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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권수연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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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기억은 사람의 존재처럼 금새 사라진다. 반대로 말해야 할까. 사람의 존재는 사람의 기억만큼이나 금새 모습을 감춰버린다. 기억 역시 존재의 생리를 닮아서일지 중요한 것이라 여긴 것이든 아니듯 어느 순간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처럼 수많은 기억속으로 사라져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사는 동안에도 사그라지고 죽은 이후에는 구별되는 것이 더 어렵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그 소멸이 안타까웠던지, 아니면 그 사이에 숨쉬는 인간의 고독이 안타까웠던지. 소설의 초점을 사라지는 기억들과 존재들에게 맞춘다. 그는 마치 기억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듯한 문체를 사용하여 그가 생각하는 ‘기억’의 특성이 작품안에서 숨쉬게 했다. 그 점이 다른 작가들이 기억과 사건을 다루는 방법과 다른 점이었다. 이야기는 기억처럼 밀려들어왔다가 기억처럼 뚝 끊겼다. 한 사람의 기억을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기억을 되새기는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하면 마치 옆에서 살아 숨쉬는 인간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내 기억과 뒤섞여서 또 하나의 변주를 일으켰다. 소설의 이야기에 이끌리기보다, 나 자신의 기억을 더 자극받아 생각의 나래가 펼쳐졌다. 

소설은 듬성듬성 무언가 빠져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고 매끄럽다. 그래서 마치 직조된 인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물을 대하는 듯한 긴장감을 준다. 그 어조를 부드럽다고 칭하기에는 어쩐지 부족하고, 여성적이라 하면 ‘여성’이라는 단어를 다시 정의해야 하니 뭐라고 말해야 적당할 지 좋은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마초적이지 않다고 해야 하나. 거대한 논리구조를 구축하여 독자를 압박해서 당위적인 설명에 굴복하도록 만드는 문체가 아니다. 마치 내 기억처럼 조용하게 스며든다고 해야 할까. 그걸 말하는 데 전혀 장황하거나 지루하지도 않다. 공감하고 쉬어갈 수 있을 정도의 분량에 담아낸다. 조각을 만들 때 정을 두드려도 정을 두드린 흔적을 내보이지 않는게 미덕이었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 작품 역시 내면에 담은 이야기를 말하려고 ‘기억’으로 비추어지는 ‘정’모양을 제외하고는 그런 방식으로 쓰여진 걸지도 모르겠다. 기억을 만드는 방법, 기억을 떠올리는 방법대로 소설이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이것이 기억이라는 듯 표면으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순간 이후의 그들의 얼굴, 그들의 목소리는 마르가레트의 얼굴을 제외하곤 긴 세월 속으로 사라진다. 돌아가던 음반은 끽끽 소리를 내다가 일순간 뚝 멈추고 만다. 그게 아니라도, 이름을 왜 ‘르 피르마망’이라고 붙였는지 보스망스가 영원히 알 수 없을 그 카페는 곧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그날 밤 마르가레트 르 코즈는 새 직장을 구해서 리슐리외 대행사 및 방금 만난 동료들과 완전히 연을 끊고 싶다고 보스망스에게 털어놓았다. 매일 구인광고를 읽으며 자신에게 또다른 지평을 열어줄 문구가 눈에 띄기를 고대한다면서, 오페라 광장에 도달하니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했다. …32p<<지평>>”

그들의 얼굴 그들의 목소리는 ‘마르가레트’의 얼굴을 제외하곤 긴 세월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이름을 왜 ‘르 피르마망’(창공)이라고 붙였는지 보스망스가 영원히 알 수 없을 그 카페. 그곳에서 나와 그녀는 또다른 지평을 열어줄 문구를 찾으며 걷는다. 보스망스가 기억하려고 하는 마르가레트를 제외한 배경들은 덧붙여 설명하지 않고 ‘긴 세월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작가는 그게 안타까웠는지. 당연하게 기억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점들을 당연하게도 택스트로 끌어올려 적어둔다. “이름을 왜 ‘르 피르마망’이라고 붙였는지 보스망스가 영원히 알 수 없을 그 카페”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재차 말함으로서, 굳이 그 카페를 왜 그렇게 지었는지 궁금해하며 직접 물어보지도 않지만, 궁금해 할 수 있을 만한 것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기억에 ‘영원히’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소중히 여기는 것 만큼이나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도 영원히 사라져버린다는 것에 연민을 가지는 듯이 조용하게 붙어있다. 이 소설의 독특한 ‘기억의 문체’는 이런 식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런 서술은 억지로 모든 것을 기억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을 주된 타겟으로 삼은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살아내려 노력하는 ‘보통’사람의 이야기임을 보여준다. 무수히 많은 사람 중 하나. 그 중에서도 세계의 흐름에 곁다리로 밀려나 부단히 살아내려 노력하는 사람 중 한 명의 기억을 쫓는다. 


소설 안에서 드러나는 인물들은 자신이 사는 시대에 지쳐있다.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으로부터 도망치면서 삶을 이어나가고, 적극적으로 야망을 가지고 개척하겠다는 힘이나 의지는 이미 깎여나가버린 것처럼 노쇠해 보인다. 그래도 그 저변에 깔린 생명의 힘은 전혀 약하지 않았다. 뭐든지 다 해내겠다는 듯이, 무모하게 뻗어나가지 않을 뿐이었다.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다 해도, 연인에게 모든 것을 말하라고 캐묻지 않는다 해도 살아갈 뿐이었다. 그 일례로 보스망스는 마르가레트가 무서워하는 대상에 관해 자세히 물어볼 수 없다고 느꼈음에도 그녀와 긴밀하게 연결된 연인이었다. 그런 모습이 어쩐지 이국적으로 느껴지면서도 익숙했다. 자신이 사는 시대에 지친 상태로 앞으로의 미래가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꿈꾸지 않는 요즘 세대와 비슷해보였다. 


“……그리고 마르가레트와 나, 우리 둘 역시 무허가로 캠핑중이었다. 대체 어떤 계기가 있어야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잘 태어나 잘 자란 사람들, 자신 있는 입술과 눈빛으로 부모에게 사랑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그 한결같은 자신감과 적자다운 당당함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168-169p<<지평>>”


 “이본 고셰는 그 질문에 미소를 지었다. 미래…… 지금의 보스망스에게는 날카롭고도 신비한 울림을 주는 말. 하지만 그때의 우리는 한 번도 미래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가진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한 현재 속에 있었다. 170p<<지평>>” 


인물들은 ‘지평’어딘가에서 걷다 서로를 발견하고, 헤어지고 다시 떠올리며 만나려는 과정을 거친다. 작가는 “지평이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포개져 혼재하는 시공간”이라고 했다고 한다. 제목은 작품에 흐르는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기억을 붙잡으려 해도 붙잡아지지 않고 그저 흘러가면서 혼재되어 있듯이, 인물들도 그렇게 등장하고 사라지고 만나고 헤어진다. 시간에 의해 공간이 뒤섞이고 모든 것이 혼재하는 공간. 그렇게 살피고 나니 책 표지도 잘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이 시간을 살고 있는 나도 지평을 걷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여전히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을 인지하려면 똑같은 인생을 두번 살아봐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서라도 그저 모든 것이 한꺼번에 섞인 시공간안에서 숨을 쉰다. 기억만큼이나 나라는 존재 역시 금새 잊혀지고 사그라져버릴 테지만 그럼에도 보스망스처럼 어떤 누군가를, 일생에서 귀중한 무언가를 찾으려고 돌아다니고 있다. 그렇기에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쎄한 기분이 들면서도 익숙하다. 반드시 무엇을 해야 겠다는 당위성도 시간에 홀려 없지만 그럼에도 안타깝다. 가느다란 끈을 들고 떠난 그녀를 찾아서 책방에 찾아간 보스망스처럼, 펼쳐진 유리 수족관 안에서 어떤 것을 구별해내고, 아직은 나도 모를 무언가를 만나고 쫓아 갈 수 있을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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