일이라 생각해왔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는 ‘미래’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이름조차 없다. 이름이 없어서 독특하지도 않고, ‘그’라고 지칭되는 것이 누구라도 상관없이 보인다. 원자화된 개인은,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이상, 이름이 불리워질 일이 없고, 그는 그이든 다른 이름이든 딱히 특별하지 않다. 이런 개인이 ‘도모하는 미래’라는 건, 딱히 거대한 목적이 없다. 한치 앞만을 보고 가는 것 뿐이다. 

 ‘그’ 역시 딱히 특별한 목적 없이 등산을 간다. 건강에 좋아서라든가, 그런 이유같은 것도 아니다. 그에게는 딱히 연락하고 싶은 소중한 사람도 없다. 그와 헤어진 전 여자친구는, 미래가 없는 그라서 헤어졌다고 했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한 가지 계획이 있다. 산에 가면 다이빙을 할 것이라는 것. 그런데 다이빙을 딱히 하지 않아도 좋고, 해도 좋은 그런 정도의 계획이다. 그렇게 등산을 가서, 숙소를 찾아 가고, 서로간에 의미를 주고받지 않는 대화를 나누고, 그리고 목적은 이루지만, 그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것 같은 상황처럼 보인다. 문장들도 뭔가 무의미하게 반복된다. ‘근처에 숙소가 있습니까?’ 라는 질문이 여러 특징없는 사람들에게 반복되고, ‘좀더 어두워지기 전에’라는 말도 반복된다. 반복되지만 의미는 없다. 의미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반복되는 것처럼. 반복을 위해 반복되는 것처럼.


 ‘그의 기대에는 확실한 이유가 없었다. 그는 어제보다 더, 계곡과 다이빙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기대와 확신으로 그는 간밤에 꾸었던 악몽을 잊었다.’ (p167,「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그’는 그가 처한 모든 상황에 곧 ‘익숙해지고’, ‘기대와 확신’만으로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지만, 그를 뒷받침할 이유는 딱히 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것이 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만, 그마저도 ‘이불빨래, 세금’같은, 목표와 마찬가지로 해야 할 이유가 딱히 없는 생각뿐이다. 다이빙이라는 목표를 향해 꾸준히 나아가지만, 그것은 마치 ‘죽음’을 향해 목표없는 그의 삶이 그렇게 나아가는 것처럼 암시된다. 소설 안에서 내내 반복했던 무의미만 계속 그 끝을 향해 가는 도중에 반복된다. 그렇기에 이야기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기분이 든다. 끝나지 않아야만 할 것 같다. 삶이 이렇게 끝나기를 누구도 진심으로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돼지우리」에서도 마찬가지의 양상이 등장한다. 「돼지우리」는 김엄지의 등단작인데, 이 소설에서도 ‘삶’의 문제가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여기서도 주인공들에게서 딱히 ‘목표’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라라는 면접을 매번 ‘떡’같이 본다. 그것은 우라라에게 ‘개’, ‘좆’과 같은 말로서, 면접을 잘 보지 못했다는 뜻이다. 취직이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보다, 외설적인 단어들에 압축해서 표출된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외설적인 단어들이 툭툭 불거져 나오는데도 외설적으로 들리지도 않고, 거북하지도 않다. 화자가 그것을 지나치게 분노를 담아 이야기하는 게 아니기 때문일까? 

면접에서 번번히 떨어지는 우라라가 취직한 곳은 ‘돼지우리’라는 식당인데, 채용 계약서가 재미있다. 돼지를 마음껏 먹게 하고, 최소 세 번만 출근하면 되고, 한달 급여는 백만원이고, 돼지가 될 때까지 돼지고기를 먹으면 된다. 뭔가 수상한 곳이다. 이윤을 내기 위하여 우라라를 고용한 것이 아닌 것처럼 들린다. 게다가 ‘돼지우리’ 안의 ‘돼지’라니. 사실 우라라가 돼지가 되어 잡아먹힌다고 해도, 이 직장이 이득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요즘은 공장식 축산을 하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인 인간을 돼지로 만들어서, 키워 잡아먹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갈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돼지고기를 먹는 돼지는, 동족을 잡아먹어 스스로를 먹여살리는 셈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구조가 우리를 그렇게 몰아세우는 것처럼.

그런데 만약 이 계약이 동화에서처럼 ‘돼지’가 되어 잡아먹히거나 하는 최후를 맞는 게 아니라면, 이 직장만큼 꿈처럼 들리는 직장도 없다. 이 직장에서 일하면 돼지가 되고, 사장이 말하는 음식을 일주일에 한 번씩 먹어야 한다고는 해도, 고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기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하는 일도 없는데 돈도 주는 곳이라니, 선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에 비교하면 현실의 직장은, 하고 싶지 않은 일만 잔뜩 하고, 밥값도 대체로 스스로 지불해야 하고, 자기 삶 없이 노동력, 시간을 전부 투자하여 겨우 돈을 받는다. 이것도 좋은 직장의 경우이지, 대부분의 취준생들을 그 삶 없는 삶을 위해서 삶 없이 취업을 준비한다. 스스로의 복지같은 것은 신경쓸 겨를도 없다. 그걸 생각하면, ‘돼지우리’라는 직장은, 정말로 이상적인 것처럼 들려서 이상하다. 

화자인 ‘나’는 그런 직장을 수상쩍어 하면서도, 스스로가 돼지가 아니냐고 되묻는다. ‘돼지우리’의 사장은, ‘나’를 가리켜 사람도 아닌 것이 돼지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아직 ‘나’가  질문하는 존재이기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나’는 스스로를 돼지라 확신하고, 어느 부위가 돼지인지 질문하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니면, ‘나’에게는 아직 이상한 곳을 이상한 곳이라 자각하는 능력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영철이」 에서도 삶의 단면이 나온다.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꼈다. 밥, 사람과 개에 어떤 상징성을 두고, 그것들을 비교를 통해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그닥 삶의 의욕이 없어보인다. 밥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밥이 주식이기 때문에, 밥을 먹는다는 것은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취득하여 삶을 살아가려고 먹는 음식과 동치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밥맛이 없다. 이는 곧 삶의 의욕이 없다는 말로 치환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기에 딱히 삶의 목표도 의욕도 없는 영철은 그냥 습관적으로 밥을 먹는다. 그의 아내는 그런 영철이 불만스럽다. 밥을 저렇게 맛없게 먹으니, 자신을 사랑하는 건지 잘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따로 소통하지 않는다. 영철은 아내의 말에 특별히 신경써서 대답하지 않고, 아내는 영철에게서 온기를 느끼는 데 포기한다. 그래서 개를 데려와 그와 똑같은 이름을 붙여 부른다. 그리고 개는 영철과 아내 모두에게서 더 사랑받고, 집 안에 온기를 가져다 주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과는 소통하지 못하면서, 말이 통하지 않는 개와는 소통한다. ‘언어’가 부재하는 순간이, 이들에게 더 따뜻함을 가져다 준다. 왜 소통이 부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딱히 없지만, 사람보다 동물을 더 편안하게 여기고, 함께 사는 것이 버거운 현대인들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묘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철이 아무 별다른 이유 없이 실직 후, 잠시간의 화목한 시간을 주던 개 역시도 잃어버린 이후엔, 영철은 아내에게서 이혼 통보를 받는다. 그들을 연결해주던 유일한 끈마저도 사라져버린 까닭이다. 외부 조건과 무관하게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던 시대와는 다른 양상이다. 

아내가 밥맛이 없어 밥맛을 되찾으려던 신혼 초의 시기에 친정엄마는 딸에게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영철과 아내가 이혼 후, 영철이 밥맛이 없다고 하자 아내는 무신경하게 오이지와 게장을 추천한다. 아내의 엄마가 추천했던 것과 동등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서, 서로간에 진정한 소통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소통의 부재는, 또 다시 삶의 무의미로 치환된다. 요즘 사람들은, 이미 의미가 만들어져 있는 세상에 그냥 태어나 주어진 대로 살지 않기 때문에 더더욱, 소통으로 사람들은 의미를 함께 만들어간다. 그렇기에 소통이 없으면, 삶이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 소설은 ‘소통’에 초점을 맞추어 무의미해진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어느 겨울날」의 Y는 김수동에게 사기를 당해서 김수동을 쫓아다닌다. 김수동이 자기 인생의 모든 것을 망쳤다고 말하면서도, 김수동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쫓아다니는 것을 보면, 사실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보다 김수동을 쫓는 것이 더 중요해보인다. Y는 햄버거, 섹스, 김수동을 통해서 삶을 붙잡으려고 하는데 그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인물들은 계속 이야기한다. 계속 자고 싶은 의지가 있으면 잠을 마음껏 잘 수 있다는 것, 삶의 의지가 없어서 딱히 하고 싶은 일도, 기억하는 일도 없다는 것,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들은 허무가 무엇인지 아느냐는 둥 대화를 나누지만, 별로 답을 찾지 못한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나 역시도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나는 피곤하고 우울한 삶의 면면들을 발견하지만 무언가를 딱히 시도하지는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에서도, ‘아득함’을 느끼고, ‘꽃’을 사고 싶어하지만 소망은 소망으로 그친다. 나는 소설의 마지막에서 김수동을 쫓아간 Y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사기친 김수동을 붙잡아 벌을 주어도 Y의 허무와 외로움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식으로 끝난다. 이 소설에서의 ‘나’와 Y역시도, 과연 그들이 잘 소통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는 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김엄지 소설들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김엄지가 사용한 여러 가지 비유와 상징이다. 인생에서 인물들이 마주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을 통해서, 김엄지가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비유가 등장한다. 가령 「삼뻑의 즐거움」에 나오는 ‘팔광’은 세상을 테트리스에 비유한다.


그냥 쌓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이상하게 쌓으면 죽어요. 잘 쌓아야지 없어지고 다시 쌓을 수 있어요. 또 쌓고 없애면, 벽돌이 내려오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요. 나는 그 속도를 따라서 계속 쌓고 없애야 돼요. 속도를 못 따라가면 나는 죽어요. 없애기 위해서 쌓는 것 같지만, 쌓기 위해서 없애는 거에요. (p42,「삼뻑의 즐거움」,『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


작가가 나서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돼지우리」라는 작품에서처럼, 가게 하나가 통째로 우화적인 성격으로 현실과 무관하게 뜬금없이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앞 문장과 뒷 문장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적당히 리듬감이 있어서, 읽는 데 술술 넘어가는데도 마음이 움직여서, 잘 쓰여진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다. 

김엄지는 ‘삶’의 필수적인 이야기를 소설로 다룬다. 먹는 것, 성관계, 매일매일의 일상적인 활동, 일상에서 벗어난 자극적인 활동, 인간적인 상처, 사람과의 소통 등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소설을 이어간다. ‘무의미’하게 채워진 일상을, 어떻게 ‘무의미’하게 이끌어가는지 보여주면서 ‘무의미’ 자체로 보여준다. 밀란쿤데라는 『무의미의 축제』라는 소설에서, 우리는 무의미를 무의미 그 자체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말들을 들으면, ‘무의미’ 자체가 부정적인 메시지를 준다고 바로 단정짓기에는 뭔가 이상하다. 김엄지도 무의미를 딱히 비난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관적으로 좌절하는 것 같지도 않다. 비관적으로 좌절하면서 썼더라면, 이렇게 가볍게 읽히지 않았을 것이다. 가볍기 때문에, 조금 더 쉽게 마주할 수 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우리는 이 소설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질문이 남았다. 


2016.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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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8-24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우끼 님의 이 리뷰를 읽었다면 냉큼 별 하나를 더 추가했을 겁니다..
취향 타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호불호가 분명한...
전 소설은 좀 클랙식하게 읽는 편이라, 별로 였습니다.
하지만 제 취향의 문제일 뿐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실천문학주의자가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을 평가절하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잘 읽었습니다.

우끼 2016-08-25 20: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저도 이 소설이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소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주변에서 이 책을 읽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봐도,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정말 별로라고 하는 분들이 많아서.. 저는 정말 좋아했던 축에 속했습니다만..
이 소설집은 김엄지가 발표한 소설 순서대로 실려있는데요. 어떤 분은 김엄지의 소설 중 `돼지우리`가 가장 전통적 서사방식에 머무른 작품이고 점차 다음 소설을 읽을 수록 김엄지만의 스타일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더라구요. 그 중간지점에 있는 `미래를 도모하는 방식 가운데`라는 작품이 그분께는 가장 좋았다고 하시더라구요. 김엄지의 스타일도 볼 수 있으면서, 형식을 너무 어그러뜨리지 않은, 너무 멀리 나가지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하신다고 하셨었어요.
저도 곰발님이 올리신 리뷰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