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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 ㅣ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 젊은 시절의 핀천
리뷰를 쓰는 동안 친구에게 이 책을 읽어보라고 내밀었다. 친구는 ‘엔트로피’단편이 인상적이고 좋았다고 했다. 엔트로피를 읽으면서도 나는 던져진 사유를 해석하기에 바빴는데, 그 단편을 좋다고 느낄 수 있었던 친구의 시각이 궁금했다.
“오바드가 담배연기 자욱한 방에서 커다란 종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글을 써나갈 때 그녀의 목은 금빛 활처럼 휘어졌다. ‘젊어서 프린스턴 대학에 다닐 때’ 칼리스토는 회색 털이 무성한 그의 가슴에 새를 꼭 껴안고 그녀에게 받아쓰게 했다. ‘칼리스토는 열역학 법칙을 기억하기 위해 연상기억법을 배웠다. 우리는 이길 수 없다. 상황은 나아지기는 커녕 더 나빠질 것이다. 더 나아질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그는 쉰네살에 기브스의 우주 개념에 직면하자 대학생 때 유행어처럼 했던 말이 결국 예언이었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막대기처럼 생긴 미로 같은 방정식은 궁극에 가서 나타날 우주의 열역학적 죽음을 그에게 미리 알려준 것이었다. 오직 이론상의 엔진이나 씨스템만이 백 퍼센트의 효율이 있다는 것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립된 시트메의 엔트로피는 항상 지속적으로 증가한다고 말한 클라우지우스의 정리(定理)에 관해서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브스와 볼츠만이 통계역학의 방법을 이 원리에 적용하기 전까지는 그것의 무시무시한 의미가 그에게 전혀 분명해지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는 고립된 씨스템이 은하수든 엔진이든 인간이든 문화든 그 무엇이든 간에, 좀더 확률이 높은 상태를 향해 자발적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그는 환원주의의 오류가 안고 있는 위험을 알고 있었고, 무기력한 숙명론의 우아한 퇘폐에 빠지지 않을 만큼 강하기를 바랐다.”
<엔트로피>117-118p
그는 핀천 작품의 주인공들은 전부 삶의 목적을 상실한 사람들 같다고 말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우울증이나 불감증같은 증세를 앓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둘러 싼 환경에는 항상 죽음과 일회적인 쾌락이 함께 공존하고 있는데 거기서 인간 삶의 유한함을 깨닫든지 너무 늦었다는 것을 후회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나는 <엔트로피> 저 부분을 시작하는 문장 “오바드가 담배연기 자욱한 방에서 커다란 종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글을 써나갈 때 그녀의 목은 금빛 활처럼 휘어졌다.” 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복잡한 사유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도 탁월했지만, 그것을 이미지로서 드러내는 것도 잘하는 듯 했다.
작가서문을 읽었다. 핀천이 직접 자신의 초기 작품을 비평하고 있었다. 겸손한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들을 진지하고 솔직하게 대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개구리 올챙이적 무시하지 않고 펴낸 책이었다. 내 입장에서 그나마 읽을 만한 단편은 <은밀한 통합>뿐이었다. 다른 단편은 조각조각 파편처럼 흩어진 재료들이 아직 소설이 되지 못하고 지면 위에 남아있을 뿐이라 느꼈다. 그래도 그의 초기 단편은 좋은 사유의 가능성이 돋보여서, 그가 쓴 장편을 보고 싶었다.
그가 작가 서문에서 말한 그대로가 모두 단편안에 드러난다. 그는 그의 단편들에 드러난 오류가 부끄러우나, 초보적 수준의 소설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문제점과 글을 쓴지 얼마 안된 작가들이 피했으면 하는 사례들에 관한 주의를 담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고 설명한다. "이 단편들이 가끔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우며 무분별해 보이더라도 그 모든 결함이 있는 그대로 여전히 쓸모가 있었으면 하는" 이라는 말로 그 말을 대변한다.
인물들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대화는 대화가 아니었다. 어떤 행동을 하는데, 그 행동이 와 닿지 않았다. 그들이 그냥 행동을 하는구나, 싶었는데 소설 한편이 끝난다. 게다가 갑자기 내뱉는 깊은 사유는 사유 자체를 나타내기 위해 인물을 꼭두각시로 세워놨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전혀 그렇지 않아. 내 말은 폐쇄회로 같다는 거야. 모든 사람의 주파수는 다 똑같아. 그래서 잠시 뒤 나머지 스펙트럼에 대해선느 잊게 되고 이것만이 중요하고 실재하는 유일한 주파수라고 믿기 시작해. 반면에 바깥에서는 대지의 위아래로 기가 막힌 색깔과 엑스선, 자외선들이 펼쳐지고 있어.”
“너는 로치도 폐쇄회로라고 생각하는 거야?”
“맥니스 대학이 세계가 아니듯, 로치도 스펙트럼은 아니야.”
<이슬비>61p
인종차별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쓴 문구가 인종차별적이었다. (그러나 더건한테는 근사한 점들이 많았다. 가령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는 백인과 흑인간의 백 퍼센트 결혼을 위해 매진하는 공산주의자 조직이라는 것. 이슬비 43p) <이슬비>에서 여자가 옷을 벗더니 뜬금없이 삽입된 개구리들은 섹스장면을 나타내는 것인가?
“사방의 개구리들은 갈수록 야만적인 합창을 주문 외우듯 읊조렸다. 간헐적이기는 했지만, 그 합창은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도 묘하게 작은 손가락들의 뒤얽힘, 큰 맥주잔들의 부딪침, (…) 그녀는 완전히 유린당하지 않은 파시파이처럼 보호감정 같은 것을 유발했다. 마침내 마음이 진정된 두 사람은 바보같은 개구리 울음소리에 계속 시달린 끝에 서로 떨어져 누웠다.” <이슬비>72-73p
그 이후 분위기로 봐서는, 섹스장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작가 역시 그 글들을 보고서는 상황을 알 수 없을 것이라고 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사유가 너무 진지하고 중요해서, 단편들의 단점들에도 읽어볼만한 글이 되었다. 중요한 사유들이 작품 곧곧에 등장한다. 그가 발견한 사유들이 단점을 보완해 발전되었기 때문에 이후 그의 장편들이 대작이 된 것이라 여긴다.
“왜냐하면 그 자신과 진정한 거짓말의 진실은 근처의 기이한 곳으로 이미 오래전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진실의 범위를 알아차릴 수 있지만 활동적으로 움직이는 순간, 원자보다 작은 입자를 관찰하는 사람이 관찰행위 자체로 인해 작업, 데이터, 확률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 것처럼, 관습을 완전히 위반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사물에 대한 관점을 엉망으로 만들 수는 있다.”
<로우랜드> 95p
반면 <은밀한 통합>에서는 이미지들이 연결되고 인물들이 살아있었다. 다른작품들에 비해 문장이 연결되어 캐릭터가 하나로 그려졌다. 인종차별이 심한 어른들과, 그런 어른들 사이에서 흑인 친구 ‘칼’과 놀러다니는 아이들의 대비가 이루어졌다. 그 모임의 대장급으로 나오는 그로버 스노드는 실재하는 인물처럼 생생했다.
“그는 결함이 있는 천재소년이었는데, 가령 그가 만든 발명품들이 늘 성공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숙제 하나당 십 쎈트를 받고서 모든 아이들의 숙제를 대신해주는 부정한 돈벌이를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매우 자주 드러냈다. 성적이 갑자기 90점, 100점으로 오른 모든 아이들 뒤에 그가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게 되었다.”
“똑똑함을 보여줄 기회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는 여지없이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은밀한 통합> 192-193p
그로버는 이제 막 성장하는 아이로 등장한다. 그는 이제 세상에 눈을 뜨고 어른들을 비웃는 단계에 있다. 그로버를 중심으로 모인 아이들은 ‘천재소년’과 함께 그들을 기만하는 어른들의 나쁜 행동들(인종차별등 그들이 나쁜 행동이라고 규정하는 것들)을 비웃고 상상의 놀이친구 흑인 ‘칼’과 돌아다니며 논다. 그들의 놀이는 공장이 가동되고 끝난다. 놀이가 끝나고 그들도 어른들과 같은 사람으로 자랄 것이라는 것처럼 묘사된다.
“그런 다음 밤의 빗속으로, 마침내 각자의 집으로, 뜨거운 샤워, 마른 수건, 잠자기 전의 텔레비전, 잘자라는 키스, 그리고 결코 다시는 전적으로 안전할 수 없을 꿈속으로 까불거리며 걸어갔다.”
<은밀한 통합> 260p
나쁜 말에는 늘 허점이 드러난다. 이런 수준밖에 안되는 리뷰를 쓰는 것이 부끄럽다. 그의 장점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리뷰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다른 신간평가단 분들의 리뷰를 읽어봐도 내용안에서 무언가를 건지신 분들이 대단해 보였다. 내 견식적 한계때문에 이 작가의 장점을 잘 발견하여 설명하지 못했다.
내가 그의 장편을 읽고 핀천의 팬이된 이후라면 내게도 읽을 만한 작품이 될 것 같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