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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주현 옮김 / 1984Books / 2025년 2월
평점 :


“죽음에서는 사과 맛이 난다. 사과나무가 꽃을 피우고 불길에 휩싸인다.” 2022년 생을 마감한 프랑스 작가 크리스티앙 보뱅의 ‘마지막 욕망’은 자살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처럼 지극히 낮으신, 흰옷을 입은 여인, 그리움의 정원에서, 작은 파티 드레스, 가벼운 마음 , 환희의 인간 등 보뱅의 작품은 한 문장 한 문장 그 깊이는 가늠하기 쉽지 않지만 또 찾게 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1984Books 에서는 보뱅의 작품을 꾸준히 출간하고 있습니다. 이번 작품은 어떤 것들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또렷해진다는 『빈 자리』입니다. 제목에서 오는 첫인상은 쓸쓸함과 고독감이었습니다. 눈앞에서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 언어로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것들, 그러나 오히려 그 부재 속에서 더욱 강하게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기록, 그러한 흔적들을 따라가는 작품으로 보뱅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기대가 됩니다.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다. 우리는 빛의 노래를 듣는다. 갓난아이가 자신의 가슴 속에서 흐르는 샘물 소리를 듣는 것처럼.---P.92
사랑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역시 지울 수 없는 어린 시절에 뿌리는 두고 있다. 우리는 영원한 사랑을 기다린다. 한 아이가 오지 않는, 그러나 올지도 모를 눈을 기다리듯이. ---P.92

우리의 삶을 비추는 것은, 말로 전하거나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결국 침묵으로 돌아가고, 붙잡은 것은 결국 손을 떠난다는 뜻입니다. 저자는 한 줌 속 맑은 물을 어찌할 수 없듯이 우리의 삶 역시 통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벗어나 우리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만을 소유할 뿐이라고 . 꿈속의 나무 한 그루, 침묵 속의 한 얼굴, 하늘의 빛 한 줄기 이 문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은 단순한 서사나 논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특정한 인물의 삶을 다루는 전기에서도 이러한 방식을 거부합니다. 빈자리에서도 한 사람이 삶의 작은 순간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때때로 멈춰 서서 사유하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보뱅은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크뢰조에서 태어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로 평생 글쓰기를 하며 문단이나 출판계 등 사교계와는 동떨어진 생활을 한 고독한 작가였다고 합니다. 독특하고 맑은 문체로 글은 한줄 한줄 모두 인상 깊습니다.
책을 펼치면 우리는 한 사람의 시선과 함께 걸으면서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존재하고, 바라보고 생각합니다. 아이들과 놀고 기차역에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부엌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눈밭을 걷고 문장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소멸해가는 것들을 바라보고 기록해 나갑니다. 빈 자리는 존재와 부재를 함께 바라보고 응시하며 엮어낸 시적 산문입니다. 시간은 일 속에서, 휴가 속에서, 어떤 이야기 속에서 소모됩니다. 빈 자리란 무엇가 있다가 사라진 자리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금 우리는 자신의 곁에 빈 자리를 메우는 일, 묵묵히 시간을 기다리며 어떤 존재들을 채워나가는 일이 진정한 삶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